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린치
아일랜드가 전체주의의 지배에 놓인다. 국가는 내전 상황에 접어들게 되어 그 기능을 잃고, 그 격랑에 휘말려 파괴되는 한 가족의 비극을 그려놓은 아일랜드 작가 폴 린치의 소설.
2023년 부커상 수상작이다.
I was trying to see into the modern chaos. The unrest in Western democracies. The problem of Syria – the implosion of an entire nation, the scale of its refugee crisis and the West’s indifference.
- Paul Lynch
책의 서두는 다음 구절로 시작된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다시 이 구절을 읽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것이란 없다.
- 전도서 1장 9절
어둠의 시대에도
노래가 있을까?
그래, 노래가 있으리
어둠의 시대에 대한 노래가
- 베르톨트 브레히트
국민연합이라는 정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가비상법을 발효시킨다. 비밀경찰국이 사람들을 강제구금하고(물론 국가비상법에 따라 마구잡이 구속이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검열한다.
주인공 가족은 교원노조에서 한자리 맡고 있는 남편, 분자생물학박사이자 회사원인 아내, 16세 큰아들, 14세 사춘기 딸, 12세 아직 아이 티를 못 벗은 둘째 아들, 2세 늦둥이 막내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로 살고 있는 치매 초기 단계의 친정아버지가 있다. 소설 속 화자이자 의식의 흐름은 모두 아내로부터 나온다.
아주 큼지막한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편이 잡혀간다. > 큰아들을 몰래 국외로 빼내려고 했지만 머리가 다 큰 녀석은 반란군에 가담한다며 가출해서는 연락이 끊긴다. > 아내는 직장을 잃는다. > 둘째 아들은 내전이 심화된 어느 날 집 앞에서 폭격의 파편을 맞고 병원에 실려갔다가… (가슴 아픈 스포라 언급하지 않겠다) > 물과 전기가 끊기고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진다. > 반란군과 정부군 간의 내전이 격화되고 나라를 탈출하려고 시도한다.
코맥 매카시의 <로드>에 버금가는,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잘 그려낸 작품이다. 물론 <로드>처럼 완전히 세상이 망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삶을 살 수 없게 되었으니.
읽기가 편하진 않다. 대화와 상황 서술과 감정 묘사가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한 문장 안에 뒤섞여있다. 그러나 이런 혼란스러운 서술에 조금만 익숙해지면 오히려 한 단락 안에서 한 호흡으로 상황 전개와 인물 간의 대화와 주인공의 감정 묘사가 폭풍처럼 휘몰아침을 느낄 수 있다. 점점 악화되고 절망적인 상황을 그려내는 데엔 오히려 이런 불안정한 문체가 도움을 준다.
많은 것을 잃어버린 엄마가 딸에게 읊조린다.
우리는 이미 터널에 들어왔고 돌아 나갈 수는 없어. 반대편 빛이 보일 때까지 그냥 계속, 계속 앞으로 가야 해.
자, 당신이 네 아이의 어머니이며 그중 하나는 젖먹이이다. 남편과 큰아들이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고 시시각각 생존 환경이 악화되는 상황인데, 해외에 살고 있는 동생이 어둠의 경로를 통해 망명을 주선해 준다. 당신의 선택은?
A. 남편과 큰아들이 언제 집에 돌아올지 모른다. 집에서 버틴다.
B. 남은 세 아이라도 지켜야 한다. 메모를 남겨놓고 일단 탈출한다.
애가 있는 집이면 무조건 B 아닌가? 애가 하나도 아니고 셋인데? 그런데 왜 소설에선 A를 선택해서 읽는 사람 복장을 터지게 하나!
2024년 12월 3일에 비상계엄을 막지 못했다면 우리에게 펼쳐졌을 법한 미래의 모습이자, 1960-80년대 군사정권에서 벌어졌던 실제 과거의 모습이다. 가끔은 소설보다 현실이 더 잔인한 경우가 있듯이 우리 역사에서는 이보다 더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가 많지 않은가. 내가 직접 겪진 않았지만 수많은 영화, 소설, 다큐멘터리, 회고록, 에세이, 역사서 등에서 간접적으로 겪은 일들이다.
계엄의 밤에 잠 못 이루고 우리 가족에게 무서운 일이 벌어질까 봐 두려워하며 가슴을 졸였다. 그게 선명하게 그려지진 않았지만 저 군인들이 조금만 더 선을 넘으면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은 그 정체불명의 불안감. 그 상황들이 실제 펼쳐졌다면 바로 이 소설과 같은 전개로 이뤄졌겠구나. 눈보라가 휘날리는 설날 연휴의 어느 평온한 카페 안의 안온함이 마음을 조금은 덥혀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