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타의 일

박서련

by 김알옹

요즘 재미있게 본 드라마 <더 베어>는 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형이 운영하던 가족 레스토랑을 물려받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수 셰프 출신의 동생이 어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주변 인물의 도움을 받아 레스토랑을 환골탈태시키는 과정을 건조하게 그려냈다. 에피소드 중 식재료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적자가 난다고 하니, 주인공의 동료가 "매일 메뉴를 바꿔서 미슐랭 스타를 따겠다는 너의 욕심 때문에 그동안 요리에 다섯 가지 요소를 넣었는데 이젠 두 가지로 줄여야 할 것 같아. 안 그러면 우린 파산이야." 라며 새 요리를 만들어 와서 함께 맛보는 장면이 있다.


대체 다섯 가지 요소가 뭘까 궁금해하다가 내 방식으로 해석해 봤다. 순대국으로...


너무 질기지 않고 통통할 정도로 안을 채운 찹쌀순대, 입술이 끈적일 정도로 진하게 우려낸 국물, 살코기와 비계와 오소리감투가 적당한 비율로 들어가 다양한 식감을 즐길 수 있는 고기, 자칫 느끼할 수 있는 국물 맛을 잡아주는 들깨가루/새우젓/부추/다대기, 그리고 아삭하지만 적당히 익어서 새콤한 깍두기. 이 정도면 요리에 들어간 다섯 가지 요소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여기에서 두 가지만 남기면 그건 더 이상 순대국이 아닌데...)


한국 소설에 치우친 독서 기록을 보면서 나를 되돌아봤다. 추리소설이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장르소설은 많이 읽으면 질리고, SF소설은 스케일이 작거나 말랑한 이야기가 나오면 질리고, 웹소설과 순수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이돌을 소재로 약자를 죽이거나 괴롭혀 목적을 달성하는 내용도 소름 끼치고, 안온/무해/다정/퀴어/페미/PC 요소 중 두 가지 이상을 조합해서 이야기를 끌어나가면 또 질리고,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죽임을 반복하는 내용도 질리고, 작가 본인의 모습이 작품에 너무 많이 투영돼도 질리고, SF나 추리소설도 아닌데 사회적 통념 따위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은 듯한 인물 설정에 질리고, 단어 선택과 문장 구사는 엄청난 실력인데 이야기 개연성은 개나 줘버린 작품도 질리고, 흥미로운 주제를 잘 설정해 놓고 인물과 서사를 엉망으로 쌓는 것도 질리고, 쌍팔년도에나 있을 법한 사건에 고뇌하는 주인공에 뭔가 있어 보이게 고루한 문장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질린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사람이 이렇게 됐다.)


소설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내 입맛에 가장 잘 맞게 차려주는 셰프 중 하나가 박서련 작가님이다. 매일 메뉴를 바꿔도 모든 요리가 미슐랭 3스타 급인 레스토랑에 온 것처럼 지금까지 읽은 소설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쏙 들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균형감, 필요할 때 확 치고 나가는 이야기의 속도감, 남성 독자도 빠져들게 만드는 여성 인물들, 장편과 단편을 모두 잘 쓰는 일관성... <체공녀 강주룡>, <폐월: 초선전>,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나, 나, 마들렌>까지 읽으면서 느낀 즐거움이다.


<마르타의 일>도 기대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작품이었다. 자정에 책을 펴서 2시까지 단숨에 독파했다. 정유정/정해연의 스릴러 소설을 읽는 느낌인데, 아래의 수많은 요소들이 이루는 박서련 작가님 특유의 균형감이 잘 발휘되어 읽는 재미가 있었다. 가둬놓고 계속 소설만 쓰게 하고 싶기도 하고(그러지 않아도 알아서 소처럼 열심히 쓰신다), 아프면 안 되니까 보약이라도 보내 드리고 싶기도 하다. 이게 아이돌 팬의 마음인가...






자매 -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하고 냉정한 성격으로 교사 임용을 준비하는 언니 수아, 뛰어난 미모와 따뜻한 마음씨로 봉사활동을 다니는 인플루언서이자 취업준비생 동생 경아.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언니는 대놓고, 동생은 마음속으로 얼마간 질투하고 시샘하지만 서로를 무척 아낌에는 틀림이 없다.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주인공인 수아의 관점에서 자매의 어린 시절부터의 서사를 패스츄리처럼 겹겹이 쌓아놓는다.


조력자 - 이 사람이 범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익명의 조력자. 표면적으로는 경아의 죽음 직후 등장해서 수아의 의심을 사고, 나중엔 수아의 복수를 물심양면 도우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자처한다. (마치 장량이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뜻을 함께한 역사 창해와 같은 느낌이랄까) 어떻게 보면 일종의 스토커인데 그 집착의 방향을 수아가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 적절히 돌린다. 수아가 모르던 경아의 숨은 서사를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는 역할도 한다.


연인 - 부모님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싶지 않아서 카페 알바를 하는데, 그곳 점주 언니가 수아를 몹시 좋아한다. 수아는 복수의 과정에 언니를 이용하고 언니 또한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낸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수아의 마음을 언니가 조금씩 녹여주는 역할도 한다.


악인 - 미모의 인플루언서라서 그런지 경아에게는 불쾌한 일들이 종종 생겼는데, 순진한 경아를 꼬드겨 죽음에 이르게 한 놈이다. 유명하지 않은 연예인인데 유력한 집안의 자식이라 안하무인 망나니이다. 영화 <베테랑>의 "어이가 없네"를 읊조리던 유아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꽤나 비슷하다.


종교 - 자매는 열심히 교회를 다녔지만 경아의 미모 때문에 수아가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생겨 수아는 발을 끊고 경아만 열심히 다니게 됐다. 경아의 죽음 이후 수아는 계속해서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를 곱씹는다. 자신은 마르타, 경아는 마리아에 대입해서. 마치 신데렐라와 언니, 콩쥐와 팥쥐처럼 비난받는 악역을 맡는 언니가 자신인 양. 이런 자격지심은 복수가 끝나고 해소된다.

예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당신은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루카 10,38-42)
저땐 미운 동생이었지만.. (Diego Velazquez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National Gallery, London)



수험생활 - 교사 임용시험을 한 방에 합격하려는 수아. 어릴 때부터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정확히 파악해서 확실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해내고야 말았던 수아는 교사 임용시험을 한 방에 합격하려고 한다. 동생이 죽었어도 시험 준비는 흔들림 없이 계속하는 수아가 사실은 슈퍼히어로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노량진의 모습, 소음에 민감한 고시텔과 독서실의 모습, 시험 스터디, 실제 임용시험 2차에서 진행하는 수업 실연 및 면접 등 다양한 수험생활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잘 그려졌다.


복수의 방식 - 치밀하게 설계해서 화끈하게 보내버린다. (스포 방지)

반전 - 마지막 페이지의 기대하지 않은 반전. 없어도 괜찮았겠지만 이게 있으니 절로 "아이 씨 뭐야..." 하며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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