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주홍글씨

너새니얼 호손

by 김알옹

중학생 때였나 고등학생 때였나, 책 대여점이 동네마다 있던 때였다. <퇴마록>이나 <드래곤라자>를 거쳐 <영웅문>을 읽고 수많은 한국 양산형 무협지들을 섭렵하다가 시드니 셸던과 딘 쿤츠, 톰 클랜시, 로빈 쿡 등의 미국 소설들을 돌아 김진명의 소설들, <데프콘>등의 한국 소설 등등... 나는 남들 다 보는 만화책도 보면서 책도 많이 읽는 학생이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고전 바람이 불어서 집에 있는 세계문학전집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무려 세로로 쓰인 오래된 책들을 시도 때도 없이 읽었다. 학교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문제집 사이에 세로쓰기로 된 두꺼운 하드커버 책을 읽는 학생이랄까... (책 대신 문제집을 풀었다면 수능 점수가 좀 더 올라서 지금 인생이 바뀌었을까?라는 N적인 생각을 가끔 해보기도 한다.) 그때 읽었던 <죄와 벌>은 여전히 내 인생의 책이다.


아마도 그 책들 사이에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도 있었을 것이다. 칼뱅주의적인 엄격한 청교도의 잣대로 아름다운 여인의 혼외자 출산을 옷 위로 가슴에 큰 글자를 낙인찍어 단죄한다는 소설 속 장치보다 시원하게 도끼로 노파의 두개골을 쪼개고 두려움에 떤다는 내용이 가슴을 더 뛰게 하는 10대 소년의 마음속에 <주홍글씨>는 그리 큰 기억을 남기지 않았다.


근 30년이 흘러 도서관 서가를 뒷짐 지고 서성이다가 신작코너에서 발견한 <주홍글씨>. 문예출판사에서 발간했고 조승국님이 번역했다.




스크린샷 2025-01-22 192537.png The Scarlet Letter | The Walters Art Museum


책 초반은 몹시 지루했다. '저 목사놈이 친부잖아!'라고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데 멀리멀리 돌아 돌아 느리게 서술하는 듯한 느낌이 책장을 잘 안 넘어가게 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아내에게 물었다.


"학교 다닐 때 전공수업에서 주홍글씨 읽었지?"

"읽었지."

"원래 이렇게 지루하고 재미없어?"

"음... 조금? 피츠제럴드처럼 신나진 않았어."


그래도 이제 40대 중반인데 시대의 고전을 읽다가 재미없다고 덮지는 말아야겠다는 어른스러운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계속 읽어나갔다.


소설 속에서 7년이 지나 헤스터 프린의 딸 펄이 종알종알 말하기 시작하면서 재미가 붙었다. 얽히고설킨 헤스터 프린 - 아서 딤스데일 목사 - 로저 칠링워스 - 펄의 관계 위에 각 인물들이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의 행복한 미래에 대한 기대를 심어줬다가 절정에서 모두 부숴버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덤으로 남은 이들의 잔잔한 결말까지...


"지루한 거 취소. 완전 재미있다..."

"그래? ㅋㅋㅋ"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도 간통으로 혼외자를 낳은 여성에게 고운 시선이 가지 않는다. 심지어 유교 못지않게 엄격한 청교도 사회에서는 오죽했으랴. (당시엔 마녀재판까지 벌어졌다고 하며, 작품 안에서도 마녀로 몰려 처형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죄는 어떻게 처벌받고, 죄를 저지른 자는 어떻게 속죄하며, 죄인이지만 죄가 밝혀지지 않은 자는 스스로 어떻게 황폐화되며, 그에게 피해를 입어 복수를 행하는 자는 어떻게 죄인을 말려 죽이는지 아주 잘 그려낸 시대 소설이다. 출간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고 하는데, 지금 읽어도 막장드라마 못지않은 도파민이 쫙 도는데 그때 사람들에겐 얼마나 자극적인 내용이었겠는가. 200년 전에 이런 선구적 내용의 소설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너새니얼 호손 님.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