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윤이
최근 2년간 소설책을 고르다 보면 자꾸만 함윤이 작가님의 <우리의 적들이 산에 오를 때>가 여기저기 보였다. 꽤나 무던한 문체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아서 흥미가 생긴 젊은 작가다. 작년에 발표한 단편집 <자개장의 용도>에 수록된 여러 작품들을 보면 작품에 물이 올랐다는 느낌이 든다. 아직 등단한 지 4년밖에 안 된 작가가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니 놀라운 재능이다.
알라딘을 뒤적거리며 '어디 재미있는 책 없나...' 찾아보다가 함윤이 작가님의 장편소설 <정전> 출간 소식을 봤다. 무려 올해 문학동네 소설상 대상 수상작이다. 재미와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작가라니. 어, 그런데 출간 기념 북토크가 책과 세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금요일 저녁 7시 반 광화문 알라딘 빌딩. 사회는 무려 예소연 작가님이다. 핫한 작가가 말아주는 핫한 작가의 북토크라니 이건 가야 해! 바로 세트를 구매하고 다음 날 도착한 책을 설레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 '막'의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그녀를 좋아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은단'은 막에게 자신의 비밀을 보여준다. 교실의 불이 갑자기 다 꺼져버린 것이다. 이게 뭐냐 하니 마음을 먹으면 주변의 원하는 곳의 전기를 끊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막은 점수에 맞는 대학에 진학해서 평범한 신입생의 학창 시절을 보내며 응급구조학과로 전공을 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빠가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가세가 기울어 휴학을 한다. 등록금을 직접 벌겠다는 생각에 제약회사 공장에 6개월 계약직으로 취직한 막은 그곳의 동년배 직원인 수지와 영준, 그리고 스리랑카에서 온 미남 외국인노동자 라히루와 친해진다.
막은 라히루와 가장 친해졌고 그에게 연정을 품는다. 그러나 그는 사실 사내커플임을 막에게 말하지 않았다. 우연히 라히루에게 그 사실을 듣고 무척 실망한 막은 라히루에게 마음에도 없는 상처 주는 말을 마구 쏟아낸다.
며칠 뒤 라히루는 잔업 중 기계에 끼임 사고가 발생해 손가락 두 개를 잃게 된다. 회사는 라히루와 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산재처리 등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치료비 정도만 지급한다. 그 사건 이후 라히루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막은 그 소식에 절망한다.
이 사건 및 다른 노동 이슈들 때문에 노조가 결성된다. 막도 라히루 때문에 가입한다. 그러나 회사는 계약직이었던 막과의 재계약을 진행하지 않았고, 수지를 포함한 막과 친한 노조원들을 부당해고한다. 본사 건물 앞에서 노조원들은 회사를 규탄하며 투쟁한다. 막은 그들과 함께 있긴 하지만 그들을 부끄러워하며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다. 막내라는 이유로 노조원들은 그저 막을 예뻐해 주기만 한다.
노동청은 부당해고가 맞다는 결정을 내리지만 회사는 뻔뻔하게 항소한다. 막은 회사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졸업식 이후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은단의 힘이 생각난다. 막은 내성적인 너드인 은단을 무시하면서도 그의 정전을 일으키는 힘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막을 연모하는 은단은 기꺼이 수락하고 그들은 공장의 대규모 정전을 계획한다. 친하게 지냈지만 노조에 합류하지 않은 영준을 만나 열쇠를 하나 훔쳐서 마스터키까지 확보한다. 방진복을 입고 전기실까지 간 막과 은단이 정전을 실행하기 전, 라히루의 여자친구였던 은하가 갑자기 나타나 그들을 만류한다.
은하와 티격태격하던 막은, 은단에게 정전을 빨리 실행하라고 다그치고, 은단이 이를 실행하는 순간 은하의 심장이 멈춘다.(심장의 전기신호가 정전됨) 막은 은단에게 구급차를 부르고 먼저 탈출하라고 시켜놓고 심폐소생술로 은하를 겨우 살린다. 은하를 부축해 공장 밖으로 나가자 정전으로 공장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직원들 중 막의 예전 반장이었던 사람이 막을 발견하고, 막은 반장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은하와 반장 모두 막을 눈감아 줬고, 막은 무사히 탈출해 공장 밖에서 기다리던 은단을 만난다.
