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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옌롄커

by 김알옹

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명상을 하든, 고민을 하든, 아무 생각도 안 하든. 나는 집-회사 아니면 딱히 취미도 여흥도 즐기지 않고, 집에서도 책을 읽는 시간이 대부분이므로 혼자만의 시간이 그렇게 간절하지 않은 편이다. 책을 읽을 때는 책만 읽으니까 혼자 있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그럼에도 혼자 집에 있게 되는 시간이 생길 때는 묘한 설렘이 있다.


어릴 때 맹모삼천지교를 발휘해서 나를 데리고 상경하신 부모님은 내 공부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작은 브라운관 TV는 종종 장롱 안으로 가둬지기 일쑤였고, 몰래 입수한 휴대용 게임기나 만화책 등은 모조리 압수, 동네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귀가가 늦어지면 체포 후 구타를 일부 동반한 강제 구인. (그런다고 성적이 엄청나게 뛰어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밥 벌어먹고 살게 된 건 그때부터 쳐맞으며 공부를 강제로라도 했던 덕을 보는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집에 혼자 있게 되면 몰래 TV를 보거나 숨겨놓은 게임기를 찾아서 하거나 만화책을 보는 등 나름 유년기의 일탈을 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 대망의 스타크래프트가 나오면서 집에 혼자 있을 때는 집의 저사양 PC로 신나게 게임을 해댔다.


그렇게 10년 넘게 혼자 있을 땐 공부 아닌 다른 유흥을 즐기면서 놀았던 기억이 몸에 새겨져서 그런가,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도 집에 혼자 있으면 괜히 평소에 잘 하지 않는 게임을 하거나 종일 TV를 본다.


그림1.png 도파민이 쫙 돌았을 것이여...





작년 어느 여름인가, 아내와 애가 둘이 여행을 떠났다. 난 업무가 많아 함께할 수 없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며칠 동안 내내 야근을 해서 매일 밤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 잠드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XY의 유전자에 새겨진 리모컨으로 채널 바꾸기 신공을 발휘하며 영화 채널들을 넘기는데,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영화를 어느 채널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배경이 북한 느낌이어서 호기심이 동해 계속 보기 시작했다. 화면 우측 상단 영화 제목 옆에 '격정 멜로' 혹은 '파격 노출'이란 문구에 절대 혹한 건 아니었다.


와 그런데 이건 정말...


여배우의 발연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노출도 있고 섹스신도 계속 이어지는 영화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는데, 이 연기는 뭐랄까 천년의 정욕도 잠재울 수 있을 만한 수준의 대단한 대사처리, 시선, 몸놀림, 표정들이었다.


그래서 1부가 끝나고 2부로 넘어가는 긴 광고를 견디지 못하고 '이 소중한 혼자만의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다니...' 생각하며 잠들었다.


506857_710215_4428.jpg 어디 <색,계>나 <화양연화>를 가져다 붙여...




몇 개월 후, 도서관 서가를 거닐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발견했다. 위화나 모옌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과 동명의 영화에서 본 충격적인 발연기가 머릿속에서 어우러지며 냉큼 빌려와서 읽었다.


중국인민해방군 소속으로 치적을 쌓아온 중년의 사단장은 나이가 한참 어린 아내를 두었는데, 베이징에서 열리는 중요 회의 때문에 두 달간 집을 비우게 된다. 그 틈을 탄 그의 아내는 연하의 사택 취사병을 적극적으로 꼬셔 격렬한 정사를 끝도 없이 나눈다. 이게 다였다면 '책에서도 내내 섹스하는구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들은 누구 사랑이 더 크고 강렬한지 증명하기 위해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찢고, 그의 얼굴이 새겨진 배지의 눈과 코에 못질을 하는 등, 사령관의 집에 있는 마오쩌둥 관련 물품을 남김없이 파괴한다. 爲人民服務,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마오쩌둥의 말은 그들에게 서로를 위해 쾌락을 주고받으라는 메시지로 남는다.


조금 더 검색을 해보니, 중국에선 금서로 지정됐다고 한다. 주석 따위, 인민 따위, 사령관 따위 생각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육체만 탐하는 남녀를 그린 에로티시즘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은근한 체제 비판이 기저에 깔려있다. (마오쩌둥 관련 물품들을 부숴버리는 장면에서는 노골적으로)


영화는 (다 보진 못했지만) 소설에서의 체제 비판 내용은 제대로 담지 못했기에 노출과 발연기로만 기억되겠지만, 소설은 조금 더 흥미로웠기에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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