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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거짓말

노한동

by 김알옹

공무원이 저지르고 있거나 당하고 있거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헛짓거리들을 서울대-행정고시 출신의 (30대) 퇴직 공무원이 글로 가열차게 까내리는 책. 역시 서울대 나온 사람들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뭔가 다르다. 전문 작가도 아닐지언데 책은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것처럼 잘 읽힌다.




일하다 보면 공무원들과 어떤 식으로든 엮이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두 번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공무원이 110만 명이고 공공기관 근무자까지 포함하면 150만 명이라고 하니 그럴 수밖에. 나의 경우는 다양한 종류의 조사였는데, 국세청, 관세청, 공정위 정도? 회사 일로 경찰서 지능범죄수사대에 가서 참고인 조사를 받아본 적도 있다. 지금까지 다닌 회사들은 국토부, 환경부, 보건복지부, 식약처 등등 다양한 정부 부처들의 직간접적인 규제를 받기도 했다. 그들과 일하면서(혹은 털리면서) 느낀 점들이 이 책에 다양한 케이스로 잘 묘사되어 있다. 다양한 경험이 없는 듯한 편협한 시각, 항상 면피가 최우선인 듯한 자세, 무리한 요구를 당연하게 요청하는 뻔뻔함, 일을 쉽게 푸는 길이 눈앞에 있어도 굳이 멀리 돌아가는 답답함, 유연성 부족 등등 많은 단점들을 나열할 수 있다. 물론 일 잘하고 시람도 좋은 공무원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협업하는 관계가 아니어서 그런지 나에게 좋은 기억은 별로 없다.


외국계 회사에 있다 보니 모든 계약서는 영문으로 작성되는데, 회사 표준 양식이 있어서 보통 30장 정도 되는 다양한 조항들이 기본적으로 들어간다. 거래의 핵심은 한두 장 안에 다 넣어놓기 때문에 평소 내가 계약서를 읽을 때는 핵심 부분만 파악하는 편이다. 어느 날 어떤 부처에서 회사에 어떤 거래의 계약서를 요청하길래 보내줬다. 그 부처와 진행하는 업무에서 아주 사소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계약서였다.


20대 후반-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주무관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즈음 전화를 걸어오더니 계약서를 국문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법률용어가 난무하는 계약서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해석하는 것은 자칫 큰 오해를 살 수도 있어서 보통은 '회사 표준양식이라 어느 어느 부분 한두 장만 자세히 읽어보시면 된다'라고 대응하기에, 그 주무관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안 됩니다. 전체를 국문으로 번역해서 내일 오전까지 보내주세요."

"주무관님. 이 계약서를 번역하려면 먼저 미국 본사 담당자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고, 번역 전문 업체를 물색해서 업무를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2주에서 한 달까지 걸릴 수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아뇨. 내일 오전에 보고를 해야 해서 그렇게는 안 됩니다. 번역해서 보내주세요."

"제가요?"

"내일 오전에는 있어야 합니다."

"아니 주무관님, 사정은 알겠는데요. 저는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본사 승인 안 받고 계약서를 회사 외부에 반출하면 저도 곤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지금 필요하신 건 거래 내용 파악이라 제가 말씀드린 부분만 파악하면 되니까 x페이지 부분만 보시면 돼요."

"그럴 수 없습니다. 국문 계약서를 주세요."

"저희가 미국 회사라서 국문 계약서가 없어요 주무관님... 어쩌죠?"

"모르겠고 내일 오전에는 있어야 합니다."

"(로봇인가? ㅆ) 후... 주무관님 혹시 영어 해석이 문제 되는 상황이라면, 요즘 구글 번역에 PDF도 넣어서 결과를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파악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급하게 필요하신 것 같은데, 제가 계약서를 뭐 어떻게 당장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그게 아니라! 담당 관청에서 요청하면 회사가 당연히 제공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계약서가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주무관님, 제가 지금 안 드린다는 게 아니고 시간이 걸린다고 말씀드렸고요. 회사 공식 계약은 영문으로만 존재하기에 제가 공식 계약서도 아닌 문서를 별도로 주무관님께 드릴 의무는 없습니다. 따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알려드렸는데 이렇게 갑자기 화를 내시니 좀 당황스럽네요."

