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매큐언
영국의 작가 이언 매큐언의 자전적 소설. 1948년생인 그는 영화 <어톤먼트>로 제작된 소설 <속죄>의 작가로 유명하며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언급된다. 처음 읽는 그의 소설이 700페이지가량 되는 두꺼운 책이라 겁을 먹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1948년생 영국인 롤런드 베인스. 남편과 두 자식이 있던 어머니가 남편이 파병을 나간 사이에 군인인 아버지와 사랑에 빠져 낳은 아들이다. (어머니의 첫 남편은 전장에서 죽었다) 아버지를 따라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해서 기숙학교로 보내진다. 피아노에 재능이 있어 11세에 학교 외부의 22세 피아노 교사 미리엄 코넬에게 개인교습을 받게 되는데, 그녀는 사춘기에 갓 접어든 11세 소년에게 엄격한 피아노 레슨을 하다가 은근히 성적인 암시를 보낸다. 그러다 결국 입술을 맞대게 된다. (미친!)
뭔가 이러면 안 된다는 느낌이 서로에게 온 듯, 그 이후 피아노 레슨은 다른 교사가 담당하게 되고, 롤런드는 평범한 학창생활을 보낸다. 그렇게 3년이 흘러 1962년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미국에 포착됐고, 미국의 케네디는 이를 미국에 대한 강력한 도발로 보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해 전 세계를 불안에 빠뜨린다. 세계사 시간에 등장하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발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걷힌 지 2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핵무기의 개발로 인류의 절멸까지 예상되는 전쟁의 공포가 대서양 너머 영국에서도 널리 퍼지게 된다.
당장 세상이 망할 것 같다는 공포가 14세의 롤런드를 미리엄에게 향하게 한다. 미리엄은 어떤 이유 때문에 롤런드가 3년 만에 그녀에게 온 것인지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첫 경험을... (미친!) 아직 절제하는 방법도 모를 나이에 겪은 섹스가 롤런드의 학창 시절 전체를 잠식하게 된다. 롤런드의 몸과 마음을 모두 지배하던 미리엄은 그에 대한 집착이 심해진다.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온 롤런드를 일주일 동안 감금하고, (너의 가방과 옷은 모두 창고에 숨겨놓았단다) 17세에도 결혼이 가능한 스코틀랜드에 가서 결혼하자고 제안한다. 롤런드도 나와 같이 미친! 을 외치고 미리엄을 떠나고, 미리엄은 "넌 앞으로 여기서 누렸던 걸 찾아다니며 평생을 보낼 거야. 이건 예견이야, 저주가 아니라."라고 끝까지 롤런드를 가스라이팅한다. 뛰어난 피아노 재능과 글솜씨가 있었지만 3년간 미리엄에게 빠져 엉망이 되어버린 학교생활을 포기하고는 육체노동 전선에 뛰어든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내 사랑. 사랑은 헌신이야. 서로에 대한, 미래에 대한, 평생의 헌신. 그게 사랑이야.”
“꼭 그렇진 않아요.”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고, 도로 주워 담기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었다. 그녀가 다가오며 말했다. “이리 와. 우린 말다툼을 해선 안 돼. 너한테 키스하고 싶어.” 그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고 그들은 키스했다. 동시에 그녀가 얇은 흰 면직 위로 그를 애무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 안에서 그가 즉시 발기하는 걸 느꼈을 터였다. 그는 몸을 빼고 그녀를 거칠게 밀어젖힌 뒤 식탁 옆으로 가서 섰다. 손도 안 댄 양고기가 식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좀 봐. 그게 뭘 말하지?”
