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기
책 내용 중 기록에 필요한 부분만 스크랩했다.
죽음은 의료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의 문제에 가깝다. 죽음은 개인적인 일인 동시에 내가 사는 일상, 사회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이야기로 국한할 수 없다.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는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론 보도에 등장하는 명의, 신약, 의료 기술, 자기 계발 담론에 귀 기울이는 만큼 왜 사람들이 일하다가 죽고, 가난해서 죽고, 학대로 죽고, 고립으로 죽고, 차별로 죽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사건 사고'가 어떻게 나의 노화, 질병, 돌봄, 죽음과 연결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전환해 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오늘날 생에 말기 돌봄은 대개 여성이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하는 일이 되었다.
환자 곁에서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회적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가뜩이나 옹색하고 시혜적으로 보이는 공적 돌봄을 받기 위해서 환자는 자신의 몸과 집의 비참함을 증명해야 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환자는 집에 고립되거나, 군말 없이 요양원 또는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환자의 일상은 열악한 돌봄 노동조건에 따라 출렁인다. 이런 맥락을 제쳐두고 생애 말기 돌봄과 죽음을 다시 집으로 끌고 오자는 주장은 허망하다.
저출산• 고령화 위기 속에서 등장한 노인 부양 정책은 민간 시설의 설립과 운영 규제는 완화하되 비용 통제는 강화했다. 그 결과 노인 환자와 병상 수는 빠르게 늘었지만, 의료진과 돌봄 노동자 수는 그만큼 늘지 않았다. 요양보호사 한 명이 입소자 20명을 돌보는 요양원이 나오고, 간호사 한 명이 환자 40명을 관리하는 요양병원도 등장했다. 이런 환경에서 의료진과 돌봄 노동자가 노인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존중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열악한 노동조건은 근무자뿐만 아니라 노인의 인권 문제로도 이어진다. 예컨대 입소 노인을 한눈에 보기 위해서 CCTV 가 과다하게 설치되고, 낙상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신체억제대 사용 범위가 넓어지며, 식사 수발이 필요 없도록 '콧줄'이 삽입되고, 화장실 이용을 억제하기 위해서 기저귀가 남용된다. 이러한 현실이 인구에 회자될수록 시설 관계자는 ‘효'와 '사랑'을 강조한다. 하지만 도덕적 수사는 대개 열악한 노동조건을 은폐하는 데 기여한다. 결국 문제가 또 터지지 않도록 입소자의 '안전' 만 강화된다. 그렇게 노인의 서사적 삶은 탈각되고, 삶의 존엄성은 의료적, 생물학적 문제로 치환된다. 입소 노인의 '수분•영양 공급'은 본질이 되고, '입맛'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그렇게 노인은 먹는 입만 가진 존재, 즉 인구로 전락한다. 한편 가족 보호자는 간병(비), 의료비, 시설비까지 부담하고 있는 실정이다. 형태만 달라졌을 뿐 국가가 여전히 노인 부양을 가족에게 떠맡기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노인, 보호자, 돌봄 노동자, 의료진 모두가 고통을 겪고 있다.
오늘날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노인 시설로만 볼 수는 없다. '국가의 발전과 미래'를 출산율(생산인구)로 환원하는 인구 위기론에서 돌봄이 필요한 노인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의존적 노인‘, 그를 둘러싼 규범, 가치, 감각, 기준, 법 등이 요양원과 요양병원이라는 실체로 현현했다. 다시 말해 국가는 '정상 가족'을 기대하기 힘든 시대를 위기로 상정했고, 발전에 쓸모 있는 인구와 쓸모없는 인구를 분류했다. 의존적 노인은 이러한 정치적 상상과 인식 속에서 선별되고 의료적, 생물학적 차원으로 규정된 '인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의존적인데, 마치 노인만 의존적인 존재인 것처럼 딱지를 붙인 셈이다.
한편 '집안일'에 머물던 노인 부양은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기보다는 시장으로 옮아갔다. 이제 개인이 좋은 돌봄을 받고자 한다면, 즉 숙련된 간병인, 쾌적한 시설, 섬세한 의료 서비스, 자유가 보장되는 일상을 원한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취약계층'은 연명의료를 받으며 영세한 시설에 방치될 수 있다. 이 경우 시설의 주 수입원은 국가의 지원금(의료 및 요양보험 수가)이다. 거대한 '돌봄 위탁 피라미드'가 작동하고 있는 형국이다.