"(씩씩거리는 숨소리만 내뿜는다)......"

"그쪽 과장님이랑 다시 한번 말씀 나눠보시고 다시 전화 주시겠어요?"

"(숨소리가 더 커진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해당 업무를 함께 대행해 주는 에이전시에 전후 상황을 설명하고 따로 확인을 부탁했더니, 영어를 진짜 못해서 영문 계약서를 아예 손도 못 대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구글은 번역 기능을 갈고닦았고, 많은 사람들이 챗GPT를 사용한다. 대체 이렇게 경직된 업무 태도로 어찌 민간과 협업을 진행하겠는가.


결국 에이전시의 중재로 내가 직접 계약서를 구글 번역에 넣고 돌려서 '이 계약서는 공식 계약서가 아니며, 회사의 공식 영문 계약서를 구글 번역기로 변환했을 뿐이다.'라는 내용을 추가해 메일을 보냈다.


공무원이 주제이다 보니 갑자기 흥분해서 별것도 아닌 일화를 주절거렸지만, 기술의 발전은 민관을 가리지 않고 적용되니 누구든 많이 활용해서 업무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 (사무실에서는 전화를 끊고 혼자 회의실에서 조용히 쌍욕을 읊조리긴 했는데, 여긴 브런치니까 아름답게 마무리하련다.)




나 혼자 읽기 아까운 책이고, 특히 공무원과 협업하거나 공무원 본인들이 한 번쯤은 읽어보면 한숨을 내쉬기 좋은 내용들이다. (공무원 집단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진 않는다. 고위공무원들은 좀 비난받긴 하지만...)


총 4부 2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부-공직이라는 이상한 세계, 2부-영리해서 무능한 관료, 3부-실패의 이유, 4부-새로운 항로를 찾아 라는 내용이다. 1부의 각 장마다 간단히 내용을 정리해 봤다.




1부 공직사회라는 이상한 세계


프롤로그 -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

행정고시로 입직 후 10년. 서기관 승진 후 저자는 <필경사 바틀비>의 바틀비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에 퇴직한다. 자신이 맡은 공적인 일에는 냉소적이고 무관심하지만, 사적인 이익과 생존을 위한 정열은 뜨겁게 타오르는 이 모순이, 바로 공직사회가 입만 열면 이야기하는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라는 거짓말에 가려진 진실이다.


1장 - 차원이 다른 삶

고등교육과 거리가 먼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저자는 '차원이 다른 삶'을 자식에게 주고 싶다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성실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입학 후 행정고시까지 합격하지만 공직사회의 무력감을 이기지 못하고 10년 후 퇴직한다.


2장 - 나는 운이 좋았다

26세에 군대도 미루고 행정고시 합격 후 저자는 문체부에 지원한다. 1년 근무 후 병역 해결을 위해 장교로 입대한 이후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태가 터진다. 군대에 있던 저자는 단지 운이 좋아 그 사태를 피하게 됐다. 이제 공무원들은 면피를 위해 더 노력하게 됐다. 공무원 개개인의 영혼은 면피와 행운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다.


3장 - 무난한 사람

행정고시 2차 합격 후 3차 면접에서 10%를 떨어뜨리는데, 3차에서 떨어지면 다시 1차부터 봐야 하기에 고시생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저자가 바로 그 케이스인데, 따박따박 따지는 그의 성격이 첫 면접에서 그를 떨어뜨린 거라는 전문가 진단의 도움으로 그다음 해 시험에서는 고분고분하게 무조건 긍정, 토론에서는 반박 금지의 전략으로 합격하게 된다. 그것은 저자가 맞이할 공직사회의 예고편이었다.