“난 당신을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는 자신의 대답에 만족했다.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으나 그는 뭔가 일이 벌어질 것임을 경험으로 알았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늘 그랬듯이, 그녀는 그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안락의자에서 올드버러에 가져갔던 자신의 가방을 집어 들더니 그 위로 몸을 숙이고 악보 사이를 뒤졌다. 그녀가 몸을 똑바로 펴자 상기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공포스럽게도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좋아. 딱하구나. 앞으로 넌 여기서 누렸던 걸 찾아다니며 평생을 보낼 거야. 이건 예견이야, 저주가 아니라. 왜냐하면 난 네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사랑은 기회와 행운이 전부야. 넌 열한 살 때 너에게 맞는 상대를 만난 거야. 넌 그걸 알기엔 너무 어렸지만, 난 알았어. 난 더 기다릴 작정이었는데 네가 찾아왔고, 그 이유는 뻔했지. 그때 너를 그냥 보냈어야 했지만 네가 나를 원하는 만큼 나도 너를 원했어. 난 우리를 위한 계획이 있었어. 너를 황홀하게 만들어줄 계획이었지. 그런데 지금 네가 그렇게 내빼다니 유감스럽구나. 그럼 나가. 네 물건 가지고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그녀가 정원 창고 열쇠를 그의 발치에 던졌다. 그가 항의하기 시작했지만 그녀가 더 큰 목소리로 덮어버렸다. 그렇다고 소리를 지른 건 아니었다. “내 말 들려? 나가!”
대학에도 진학하지 않고 일정한 직업 없이 일용근로 등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처지였지만, 롤런드는 자유롭게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다양한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실패를 반복한다. 프랑스 여인 미레유를 만나며 아직 분단 중인 서베를린에 지내면서 롤런드는 미레유를 따라 동베를린을 오가고, 그곳에서 친해진 가족들에게 벨벳 언더그라운드, 밥 딜런 등 서구권의 음악을 몰래 전달하며 뿌듯함을 느꼈지만, 그 가족은 과거에 저지른 사소한 정부 비판 등으로 인해 동베를린의 공산정권에 의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롤런드는 큰 죄책감을 느끼고 미레유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4살 연상의 독일어 교사이자 작가 지망생인 앨리사 에버하트를 만나고 깊은 사랑에 빠진다. 앨리사의 어머니 제인도 작가를 꿈꿨지만, 나치 치하에서 '백장미단'으로 정권에 저항한 남편 하인리히와 결혼하며 꿈을 접었다.
그들은 결혼한다. 아들 로런스를 낳았고 행복한 줄 알았다. 아들이 7개월일 때, 롤런드가 37세에 앨리사는 자신을 찾지 말라는 쪽지와 함께 남편과 아들을 남겨놓고 집을 떠난다.(미친!) 앨리사의 행적을 파악하기 위해 경찰에 실종신고까지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내를 살해한 것 아니냐는 경찰의 의심이었다. 시를 끄적이던 롤런드가 과거 미리엄과 있던 이야기를 여러 은유를 사용해 써놓은 습작 노트를 경찰이 본 것이다. 그러나 독일로 돌아간 앨리사의 행적이 밝혀지며 의심에서 벗어난다.
롤런드는 테니스 강습, 호텔 라운지 피아노 연주, 축하카드 문구 작성 등 여러 일을 전전하며 아들을 혼자 키운다. 돌봄이 힘에 겨워 앨리사의 부모를 만나러 갔지만, 앨리사는 부모와도 거의 연락이 없다고 한다. 3년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순간, 롤런드는 현장에 있었고, 예전 동베를린에 오가던 추억에 잠겨 장벽 주변을 맴돌다 들어간 카페에서 극적으로 앨리사를 마주친다. "당신 아들한테 관심이라도 있는 거야?!"라고 모성을 자극해 보지만, 앨리사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자신이 완성한 첫 번째 소설을 건넨다. 작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외면하고 떠나버린 것이다. 그 소설은 완벽했다. 앨리사는 대문호의 길을 걷게 된다.
롤런드와 로런스는 앨리사 없이도 꿋꿋이 생활한다. 롤런드가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 같이 밴드활동을 했던 친구 피터의 아내 대프니가 자신의 세 아이들과 로런스를 함께 돌봐준다. (천만다행) 피터는 대프니에게 손찌검을 하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다. 오히려 좋았던 롤런드는 아예 대프니의 집에 눌러앉아 동거를 시작한다. 아이들은 모두 잘 자라고, 롤런드와 대프니도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대프니는 다시 돌아온 피터에게 떠난다.
로런스는 조부모와 외조부모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잘 자란다. 어느새 17세가 된 로런스는 여행도 다니고 연애도 하는 등 롤런드의 과거와 비슷한 자유로운 생활을 한다. 롤런드는 여전히 호텔에서 피아노를 치고 테니스 강습을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그러다 롤런드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치매에 걸린다.
