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니 에르펜베크
2024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고른 소설. (황석영 선생님의 <철도원 삼대>가 최종 후보작으로 같이 올라왔다고 한다. 난 그 책을 더 재미있게 읽었다.)
상의 권위를 믿는 편이라 노벨상, 부커상, 휴고상, 국내 여러 문학상 등등 수상작들을 찾아서 읽어보는데, 문학상을 받은 문학적 성취가 반드시 소설의 재미를 보장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자주 깨닫는다.
이 작품도 그렇다. 통일 전후의 독일에서 남녀가 만나 사회적 혼란 속에서(비뚤어진) 사랑을 꽃피우고 식어가는 내용인데, 작품에서 그려진 남녀관계가 보통 자극적인 관계가 아니어서 전반에 깔린 사회 변혁의 바람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부커상 심사위원들은 그걸 잘 읽어낸 거고, 나 같은 일반 독자는 그걸 못 짚어낸 거고.
1967년에 태어난 카타리나와 1933년에 태어난 한스가 분단된 베를린의 동쪽, 그러니까 동베를린에서 1986년에 우연히 마주치고 사랑에 빠진다. 반대편 차선에서 미사일처럼 날아오는 차를 발견했지만 핸들도 못 돌리고 바로 정면충돌하듯, 그렇게...
나이 차이가 34살이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홍과 김의 경우... 검색해 보니 22살 차이다. 34살은 좀 심한 거 아니오 작가양반. 이건 좀 비뚤어진 사랑 아닙니까?
당연히 한스는 유부남이다. 아내에게도 몇 번 걸린 불륜의 경험도 풍부하다. 카타리나는 연애 경험이 있긴 하지만 19세 소녀가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에서라도 연애를 해봤자 얼마나 했겠는가.
사랑은 서로의 마음이 균형을 이룰 때 가장 아름답다. 뾰족한 삼각뿔 위에 겨우 올려놓은 30cm 자의 모습과 같달까. 입김만 살짝 불어도 금세 바닥으로 추락한다. 다시 뿔 위에 올려놓으려고 애쓰지만 자꾸만 떨어지는 자를 보면서 '내가 이걸 왜 여기 올려놓으려고 하지?' 라며 포기하고 만다. 남녀관계도 비슷한 것 같다. 이 책에서는 둘의 사랑이 초반엔 무척 뜨겁게 타오른다. 그러다 한스가 자신의 유부남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격지심이 좀 생겨 카타리나에게 이별을 암시하는 말을 한다.
카타리나는 그 말을 듣고 충격에 빠져 있다가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직장동료 바딤과 하룻밤을 보내고 만다. (여전히 한스를 무척 사랑하지만... 저것도 역시 교통사고 같은 거다.) 그리고 바딤과의 관계에서 어떤 느낌이었는지 메모지에 간략하게 적어놓고 잊어버린다.
한스가 그걸 보게 된다. 그리고 34세 차이라는 자극으로 독자를 붙잡아놓은 책은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지경까지 독자를 괴롭힌다. 한스는 카타리나의 일탈을 알게 된 후 카타리나와 이별하지도 않을 거면서 지독하게 괴롭힌다. "어떻게 그런 더러운 짓을 한 거야. 넌 날 배신했어. 난 너의 사랑을 믿었는데. 이제 내 인생은 끝났어. 너와 보낸 시간이 이렇게 헛된 시간이 될 줄이야. 난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어. 나 역시 불행해졌으니까. 네가 우리의 모든 것을 망쳤어. 모두 너 때문이야. 넌 더러운 여자야." 이런 내용의 말을 무려 녹음(!)을 해서 카타리나에게 주기적으로 보내고 그에 대한 답장을 강요한다. 한두 번 반복하는 게 아니고 수십 페이지에 걸쳐 이 지독한 가스라이팅의 과정을 여과 없이 독자에게 보여준다.
게다가 한스는 카타리나를 묶고, (채찍이나 혁대로) 때리며 섹스한다. 분명 그 취향이 아님에도 카타리나는 한스가 하는 대로 그냥 따라온다. 정말 최악이다. 50대 중반에 34살 어린 여자와 사랑에 빠져 집에서 쫓겨나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를 자기 취향에 길들여 제멋대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남자라니...
둘은 결국 헤어지게 되는데, 그 헤어짐의 과정이 너무 지저분하다. 배가 물어뜯겨서 내장이 줄줄 흘러나오는 채로 발을 질질 끌며 조금씩 멀어지는 맹수의 사냥감을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헤어짐의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은 통일된다.
에필로그에 약간 한스에 대한 변명을 해주는 듯한 뜬금없는 이유들이 나오지만, 이미 나는 이 남녀에게 물어뜯겨서 너덜너덜해졌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을 왜 저렇게 지었는지 복기해 보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기회가 있을 때만 흘러가는 카이로스의 시간(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시간이 빨리 흐르고 싫어하는 일을 할 때는 천천히 흐르는)에서 의미를 가져온 제목인 것 같은데, 난 도통 이 소설과 카이로스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작가님의 자아가 일부 투영된 듯한 카타리나. 1967년생으로 태어난 연도가 같다. 아무리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결국 삶의 많은 일은 정치에 관련되어 있고, 심지어 이렇게 분단국가가 하나가 되는 과정엔 모든 국민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런 혼란스러운 경험을 그보다 더 혼란스러운 34살 차이의 사랑 2 : 가스라이팅 8의 이야기를 버무려 끝까지 써낸 작가의 역량에 박수를 보낸다.
400쪽도 넘는 긴 소설을 고통스러워하며 꾸역꾸역 다 읽다니... 중간에 과감히 책을 포기하지 않은 미련함을 자책한다.
내 미련함이란, 뭔가 하나 정해놓으면 절대 중간에 멈추지 않는 것이다. 가장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분야는 역시 먹는 일이다. 먹기 시작하면 남기지 않고 다 먹는다. 가끔 조깅을 할 때도 5km니 10km니 거리를 정해놓으면 그 거리는 어떻게든 채운다. 게임을 시작하면 피폐해진 생활 밸런스가 깨질 때까지 끝을 본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중간에 접는 일은 거의 없다. 젊을 땐 내가 끝까지 다 처리했는데 요즘엔 하다가 힘들겠다 싶으면 팀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책은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기에 일단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통 멈출 수가 없다. 과감히 포기하는 방법도 몸에 익혀야 하는데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