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희, 장류진, 조경란, 김화진, 정소현, 박형서, 백수린
전에 쓴 글에도 몇 번 언급했듯이 문학상 수상집을 많이 읽는다. 읽다 보면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열에 두세 편이고 나머지는 금세 휘발된다. 워낙 특이해서 장기 기억 저장소로 넘어가는 단편 작품들이 있는데, 정지돈 <건축이냐 혁명이냐>, 장강명 <현수동 빵집 삼국지> 등의 소설이 당장 제목을 읊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제목이 머릿속에 저장되지 않고 내용도 완전히 기억나진 않지만 다시 읽으면 '아! 이거 재밌었지!' 하는 작품도 여럿 있다.
도서관 서가를 하이에나처럼 배회하다 발견한 이 책은 창비에서 이미 굉장히 많은 주제로 기존에 발표된 소설들을 엮어 만든 앤솔로지 중 하나다. 최근 발표된 에세이를 읽고 몹시 실망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좋아하는 장류진 작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길래 빌려왔다.
그런데 박형서 작가님의 <실뜨기놀이>를 읽다가 '어 이거...' 하다가 반지하 단칸방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무능력자 부모의 외아들이 달라이 라마라는 설정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몇 년 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인데 제목이 기억 안 났지만 여전히 뇌리 한 구석에 박혀있던 내용이었다. 다시 한번 읽어도 여전히 기똥차게 재미있는 설정과 묘사들이었다.
윤성희 <마법사들>
편부모 가정에서 살아가지만 크게 비뚫어지지 않고 자란 두 남학생이 하룻밤의 가출이라는 아주 작은 일탈을 저지르는데, 그 일탈마저 단지 방황일 뿐 사고는 치지 않아 보면서 기특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품.
장류진 <백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
역시 취업이나 회사생활 장르 전문가답게 7페이지짜리 초단편에서도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한다.
조경란 <봄의 피안>
중진 작가님 답게 필체나 주제가 묵직한 편이다.
김화진 <근육의 모양>
최애 성해나 작가님과 약간 결이 다르지만 또 다른 천재 김화진 작가님의 소설집 <나주에 대하여>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 작가님은 두 여성을 등장시켜 각자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데, 그 배경이 되는 서사의 흐름 또한 몹시 신선하며 자연스럽다. 이 작품에서도 필라테스 수강생-강사의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다가 접점이 생기고 쫀쫀한 흐름이 잘 이어져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정소현 <어제의 일들>
현재 시점의 주인공은 단기/장기 기억상실과 불편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주인공이 이런 상태가 됐는지 과거의 관련 인물들과 주인공의 단편적인 기억이 교차하며 조금씩 실마리가 풀린다. 이야기 구조가 좋았다.
박형서 <실뜨기놀이>
가난에 잠식되어 일견 불행해 보이는 남녀, 아들까지 태어나서 가난은 더 심화되지만 꾸역꾸역 삶을 이어나간다. 어느 날 아들이 달라이 라마의 환생인 것 같다며 티베트의 고승들이 집으로 찾아와 몇 가지 시험을 거친다. 아들은 부모와 헤어지기 싫어서 일부러 문제를 틀리기도 하지만 아들이라도 가난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으로 달라이 라마가 되어 티베트로 향한다. 그러나 1년 후 부모에 대한 그리움인지 혹은 진짜 달라이 라마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들은 다시 돌아온다. 다시 아등바등 살던 가족은 든든한 가장이었던 엄마/아내를 교통사고로 잃게 된다. 남겨진 부자는 다시 덤덤하게 살아간다.
소재가 워낙 특이해서 흡인력이 있는 작품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잠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무려 달라이 라마가 등장하는 작품이니 당연히 불교 철학도 담겨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윤회에 대한 믿음으로 덤덤히 이겨내는 주인공의 생각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내를 그리워한다는 건 인생이 한 번 뿐이라는 말에도 수긍하는 셈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우리는 이런 꿈을 꾸기도 하고, 저런 꿈을 꾸기도 한다. 때로는 이런 꿈이 잠깐 저런 꿈을 꾸기도 한다. 이런 모양의 꿈과 저런 모양의 꿈이 모여 앉아 둘을 반씩 닮은 아기 모양의 꿈을 꾸기도 한다. 그렇게 이어졌다가 끊기고, 잠시 다른 갈래와 엉겼다 돌아오기도 한다.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아내도 이제 믿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불멸하는 꿈들이어서, 가짜로 작별했고, 가짜로 외로우며, 다만 영원히 이어지는 실뜨기놀이의 이번 차례를 마쳤을 뿐이기에, 언젠가 우리는 또다시 세월의 소음 속에서 서로를 찾아가 마치 처음인 것처럼 같이 쉬고, 마지막인 것처럼 나란히 걸으며 이 놀이를 반복할 테고, 그러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과 이어짐과 끊어짐은 그저 놀이의 사소한 규칙에 불과한 것이라 믿는다.
그에 관하여 요즘도 가끔 아들과 이야기한다.
백수린 <흑설탕 캔디>
할머니의 오래전 일기를 손녀가 열어보며 그 안에서 펼쳐지는 할머니의 로맨스. 백수린 작가님은 글을 참 따뜻하게 잘 쓴다. 조만간 신간 <봄밤의 모든 것>을 읽으려고 하는데 많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