그리고 롤런드는 어머니의 과거 행적을 알게 된다. 첫 남편이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고, 새로 만난 롤런드의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면서, 주변의 따가운 시선(남편이 전쟁에 나가니 자식 둘을 입양 보내고 새장가를 들어 애를 가져?)을 의식해서 새로 생긴 아이를 입양 보낸 것이다. 즉, 롤런드의 형. 롤런드는 형을 뒤늦게 해후하며 다시금 전쟁 당시의 부모님을 놀라워한다.
앨리사의 실종신고 시 수사를 맡았던 경찰이 뒤늦게 롤런드의 노트에서 미리엄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미성년자 성착취로 그녀를 고발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롤런드는 미리엄을 찾아간다. 40여 년 만에 보는 미리엄은 여전히 롤런드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듯 고압적인 태도로 그를 옥죄려고 한다. 그러나 롤런드에겐 과거 미리엄이 스코틀랜드에 신고하려고 했던 혼인신고서가 있었다. 다 늙어서 범죄자로 재판대에 서게 될 두려움에 미리엄은 태도를 전환하고, 롤런드는 "그때 왜 그랬어요!!!!" (나도 묻고 싶었다)라고 미리엄을 심문해 그녀의 모든 속이야기를 다 듣는다. 만나서 더러웠고 이제라도 내 인생에서 꺼져! 라며 롤런드는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난다. (정말 벗어난 걸까...)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당신뿐이었으니까. 난 당신을 원했고, 그래서 에든버러 계획을 세웠어요. 그것도 합리적으로 보이게끔 만들 수 있었죠. 당신은 나만큼 당신을 깊이 이해해 주고 헌신적으로 돌봐줄 사람을 절대로 찾을 수 없다. 우리 둘 다 더 큰 성적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상대를 절대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다음 단계는 결혼이었죠. 우리에겐 늘 결혼이 목표였고, 스코틀랜드에선 합법적으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어요. 난 그런 계획에 골몰한 나머지 당신의 저항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당신의 저항에 익숙지 않았기에 화가 치밀었어요. 하지만 그때조차도, 그 난리의 와중에도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요. 당신을 학교에 보낸 다음 가서 데려오면 된다. 전에 그랬듯이 다시 끌어들이면 된다. 당신이 돌아오면 우린 예전과 다름없이 지낼 거다. 난 가까스로 나흘을 기다렸어요. 하지만 당신은 새 학기 첫날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행정실에 확인해 보니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요. 난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당신 부모님의 독일 주소를 알긴 했지만 편지를 쓰진 않았어요. 내가 잘 참아 낸 건 그것뿐이었죠.”
다시 침묵. 그녀는 그의 심판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의 결정을.
아무 반응이 없자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참아 줄 수 있다면 하나 더 이야기하죠. 나는 당신이 다른 학교에 다녔는지, 지난 세월 동안 뭘 하며 살았는지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 프로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았다는 건 알아요. 수년간 계속 찾아보고 알아봤으니까. 당신이 성공하면 내가 당신에게 끼친 피해가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하지만 그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리고 나 때문에 당신이 갖지 못한 것, 음악을 사랑하는 세상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너무너무 미안하게 생각해요. 당신에게 광기를 쏟아부은 것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피로감이 덮쳐 왔다. 그리고 압박감도. 그들의 만남은 그 자신이 숨긴 이야기로 인해 부패하고 왜곡되었다. 그는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는 두려움에 즉각적인 성 경험을 얻으러 간 건방진 어린애였다. 남학생만 우글거리는 그의 좁은 세계에서 그녀는 그가 아는 유일한 성적 대상이었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싱글인 데다 에로틱했다. 그는 욕망을 이루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고, 원하는 걸 얻자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사십 년이 지난 후 이 기품 있는 여성을 비난하기 위해 찾아와 협박하며 자기비판을 요구하고 있었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젊은 수호자가 독선적인 폭도로 변해 늙은 교수를 고문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코넬 선생님의 목에 멍에를 씌우기 위해 찾아왔다.