둘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회사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노조는 여전히 힘들게 투쟁하고 있다. 막은 은단에게 내키지 않는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그를 버린다. 그리고 라히루에게 인스타를 통해 연락한다. 끝.
소설을 읽는 데에 인물과 서사 빼면 아무 재미가 남지 않는다. 이 책은 초반에 정전 능력이 있는 인물을 내세우고는, 주인공의 서사를 빠르게 풀어내며 독자를 이야기에 동화시킨다. 씩씩한 스무 살 청년이 제법 열심히 경제활동을 해나가다가 점점 노조원/비정규직/외국인노동자 차별을 다루는 노동소설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과정이 꽤나 재미있다. 어른들은 자기 일자리든, 가족이든, 돈이든, 동료든 뭔가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걸고 싸움을 이어나간다. 여기까지는 서사로 끌고 온다.
그러나 막은 너무 어리다. 그리고 이 아이는 돌아갈 곳이 있다. 일하면서 번 돈으로 학교에 복학하면 된다. 어른들이 어린아이에게 너도 뭔가 걸고 싸우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어른들은 매일 자신들의 싸움 현장에 와주는 막을 고마워하고 잘 대해주는데, 막은 그게 싫다. 싸움은 멋지게 하고 싶어서 나도 노조 하겠다고 외쳤지만, 막상 진짜 싸움을 보게 되니 힙하지 않고 구질구질해서 별로다. 40대 중년 남성 독자 입장에서는 정말... 짜증이 솟구치는 인물이다.
인물에 좀 짜증이 나서 서사로 위로받으려는 시도를 해본다. 소설 제목도 그렇고 첫 장면도 그렇고 대체 정전은 뭘 언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이제 슬슬 그 정전 능력이 나올 때가 됐는데?' 하는 타이밍을 지나고 또 지나 소설의 중반부를 훨씬 더 지나야 '회사 미워! 정전시킬 거야!'라는 막의 생각을 통해 등장한다. 그런데 막을 좋아하는 은단의 캐릭터도 정말 음침해서 아무 매력이 없다. 그리고 이 마음을 끝까지 이용만 해 먹는 막을 보니 짜증이 배로 밀려온다.
이 철없는 스무 살 청년들은 철저히 의존적이다. 공장에서 탈출하면서 어른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바로 체포되어 재물손괴로 형사처벌을 받고, 본인들이 끼치고 싶었을 피해액보다 더 큰 금액을 고스란히 손해배상 청구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막은 "내가 책임지고 싶어서"라고 말하는데, 아가야... 니가 돈이 있니 빽이 있니 뭘 책임질 수 있겠니...
소설의 경계를 현실이 얼마나 건너와야 할까. 조금 더 노조 쪽으로 기울었다면 노동소설로, 정전 능력의 다양한 활용(좋아하는 여자 생각만 하면 전기를 끊어버릴 수 있는 거 말고)을 보여줬으면 판타지 히어로물로, 둘이 고난을 헤치며 로맨스가 싹텄다면 청춘물로 흘러갈 수도 있는 확장성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결말은... 스무 살 청년의 결정되지 않은 미래와 같은 것일까? 평론가들은 그런 불확실성과 애매함을 높이 샀을까? 역시나 내가 못 보는 다른 면이 있으니 문학상 대상 타고 그러겠지...
꼰대 같지만 이런 천둥벌거숭이 미성숙한 캐릭터를 멋지다고 칭송할 사람들이 꼴 보기 싫어졌다.
그래서 북토크도 결국엔 불참했다.
그런데 난 그 북토크에 갔어야만 했다.
북토크에 가지 않고 다른 일을 했는데: 격한 운동,
그것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횡문근융해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