가정형 호스피스 간호사가 담당하는 암 환자들 은 큰 수술을 집도한 대학병원 의료진이 자신들을 돌봐주기를 기대했지만 한 달도 채 안 돼 쫓겨난 경험이 있었다. 의료진은 수술 후 환자에게 평소에는 요양병원에 있다가 필요시 대학병원 외래나 응급실을 통해서 입원하라고 권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의료전달체계상 3차 의료기관인 대학병원은 환자의 중장기적 안정보다는 새로 들어오는 위중증 환자 치료에 우선순위를 둔다. 하지만 환자들이 동네 의원에서 어렵지게 진료 의뢰서를 받아 대학병원으로 몰리는 현실에서 의료전달체계는 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대학병원은 각종 검사 및 수술을 받는 환자를 위해 병상 회전율을 높게 유지하는 방법으로 교통정리를 한다. 건강보험 수가가 낮고 비급여 진료도 거의 없는 입원 환자가 주요 정리 대상이다. 이러한 의료전달 체계와 건강보험 수가의 난맥상으로 수술 이후 환자 돌봄은 사실상 가족 및 보호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일로 남는다.
한편 암 환자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돌봄을 받기도 어렵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안에 있는 요양원은 치매를 비롯한 노인성 질환을 앓는 환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양병원도 노인 환자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현재 요양원 입소에 필요한 장기요양 1•2등급(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을 받지 못해서 요양병원으로 향하는 노인들이 적지 않다. 혼자 힘으로 거동은 가능하지만 일상적 돌봄이 필요한 노인들은 크게 아프지 않아도 요양병원에 입원한다. 그러다 보니 중증 환자는 의사가 없는 요양원('수발'을 전제한 복지시설)에 가고, 경증 환자는 의료진이 있는 요양병원('시술'을 전제한 의료시설)에 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더욱이 노인성 질환을 주로 보는 요양병원에 완화의료팀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호스피스에선 간호사 한 명이 환자 다섯 명 정도를 돌보는 반면, 요양병원에서는 간호사 한 명이 환자 40명을 감당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두 기관의 환경 차이가 크다. 요양병원이 완화의료 전문기관으로 거듭나야 하는지, 그럼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에 대해선 향후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실정이다(현재 일부 요양병원이 호스피스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개인이 수많은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투병과 간병도 문제지만, 반대로 환자의 몸 상태가 좋아져 퇴원을 해도 '온전한 ‘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질병이 낙인이 되어 사회 활동에 차별적 요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회사는 암 투병을 했던 사람을 편견 없이 채용할 수 있는가? 몸이 아플 때 걱정 없이 긴 병가를 낼 수 있는가? 그 후 '무사히' 직장에 복귀할 수 있는가? 입원으로 발생한 생계 문제와 보호자의 간병이 가족을 빈곤의 늪에 빠뜨리는 건 아닌가? 이러한 질문들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갖고 있는가? 분명한 건 질병을 개인의 잘못으로만, 신체 기능의 이상으로만, 의학적 근거로만 바라봐서는 그 질문들에 대답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보호자의 돌봄이 공론화되지 못하는 현실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의료 현장에서 남성 환자의 침묵에 대해서는 모두 관심을 가진 반면에, 여성의 돌봄은 논의 주제도 되지 못했다. 남편, 아들, 부모까지 돌보면서 주변화되는 보호자의 일상은 침묵에 잠겼다. 보호자는 평소에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남편을 간병하면서는 전문가에 버금가는 의료 지식까지 갖추게 됐다. 그는 의료진과 환자의 눈치를 봐가며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환자 치료에 전념하는 의료진에게 중요한 파트너였다. 의료진이 말기 의료결정 국면에서 그런 보호자를 두고 가족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환자와 의료진 모두 보호자(여성)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질병이 빈곤으로 연결되고 빈곤이 질병으로 이어지기 쉬운 사회에서 보호자의 돌봄은 환자가 죽음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개인의 돌봄이 사회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는 아찔한 현실에서 환자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강조는 자칫 '환자에게서 손을 떼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오히려 환자의 자기 결정권은 타인의 돌봄을 딛고 섰을 때 비로소 행사되는 것이다. 환자의 자기 결정권과 돌봄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환자의 목소리가 공적으로 울려 퍼지려면 '환자의 자율성'만 강조할 게 아니라 그의 일상을 떠받치는 '돌봄'을 정의롭고 평등한 방식으로 재배치해야 한다.
말기 의료결정은 선언적 가치, 의료 윤리, 소통 기술 등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병원의 운영 체계, 한국의 의료 다양성, 의료진의 태도, 보호자의 돌봄, 가족의 삶의 조건, 환자의 몸 상태 및 인식 등이 뒤얽혀 협상을 벌이는 '정치적 행위'에 가까웠다. 요컨대 말기 의료결정은 환자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환자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일이었다. 환자, 보호자, 의료진은 저마다의 이유로 '죽음의 타이밍‘을 고민했다. 죽음은 타이밍의 문제였다.
사람들은 미래에 죽을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죽지 못해 살까 봐 두려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