아니,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그건 피해자가 흔히 보이는 자기비난과 죄책감이다. 지금 그는 성인답게 사고하고 있다. 기억하라. 그때 그는 어린애였고, 그녀는 성인이었다.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어떤 이들은 망가졌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그랬나? 그때 그녀는 그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는 지금 통용되는 정설의 꼭두각시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이런 상반된 생각이 거친 격랑을 일으키며 소용돌이치자 그는 넌더리가 났다.
그들은 자신들을 묶어 놓은 그 강박적이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무한히 반복되는 희열, 불법적이고 부도덕하며 파괴적인 그것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오래전, 스투어강이 내다보이는 햇살 가득한 작은 방 침대에 알몸으로 마주 누워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내 주려 하지 않았고 그 역시 그걸 원했다. 평생과도 같은 긴 세월이 흐른 뒤, 살찐 중년 남자가 그녀를 비난하기 위해 그녀의 저택으로 찾아갔다. 그녀 역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옷을 다 입은 채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 진짜 이야기는 거부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손도 대지 않았고, 그가 기억하기로는 악수조차 나누지 않았다. 그는 냉정한 심문자 역할을 했다. 그녀는 처음엔 냉랭한 위엄을 보이며 그를 쫓아내려 했지만, 나중엔 결국 자백했다. 오 그래, 그는 어린애였고 그건 범죄였다. 하지만 또 다른 진실이 있었고, 그게 문제였다. 그녀는 그 진실을 말할 수 없었고, 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실을 누락함으로써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그도 그녀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인질범을 사랑하게 된 인질―스톡홀름 신드롬. 그 비 오는 밤에 그는 도랑을 파서 번 돈을 뒷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소유물 전부가 든 트렁크를 끌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도망쳤지만, 멀리 가진 못했다. 그에게 남은 손상, 그건 금지된 성적 끌림이었다. 사랑의 기억이 그 범죄와 분리될 수 없는 형태로 남았다. 그는 경찰서로 갈 수 없었다.
피터와 다시 갈라진 대프니. 롤런드는 다시 대프니와 사랑에 빠지고 (나이 60에 대단하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여전히 연주하고 있는 호텔 라운지에서 과거에 동베를린에서 친하게 지내던 그 가족을 상봉하게 되며 행복의 극치를 맛보지만, 그 순간 대프니가...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프니는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몇 개월 남지 않은 여생을 가족들과 행복하게 보내려고 한다. 대프니의 세 아이들과 로런스도 이제 장성해서 각자의 가정을 이루고 있고, 그들은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대프니와 로런스는 마치 허니문처럼 자연 속으로 둘만의 여행을 떠나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추억을 쌓는다.
고통스러운 마지막 한 달을 보내고 대프니는 영면한다. 롤런드는 몇 달 동안 대프니의 유골을 가지고 있다가, 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린 장소에 뿌려달라는 그녀의 유언을 지키러 대프니와 왔던 산으로 떠난다. 그러나 어느덧 정부에서 브렉시트 찬성을 주장하며 고위 관료가 된 피터가 자신도 죄책감을 덜기 위해 대프니의 유골을 같이 뿌리겠다고 그곳에 찾아오고, 피터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롤런드는 피터와 몸싸움을 벌인다. 롤런드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격투 끝에 결국 피터가 제멋대로 유골을 뿌려버린다. 허망하지만 이것도 인생이려니 하고 롤런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앨리사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온다. 그녀는 자신의 야망을 이뤄 독일의 대문호가 됐다. 롤런드는 그동안 출간된 앨리사의 소설을 모두 읽었지만, 그는 어떤 형태로도 등장하지 않았는데, 그녀의 마지막 소설에 그가 등장한다. 하지만 아내를 학대해서 떠나게 하는 남편의 모습으로 등장한 내용에 그는 격분해서 앨리사를 찾아간다. 앨리사는 과도한 흡연으로 폐암에 걸렸고, 말초신경증 때문에 한쪽 발을 절단한 모습으로 롤런드를 반긴다.
“롤런드, 난 당신을 지켜줬어!”
“무엇으로부터?”
