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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by 김알옹

20년도 훌쩍 지난 밀레니엄 즈음의 여름, 대학생의 첫 방학은 두 달이 넘는 긴 시간이었고, 부유한 동기들은 당시 유행하던 유럽 배낭여행을 많이 떠났다. 동아리방이 반방(학과가 아니라 계열로 입학해서 가나다 순으로 10반까지 나뉨)과 가깝다는 중요한 이유로 단과대 연극동아리에 가입한 나는, 동기들과 함께 가을에 올릴 연극 연습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연습이 없는 날엔 친구들과 모여서 PC방에서 스타를 하고 남는 시간엔 여자를 만나느라, 차마 연극에 매진했다는 단어를 쓸 수는 없다.


우리가 올릴 극은 오래전 MBS 뉴스에서 '내 귀에 도청장치가 돼 있다!'라고 소리친 남자를 모티브로, 그가 어떻게 해서 정신이 나가게 됐는지 그의 지나온 삶을 과거부터 밟아온다. 가장 큰 이유는 80년 5월, 항쟁의 마지막 그날 밤 도청에 계엄군이 쳐들어오자 숨어있다가 혼자 도망치고, 베트남전 참전용사 출신인 시민군 동료는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난 허세 가득하지만 결국 계엄군과 싸우러 뛰쳐나가서 죽게 되는 동료 역할을 맡았다.


아마추어라지만 연극 무대에 올라갈 만한 완성도에 이르려면 꽤 긴 시간 연습을 해야 한다. 긴 연습 기간 동안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는데, 20살 평생 공부만 하고 살아온 신입생들이 어찌 그 감정을 이해하고 재현할 수 있겠는가. 하도 연기를 밋밋하게 하니까 선배들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어떤 웹사이트 주소를 하나 알려주고, 밤에 혼자 보면서 내가 맡은 인물을 이해해 보라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리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받았다.


그 사이트는 광주에서 희생된 분들의 사진이 아카이빙 되어 있던 곳이었다. 우리가 요즘 자주 접할 수 있는 상무관 안의 수많은 관 사진 정도가 아니라... 시신을 가감 없이 그대로 찍어놓은 사진들이었다. 스크롤을 아무리 내려도 끝이 없었다. 안구가 빠져있는, 광대가 함몰된, 얼굴 일부가 사라진, 턱이 부서진, 이마가 없는... 분들의 얼굴이 계속 눈앞에 나타났다. 평생 눈으로 본 사진이나 광경 중 가장 무섭고 끔찍한 장면이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다고? 왜?


그 밤 이후 감정을 폭발시키려면 그 사진들을 떠올리기만 하면 됐다. 그렇다고 뚝딱거리는 움직임이 개선되지는 않아서 끝까지 '팔을 잘라버리고 싶어'라는 생각을 하며 연기를 마쳤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주인공 역을 맡은 형은 과한 메소드 연기를 하느라 인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휴학을 했고, 난 연극은 다 잊고 놀고먹는 대학생 역할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뒤로 5월만 되면 그때 봤던 사진들이 자꾸 생각난다. 광주를 다룬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스카우트>, <택시운전사>, <소년이 온다> 등등의 콘텐츠가 나오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그 얼굴들.


올해는 이 책을 읽는 것으로 그 얼굴들을 떠올린다.


<소년이 온다>의 모티브가 된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여사님이 죽은 아들의 모습을 가리키고 계신다. (출처: 오마이뉴스) 책에도 수록된 5월 27일 도청 학살 후의 사진이다.


5월 21일의 서술 중:


그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은 조준 사격을 시작했다. ‘무릎 쏴’, ‘서서 쏴’ 자세를 취하고 시민들을 향해 총을 쐈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며 사람들이 쓰러졌다. 10분쯤 지난 뒤, 다시 1천여 명의 군중이 한국은행 광주지점과 금남로 3가 양쪽 보도에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지하상가 공사장 위 인도에 모여든 젊은이들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볼멘소리로 애국가를 불렀다. 숙연하고 비장했다.

이때 5~6명의 젊은이가 갑자기 큰길 한복판으로 뛰쳐나갔다. 그 가운데 한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
는 구호를 외쳤다. 도청 광장으로부터 300여 미터 떨어진 금남로 한복판이었다. 시민들의 긴장된 시선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요란한 총성이 잇따라 울렸다.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의 머리, 가슴, 다리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태극기에도 피가 흥건하게 젖어들었다. 총탄은 주변 건물 옥상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저격수들이 조준 사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은 3~4명씩 조를 편성해 수협 건물,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 금남로 주변의 높은 건물 옥상에 올려 보내졌다. 그들은 시위대 앞에 나서서 선동하는 사람들을 조준하여 저격했다.

잠시 사격이 멈췄다. 그 순간을 틈타 몇 명의 청년이 쏜살같이 도로에 뛰어나와 쓰러져 있는 시신과 꿈틀거리는 부상자들을 끄집어냈다.

그러자 더욱 놀라운 일이 이어졌다. 다른 청년들이 다시 태극기를 들고 금남로 한가운데로 뛰쳐나와 구호를 외쳤다. 또 총성이 울렸다. 그 청년들도 공중에 피를 뿌리며 금남로 한가운데서 맥없이 쓰러졌다.

다시 사람들이 부상자와 시신을 들어냈다. 그러자 또 몇몇이 태극기를 흔들며 금남로로 뛰어들었다. 총알은 여지없이 날아와 그들을 쓰러뜨렸다.

이렇게 하기를 대여섯 번. 정말로 충격적인 광경이 반복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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