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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옹 Nov 10. 2024

오렌지와 빵칼

청예

누구나 마음속에 지닌 ‘통제로부터의 해방’을 그린 책. 그 과정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실험을 가장한 다단계성 뇌 파괴 심리 폭탄 돌리기에 의해 이뤄졌기에 결말 또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어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내 직장 상사가 웃으며 수다 떨다가 “이거 시간 될 때 알아볼래요?”라고 금요일 오후에 말해놓고 월요일 아침에 “그거 알아봤어요?”라고 물어서 아니라고 대답하니 “내가 알아보라고 다시 물어봐야 움직이려고 했나요? 왜 그렇게 일을 수동적으로 하나요? 내 말이 우습게 들리나요?”라고 갑자기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상황을 가정할 때. (과연 가정일까? ㅎㅎ)


평소의 나: (당황스럽지만 일단 상황을 모면하자) “죄송합니다. 바로 확인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난 나: “금요일 오후에 지나가듯 제대로 업무지시한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왜 월요일 아침부터 쌩 지랄이세요? 주말에 뭘 쳐드시고 뭔 짓을 하면 사람이 이렇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이 월요일 아침 같은 사람아. 행실 똑바로 하세요. 밤길 가다가 갑자기 대가리 깨지면 난 줄 알아 이 xxx아.”


이 책을 읽고 나니 머리 감다가 ‘그때 저렇게 말할 걸… 아니 다음에 또 저러면 저렇게 퍼붓고 밟아버릴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든다. 위험하고 불쾌한 반사회적 소설이자 배설이다. 내가 독재자라면 금지도서로 지정했을 책이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사회의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과 그것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구축하며 살아가는 것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깨닫게 된다.


작가의 글에 작가의 의도가 아주 명확히 드러나 있어 가져와본다. 공감되지 않는 말로 공감을 던지려 하다니 여기 제대로 낚인 독자 1인 추가요.




(p.178) 작가의 말 첫 번째. 작품에 관해서.


내가 생각하기에 『오렌지와 빵칼』은 직설적인 글이고, 그래서 폭력적이다. 나는 오랜 시간을 ‘은주’라는 인물로 살았다. ‘영아’는 그런 내가 만든 스스로의 안타고니스트다. 어떤 분은 이 글을 ‘배설’이라고도 했다. 통제와 자유라는 상반된 가치를 세련되게 표현하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건드려 봤자 욕밖에 더 먹지 않는 코드는 최대한 배제하고서. 얼마든지 안전하게 쓸 방법이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쓰고 싶은 글은 결국 ‘오렌지와 빵칼’이지 다른 무언가가 아니었다.


작품에 자코메티가 나오는 이유는 즉자와 대자의 의미를 은유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나도 완벽히 통달한 개념은 아닌데, 풀어 말하자면 이렇다. 즉자란 ‘직접’이다. 사물의 직접적인 쓰임새이자 본질. 건드리지 않아도 규정되는 값. 예컨대 당신이 마당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그 사과나무는 무엇인가? 그냥 사과가 열리는 나무다. 이것이 즉자다.


그렇다면 대자란? 당신이 사과나무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좋은 소설책도 읽어줬더니(『오렌지와 빵칼』이 아닌 다른 책, 크크크) 사과나무가 당신을 향해 가지를 더 길게 뻗었다. 그 가지에선 더 맛있고 붉은 사과까지 열렸다. 이것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다. 당신과 소통했고, 그로 인해 사과나무가 자신의 변화 가능성을 눈치채고, 이를 발현했다. 이 사과나무는 더 이상 ‘그냥 사과가 열리는 나무’라는 본질에 머물지 않는다. 사과나무의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 이것이 대자다.


그래서 사물은 대부분 즉자에 머물고, 생명체는 대자다. 하지만 나는 『오렌지와 빵칼』에서 즉자적 존재의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타인과 소통하고 반성하며 변화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에 머무는 이야기. 오로지 본질적인 의미만을 고려한 즉자적인 우리. 그래서 폭력적이고, 어리석은 상황까지 상상하는 이야기.


왜 그래야만 하는가? 대자는 언제나 ‘결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사과나무를 다시 가져오자면, 상대를 향해 팔을 뻗어야만 하고, 닿아야만 하고, 더 빨간 열매도 맺어야 하는데 매일 성공하지는 않을 터다. 사과나무는 그때마다 결함을 자각한다. 그래서 대자는 ‘결여태’이기도 하다.


우리는 결여된 존재로 남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결여를 채우는 게 가끔은 버겁다. 있는 그대로 수용되길 원한다. 비록 내 도덕성이 상대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도, 내가 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지 못해도, 심지어 그 정의에 균열을 만드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냥 살아 있고 싶다. 있는 그대로.


나는 그런 우리에게 공감을 던지고 싶었다. 공감과는 가장 거리가 먼 말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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