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음직한(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들이 대중화에 기여했지), 나와 동일한 존재가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평행우주'이론과 비슷한 소재를 다룬 소설.
작가인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는 심리학 박사다. 홈페이지에 작가 소개를 보면 인간의 심리와 감정과 문학의 관계를 연구한다고 되어 있다. 이 소설은 그의 첫 소설이다.
어느 가상의 나라에는 총 7개의 공간이 계곡과 호수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으며, 서쪽의 3개 공간은 각각 20년/40년/60년 전 과거의 내가 살고 있고, 동쪽의 3개 공간은 각각 20년/40년/60년 후 미래의 내가 살고 있으며,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은 그 가운데 있는 현재의 공간이다. 각 공간의 경계에는 삼엄한 경비가 이뤄진다. 각 공간을 넘나드는 것은 정부 차원에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만 허락된다. 다른 공간을 방문하는 특별한 사유는, 가령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며 살다가 과거로 돌아가 아내의 살아있는 모습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노년의 남편, 사고로 죽은 자식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과거로 돌아가 학교에서 생활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부모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애도를 위해 방문하는 케이스들이다. 다른 공간을 방문하려는 사람들은 고위 공무원인 자문관에게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비밀리에 다른 공간을 방문할 수 있다. 다른 공간을 방문할 때는 감시병과 함께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착용한 채로 방문해야 한다. 방문할 때 과거와 미래가 개입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바뀌면 현재에 큰 혼란이 생길 수 있기에 해당 공간에 대한 개입은 철저히 금지된다.
(첫 소설의 설정치고 굉장하지 않은가?)
주인공 오딜은 현재의 공간에서 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여학생이다. 어릴 적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머니는 정부 기록물 보관소에서 지루한 일을 하며 딸을 키우면서 딸을 자문관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자문관으로 선발되기 위해서는 에세이 - 교육 - 교육 중 계속되는 테스트들을 통과해야 한다. 오딜은 순탄하게 테스트들을 통과하며 자신이 좋은 자문관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다. 그러나 오딜은 (소위 말하는) 자신과 썸을 타게 되는 에드메라는 친구의 부모가 미래에서 방문한 것을 우연히 보게 된다. 저런 방문은 분명 미래에 에드메를 애도할 일이 생겼다는 것, 즉 언젠가 에드메가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아하는 친구가 죽게 된다는 걸 알게 됐지만, 현재의 개입이 미래를 바꿀 수 있고 이는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오딜은 이를 비밀로 하고 계속 자문관 과정을 밟아나간다. 에드메와는 계속 알콩달콩 썸을 지속한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도 잠시, 에드메는 폭풍우가 부는 어느 날 밤, 평소 오딜과 단둘이 만나 바이올린 연습을 하던 절벽에서 실족해 실종된다. 벌어질 일은 결국 벌어지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1부.
2부에서 에드메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에 오딜은 자문관 과정을 포기하고 (어머니와 사이가 크게 나빠진다) 사회적으로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헌병(감시병)이 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행정고시 재경직 2차까지 붙은 사람이 3차 면접을 포기하고 9급 공무원 시험을 봐서 지방 한직에 근무하게 되는 상황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 (절대 9급을 폄하하는 발언 아니다.)
거의 20년을 일반병으로 근무하다가, 자신을 좋게 봐주는 남자 장교의 도움으로 장교 자리에 도전하게 되는데... 과거 에드메와 함께 친하게 지냈던 친구 알랭이 등장한다. 알랭 역시 에드메의 죽음으로 엉망진창이 된 삶을 살고 있었고, 경계병인 오딜에게 서쪽으로(과거로) 가서 에드메를 구하자는 제안을 던진다. 질서에 순응하며 하루하루를 무심하게 살아오던 오딜은 장교에 도전하며 조금은 밝은 미래를 꿈꾸지만, 어떻게든 오딜을 서쪽으로 보내려고 하는 알랭의 방해로 오딜의 도전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오딜은...(스포 금지)
흡입력 있는 독특한 설정과 인물의 고뇌가 살아 숨쉬는 소설이다. 우리는 과거로 혹은 미래로 갈 기회가 생긴다면 현재에 영향을 줄 만한 행동을 목적으로 가는 것일 텐데, 이를 통제하는 상황 앞에서 어떤 감정이 느껴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래도 봤으니 됐다는 안도감?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벌어질 비극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로 인해 각 시점에 큰 혼란이 벌어지겠지만, 사랑을 무기로 돌진하는 사람이 가끔은 승리하기도 해야지.
나한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거의 나에게 한 마디만 해주겠다. "비트코인 사!"
이 빈약한 상상력이란...
그거 말고는 딱히 바꾸고 싶은 과거는 없다. 사실 비트코인 없어도 잘 살고 있긴 하니, 다행스러운 인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