“진실이지…… 맙소사!” 그녀는 소프트팩 담뱃갑 위쪽의 작은 구멍에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려고 더듬었다. 담배에 새로 불을 붙여 깊이 빨아들인 후 차분해졌다. 그 문제에 대해 이미 생각해 본 모양이었다. 그 진실이 무엇인지 술술 이야기했다.
“난 당신에 관한 진실을 회고록에 쓸 수도 있었어. 당신은 나를, 내 눈과 귀와 입을 당신의 욕구로 채웠지. 당신이 천부적인 권리로 여겼던 비현실적인 정신과 육체의 황홀한 합일. 그리고 자신이 대단히 멋진 존재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삶이 중요한 걸 앗아갔다고 여기는 그 고상한 실패감과 자기 연민. 콘서트 피아니스트, 시인, 윔블던 챔피언. 당신이 이를 수 없었던 세 영웅이 그 작은 집의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숨이 안 막혔겠어? 당신은 아빠 노릇, 부모 노릇에 꽂혀 노상 그 이야기만 했지. 주위는 온통 쓰레기에 불결하기 짝이 없고. 당신이 원치 않는 잡동사니가 사방에 쌓여 있는데도. 난 움직일 수가 없었어. 생각도 할 수 없었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난 제일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지. 당신은 아주 좋은 글감이었어, 롤런드. 당신을 이용해서 남자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어! 당신이 내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라는 걸 절대 잊지 않았으니까.”
롤런드는 그 말에 움찔했다. 그녀가 비난을 늘어놓는 동안 그는 테이블 유리 상판에 엎질러진 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의 참을성 있는 목소리는 가짜였다. "당신의 성적 욕구도 절박했어. 그리고 당신은 출판자에게 거절당하면 울부짖으며…… “
"롤런드, 그만. 그만. 그만!” 그녀가 휠체어 팔걸이를 쾅쾅광쾅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피우다 만 담배가 그녀의 손에서 몇십 센티미터 정도 날아가 러그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그가 일어나 담배를 가져다주고 다시 앉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우린 이러려고 만난 게 아냐. 내가 당신 대신 말할게. 나도 그 집에 살 때 게으름뱅이였어. 당신한테 육아를 도와달라고 해 놓고 당신이 나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간다고 비난했지. 나도 섹스를 엄청 원했으면서도 그저 당신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처럼 가장했어. 내 소설이 퇴짜를 맞으면 미쳐 날뛰면서 가끔 당신에게 화풀이했어. 당신이 편집도 도와주고 타이핑도 해줬는데. 아들이 찾아왔을 때 난 그 아이를 외면했어. 그래, 내 소설에는 가족을 버리고 도망치는 어리석고, 요구가 많고, 모순적인 여자들이 가득하지. 난 페미니스트 평론가의 날 선 비난을 받곤 했어. 하지만 어리석은 남자도 등장시켰어. 인생은 엉망진창이고, 우리 모두 바보 천치라 다들 실수를 저지르고, 난 그런 말을 해서 수많은 젊은 청교도를 적으로 만들었지. 그들도 우리처럼 어리석긴 매한가지야. 롤런드, 중요한 건 당신과 나에게 이제 그런 건 문제가 안 된다는 거고, 그래서 당신이 와 주길 바란 거야. 우린 아직 살아 있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특히 나는. 그래서 당신과 함께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며 좋은 추억을 되새겨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지. 책은 이제 곧 인쇄에 들어갈 거야. 당신이 원한다면 클래펌, 아기의 나이, 그리고 뭐든 다 바꿔 줄게.”
"당신이 내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라는 말에 롤런드는 앨리사를 용서한다. 하... 못 말리는 사랑꾼.
혼자 지내게 된 롤런드는 가족들과 함께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50대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가 어느새 수십 권이 쌓였는데, 어느 날 이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진 롤런드는 지금까지 쓴 일기를 모두 태워버린다.
