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김훈 선생님의 산문집. 70대 중반에도 왕성하게 글을 써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내 미미한 독서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난 언제나 소설부터 집어 들어 빠르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한참 즐기다가, 빠져나와선 또 다른 소설을 읽으며 그 세상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짓을 반복해 왔다. 그런 얕은 독서를 반복하면서 소설의 본질은 ‘이야기’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첫 100페이지 안에서 주인공(들)이 빠른 전개에 올라타 다양한 사건을 겪어야 책이 잘 읽힌다. 감정이나 장면 묘사에 공들인 작품은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즉, 소설은 묘사보다 서사다.
이 관점에서 김훈 선생님은 잘 읽히는 글을 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회색빛 겨울의 냄새가 난다. 뭉쳐지지 않는 가루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와 눈이 쌓일 틈도 없이 쓸어간다. 뒤돌아보면 눈은 온데간데 없고 찬 공기와 바람만 남아있다. 극도로 절제된 어휘와 문장으로 이런 느낌을 내주시니 책을 읽는 내내 쨍하니 정신이 맑다.
산문집이라고 다를쏘냐. 다만 당신의 오랜, 혹은 새로운 생각들을 건조한 문체로 엿보는 즐거움이 더해진다. 늙음과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노장의 문장들이 마지막 장에서 끝남이 아쉽다. 100살까지 일산 호수공원을 지켜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