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련
박서련 작가님이 쓰신 지금까지의 모든 소설의 화자/주인공이 여성이었다는 사실은 지난번 <나, 나, 마들렌>을 읽으며 우연히 알게 됐다.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로 단 한 번도 거부감이나 편향됨을 느낀 적이 없다. 그만큼 균형을 잘 잡아주는 작가. 이 단편집의 모든 소설들도 한없이 현실적인 다양한 가족 군상 내의 여성들을 억지스럽지 않게 그려낸다. 여성들이 받는 상처는 아물지도 않고 날것 그대로 벌어져 있고, 독자는 그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된다.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오냐오냐 키우던 5학년 외동아들이 게임(롤) 실력이 떨어진다고 라이벌 격의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게임도 사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엄마는 일단 면접을 본다고 게임 고수를 집으로 부른다. 첫 번째 부른 놈은 느물거리며 성추행을 하려고 해서 당장 쫓아냈고, 두 번째 부른 여자 선생님(대학생)이 맘에 들었는데, 엄마가 게임을 할 줄 알아야 한다며 먼저 배운 게임을 하다가 본인의 재능을 발견한다. 연습 끝에 실력이 일취월장한 엄마는 아들에게 실력을 검증받고, 아들 대신 마우스를 잡고 아들 친구를 발라버린다. 하지만 아들 친구는 게임에서 욕설을 날리는 초딩이었고, 게임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조롱을 시작한다. 엄마는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폭발한다. 초딩들이 워낙 '부모 안부'를 묻는 욕설을 많이 하니까 '엄마'가 금지어로 지정됐는데, '너도 억울하면 너네 엄마한테 게임해달라고 해'라는 타이핑에서 엄마가 계속 'XX'라고 표시되지만, 상대 초딩은 'NGUM'(느그 엄마를 빨리 발음해 보라)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어긋난 모성은 그 방향을 잃었고, '엄마'는 그저 욕설의 수단으로 전락한 씁쓸함.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성 혐오에 물드는 남자 아이들. 이래서 내가 온라인 게임은 안 시킨다!
<미키마우스 클럽>
고학력 미혼모인 엄마가 우울증을 겪으며 낳은 딸은, 경계성 지능장애를 가졌으나 뛰어난 미모로 아이돌이 되고, 엄마는 매니저가 된다. 엄마는 어릴 적 자신의 꿈이었던 미키마우스 클럽의 주인공들처럼(브리트니 스피어스, 저스틴 팀버레이크,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등) 딸을 키우려고 하지만, 미혼모의 우울한 삶 때문에 디즈니랜드에서 딸과 세상을 뜨려고도 했었다. 그것의 복수일까. 그토록 조심했건만 딸은 그만 임신을 해버렸고,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엄마는 이제 딸이 더 이상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인형이 아님을 깨닫는다. 아이돌판의 폭력성도 잘 드러나는 이야기.
<보>
권위적인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는 목사와의 결혼을 대학 졸업 후 바로 해버린 주인공. 이름만 목사 부인일 뿐 실상 고생만 하며 산다. 그러다 남편이 신자와 바람이 났는데 본인만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되고, 신앙이고 가정이고 나발이고 다 놔버리고 싶은 주인공은 그냥 떠나버리려 한다. 남편은 목사인 주제에 아내를 붙잡는답시고 강제로 아내를 범해버리고, 그럼에도 아내는 이를 비웃으며 남편을 떠난다. 속이 다 시원하다!
<곤륜을 지나>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며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가 얄밉게도 며느리가 당첨된 해외여행 상품권의 존재를 알고 중국 곤륜으로 목적지를 정해버린다.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원하지 않는 높은 산을 오른다. 알고 보니 시어머니 본인도 자신의 시어머니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며느리에게 이런 사연을 털어놓으려 하지만 며느리는 듣고 싶은 생각이 없다. 고령의 노인을 데리고 고산에 오르다가 며느리는 길을 잃고, 때마침 시어머니는 실례를 해버린다. 흐르는 오줌줄기와 함께 버티고 버티던 며느리의 멘탈도 흘러가 버린다. 거액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독하게 괴롭히는 시어머니를 버텨내는 며느리가 대단하다. 보통 이런 복장 터지는 고부관계에는 방관자적 태도를 취하는 남편 놈이 가장 문제다.
<기미>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를 모시고 사는 딸. 혼자 엄마를 돌보며 자기의 욕구 따위 다 무시하고 친구의 도움으로 친구 학원 버스를 운전하며 쳇바퀴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그러다 보다 못한 친구의 추천으로 등산 모임에 가서 동네 남자를 만나 시원하게 욕구를 해소하지만, 엄마를 돌보는 괴로움을 토로하는 그녀에게 말실수를 하며 선을 넘어버리는 남자를 그녀는 바로 정리한다. 괜히 남자를 만나 학부모들에게 항의가 들어와 일을 잃게 되고, 그녀는 절망에 빠진다.
<그 소설>
여성 작가가 자신의 낙태 경험을 소설로 습작했는데, 누군가 이 작품을 표절해서 상까지 타버린다. 사람들은 이 소설이 여성 작가의 소설임을 알고 경험담이냐고 작가를 몰아세운다. 남성 주인공이 화려한 여성편력 끝에 여성을 임신시키고 떠나버리면 그건 낭만이고, 여성 주인공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해서 선택을 하면 그건 손가락질받을 일인가? 소설은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일 수도 있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작가의 얼굴을 그리면서 작가 개인과 작품을 연관시키는 버릇은 소설 자체를 즐기는 데에 방해가 될 때가 많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이야기일 뿐.
<A queen Sized Hole>
4대보험도 안 되는 작가의 빈곤한 삶. 문학상을 탄 작가라도 생활고에 시달려 친구에게 단돈 몇십만 원을 빌리며 손가락을 꼽으며 돈을 쓴다. 그런 주인공의 삶에 어릴 적 친하게 지냈던 여동생이 갑자기 들어와서 빌붙어 산다. 주인공-친구-여동생 셋이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며 무위도식하는, 소위 루저들의 삶을 건조하게 그려냈다. 이 이야기야 말로 작가님 본인이 겪었을 법한 이야기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