그는 1986년 이후 일기를 읽으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전혀 얻지 못했다. 뚜렷한 주제도 없고, 그 당시 알아차리지 못했던 진의 같은 것도 없고, 교훈도 없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방대한 세부 사항과 기억나지 않는 사건, 대화, 사람들뿐이었다. 그런 부분에서는 마치 다른 사람의 과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기에 불만 -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것에 대해, 변변한 직업이 없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한 것에 대해 - 을 늘어놓은 자신이 싫었다. 따분하고, 통찰력도 없고, 수동적이었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 책들에 대한 요약은 흥미 없이 서둘러 쓴 것들이었다. 제인 파머의 일기에 비하면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녀에겐 쓸거리가 있었다. 폐허 속의 유럽 문명, 참수당한 젊고 영웅적인 이상주의자들. 반면 그는 긴 평화의 시대에 자란 아이였다. 그는 그녀의 글에 담긴 고양되고 뒤틀린 감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일기처럼 그녀의 일기도 한밤중에 수정을 거치지 않고 쓴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면을 설정하거나 전개하는 방식이 그보다 훨씬 뛰어났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논리와 긴장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훌륭한 디테일로 전체를 빛나게 만들 줄 아는 그녀의 재능은 생생한 지적 능력의 광채를 지니고 있었다. 앨리사의 글도 그랬다. 그가 경험을 단순하게 늘어놓은 데 반해 어머니와 딸은 그 경험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그것이 그 일을 행동에 옮길 타당한 이유가 되었다. 로런스나 먼 자손이 자신의 일기장을 읽는다는 생각을 하자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낸시 가족이 크리스마스에 선물한 화덕이 있었다. 3월 말의 어느 무료한 오후, 그는 화덕에 불쏘시개와 가느다란 통나무, 바비큐용 숯을 가득 넣었다. 불이 타오르자 긴 코트와 털모자 차림으로 한 손에 찻잔을 들고 화덕 가까이에 앉아 서툰 글솜씨로 쓴 자신의 인생 후반부를 한 권씩 불에 던졌다. 그러자 수전의 집 정원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학교에서 읽을 카뮈와 괴테,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책을 태운 기억이 떠올랐다. 오십칠 년 전이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책 장례식. 진짜로 존 드라이든의『모두 사랑을 위해』가 다른 책들보다 더 빨리, 더 밝게 타올랐나? 그 기억은 희미했다. 그는 그랬기를 바랐다.
화덕에 꺼져 가는 불씨만 남자 추위에 쫓기듯 안으로 들어와 늘 앉는 의자로 갔다. 일기장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보다 기억에 간직한 것이 더 많았다. 그의 삶에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흐름, 줄거리, 전개가 있었지만 불에 타 사라진 일기에서는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논리, 동기 혹은 무력한 굴복에 의해, 한 세대 만에 짜릿한 낙관주의가 함께했던 베를린장벽 붕괴에서 미국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으로 매시간 옮겨 온 것일까? 그는 1989년이 미래로 향하는 넓은 문, 모두가 그 문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시대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정점에 불과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뉴멕시코에 이르기까지 벽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 많은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자꾸만 심장에 문제가 있는 듯 가슴 통증이 심해서 몇 번 쓰러지기도 한 롤런드를 걱정한 가족들은 그를 병원에 보낸다.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계속 노인 특유의 고집을 피우며 거절하지만, 혹시나 심각한 병일 까봐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전에 피터와 싸우면서 부러진 갈비뼈가 웃자라 가슴을 자꾸 찔러서 생긴 통증이라 간단히 치료할 수 있었다.
손녀 스테파니와 다정한 대화를 나누며 한 남자의 긴 서사가 마무리된다.
2차 세계대전, 그 후의 냉전시대, 쿠바 미사일 위기, 대처의 집권, 베를린 장벽 붕괴 등 굵직한 현대사의 사건들과 함께 살아온 베이비붐 세대의 사랑과 가족 이야기였다. 롤런드의 대를 이은 부자관계에서 나의 아버지, 나의 아들과의 관계의 차이를 비춰봤고, 10대 소년의 경험이 평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모습에서 이제 같은 시기를 걷게 될 아들의 걱정도 들었다. 평생 여러 여자를 사랑했고,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말년에는 가족만이 곁에 남아 그를 돌봐준다는 따뜻한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이 브런치는 나중에 아이가 크면 보여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롤런드가 자신의 일기를 태우는 모습을 보니 과연 나는 이 잡스러운 생각들을 아이에게 정말 공유할 수 있을지 덜컥 겁이 난다.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와서 읽을 수 있지만 막상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는 지금 내 마음이 아마 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