4장 - 보고서에 정답은 없다

공무원 일은 보고서로 시작해서 보고서로 끝난다. 정부 보고서는 항상 깔끔한 개조식이며 서술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보통 본문은 한 페이지에 다 담는다. 이런 보고서 작성을 통해 담당 사무관은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간다. 물론 그 위의 과장-국장-실장-차관-장관은 담당 사무관보다 디테일을 모른다. 공직사회는 보고서 예쁘게 쓰기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것과 같다.


5장 - 점심의 정치학

공정한 인사평가를 위해 도입한 다면평가로 인해 공무원들은 동료/선배/후배 공무원들에게 좋은 밥을 사주면서 자기 어필을 해놓는다. 누가 자신을 좋게 혹은 나쁘게 평가할지 모르기 때문에.


6장 - 말과의 설움

조직도 처음에 등장하는 일과와 끝에 등장하는 말과에 근무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일과는 윗사람의 심기 보좌와 자료 취합에 능한 사람이 근무하며 평가를 더 잘 받고 승진을 독점한다.


7장 - 온콜

장관의 면을 세워주기 위해 하는 헛짓거리: 회의, 언론대응, 보고서 작성 등으로 근무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고고, 공무원 조직의 갑인 기재부는 주말 저녁에도 전화로 갑질을 해대며, 국정조사 때 국회의원 보좌관들은 괴롭힘이 목적인 듯 사무관에게 말도 안 되는 자료들을 요청한다. 모두가 보여주기를 위한 헛짓거리다. 이 체계 안에서 관료들은 자신의 영리함을 발휘해 무능한 관료로 진화한다.




1부의 내용만 봐도 약간 속이 답답해져 오는 느낌이라면, 2부와 3부에서는 헛웃음이 나면서 속이 꽉 막히게 된다. 물론 저자가 근무했던 문화체육관광부에서만 저런 문화가 있을 수 있다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과한 악의를 갖지 않고 단지 현실을 그리고자 하는 내부자의 고발에 누군가는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게 세금을 내서 나라를 운영하게 하는 국민이든, 세금을 받아 온갖 사업에 쓰고 자신들의 월급으로도 수령하는 공무원이든. (4부에 가서 그럴듯한 해결책이 나오기엔 이미 총체적 난국이라 저자도 반쯤은 포기한 듯하다.)





호기심에 챗GPT에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1장부터 26장까지 각 장마다 내용 요약해 줄래?'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다음과 같은 답을 내뱉는다.



노한동의 저서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은 총 2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저자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10년간 근무하며 경험한 공직사회의 현실과 문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각 장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장: 공직사회의 허상

공무원 조직이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명분 아래 실제로는 조직 유지와 개인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2장: 가짜 노동의 일상화

실질적인 성과 없이 바쁜 척하는 ‘가짜 노동’이 어떻게 공직사회에 만연해 있는지를 다룹니다.


3장: 책임 회피의 메커니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복잡한 절차와 규정을 활용하는 공무원들의 행태를 분석합니다.


4장: 무의미한 규칙의 지배

실효성 없는 규칙들이 어떻게 공무원들의 창의성과 효율성을 저해하는지를 설명합니다.


5장: 성과평가의 역설

형식적인 성과평가 시스템이 실제 업무의 질 향상보다는 보고서 작성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6장: 조직문화의 폐쇄성

외부의 비판이나 변화를 거부하는 공직사회의 폐쇄적인 조직문화를 다룹니다.


7장: 내부 고발자의 딜레마

부조리를 고발하려는 공무원들이 겪는 어려움과 그로 인한 침묵의 문화를 설명합니다.


응? 전혀 내용이 다른데?


18cf3f781e64ecfd8.jpg 속았지롱


이것이 챗GPT의 환각이구나... 너 나랑 손잡고 도서관 좀 가야겠다.


갑자기 그때 보냈던 계약서 번역본은 멀쩡히 번역됐을지 의문이 스쳐갔지만, 그때 검토하고 보냈을 땐 거래 내용이 제대로 반영됐고 법률용어도 그럴듯하게 나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역시 적당히 쓰면 약이고 과하게 쓰면 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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