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대온실 수리 보고서>가 출간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책을 내신 김금희 작가님. 이번엔 남극(!)에 다녀와서 산문을 쓰셨다. 일반 관광이 아닌, 취재 목적으로 무려 세종기지에 약 한 달 동안 방문한 것이다. 작가님은 뭐든지 글로 남기는 사람 같다. 식물을 많이 키워서 <식물적 낙관>이라는 산문집도 냈으니. 소설가는 매일 근력운동 하듯이 쓴다고 하던데, 소설을 쓰지 않는 시간엔 뭐든 기록해 놓고 이렇게 뚝딱 산문집을 내는구나. 나같이 월급 받고 하는 일도 허덕거리는 사람에게 소설가는 신기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소설가들의 산문집은 소설작품에서 보지 못한 작가들의 내밀한 마음이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을 때도 있고, 환상이 깨질 때도 있다. 김금희 작가님은 전자다. 소설에서는 감정을 테트리스 블록 쌓듯이 차곡차곡, 어떨 때는 젠가 쌓듯이 위태롭게, 하지만 아무렇게나 쌓지 않고 약간 계산된 느낌으로 정교하게 그려낸다. 표현이 몹시 아름다워서 문장을 읽으며 책 한 권에 수십 번은 감탄하지만 가끔은 '보통 사람이 실제 이런 깊이와 섬세함으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그런 날들을 일 년 가까이 반복한 끝에 은하는 어떤 체념과 자기극복이 깃든 묘한 평화에 이르렀다. 이후에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발병 이전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며 그런 삶에는 오로지 고독, 크기를 잴 수 없이 크고 깊은 고독만이 필요하리라는 결론이었다. 그것은 어느 흐린 날 거리를 걷다가 낙엽이 떨어져내리는 가로수 밑을 지나거나, 어느 늦은 시간 택시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리다 한강에 어른대는 불빛들을 애잔하게 바라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독이었다. 설명하자면 아주 무섭도록 자기 삶 속으로 포섭된 고독이었다. 참여자 없는 연극이자 듣는 이 없는 아리아, 만남이 불발된 채 혼자서 나누는 열렬한 악수 같은 것.
- 연작소설 <크리스마스 타일> 중 <은하의 밤>에서
나만 빼고 세상 사람들 다 이렇게까지 생각을 하며 사나요? 이게 N들이 한다는 생각인 것인가?
하지만 작가님 본인의 이야기에선 소설 속 등장인물보다는 좀 더 현실감이 느껴진다. 소설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비장함이 좀 옅어진? 가령 아래와 같은 대화에서 작가님의 모습은 마치 수트를 입고 각을 세워 업무를 보다가, 집에 와서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소파에 누워있는 남자의 모습과 같다.
"작가님이 오신다 해서 소설집을 찾아 읽었습니다."
"와, 감사드려요. 어떤 책을 보셨어요?"
"<너무 한낮의 연애> 단편들을 읽었는데..."
"아… 읽어보니 저 제정신 아닌 것 같죠?"
나는 민망해져 불쑥 그렇게 말했다. 농담이기는 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그 시절 단편들은 내 안의 트라우마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쓴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 본문 중
'인과관계를 따져서 사건을 구성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우연히 찾아온 선물 같은 이미지들을 받아 든 채 소설적 사건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본문에서 스스로를 정의한 작가님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남극의 다양한 (과학자의 연구를 돕는) 활동들을 매일 수행하며 글도 쓰고 (아마도) 다음 소설도 구상한다. 남극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시려고 남극에 직접 가서 이미지를 담아 온 작가님이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지 기대 가득이다.
다음은 재미있었던 단락들.
1. 팔에 고양이가 기대어 자고 있으면, 잠을 깨우느니 팔을 잘라내는 MBTI는 대체 무엇인가.
출남극을 이틀 앞둔 날, 벡터가 마지막으로 “펭마에 가자.“라고 했다. 원래는 해표 마을로 가서 안 연구원 팀의 장비 설치를 도울 예정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밖에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못 간다는 말을 대체 누가 안에게 전할 것인가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벡터님, 제 MBTI는요. 만약 제 팔에 고양이가 기대어 자고 있으면, 잠을 깨우느니 차라리 제 팔을 잘라내는 성격이라고들 그래요. 나는 죽어도 말 못 해.”
“나도 그래. 보기보다 여리다고.”
그렇게 서로 소심함을 주장하는 중에 안 연구원이 식당으로 들어왔고,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어느새 “미안하지만, 펭마에 가야 해서 해표 마을은 어렵겠다.“라고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안은 괜찮다며 쿨하게 넘어갔다.
“뭐야, 못 한다더니 잘하네.”
역시 MBTI는 참고일 뿐이구나 싶으며, 나는 먹던 치킨가스를 마저 해치웠다.
다음 날, 여름의 종료를 알리듯 매섭게 바람이 불었다.
2. 힘들면 바닥에 누워버리자.
백두봉 아래에 도착하자, 월동 천사가 아주 따뜻한 목소리로
“작가님, 여기까지 왔는데 올라가시죠.”
하고, 내 귀를 의심할 제안을 했다. 더 이상 월동 천사라 부를 수 없을 듯한 기분이었다.
‘당신은 혹시 월동 등반 조교가 아닌가?’
나는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이지만, 그 순간 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저는 이제 도저히 한 발짝도 올라갈 수가 없어요. 여러분, 올라갔다 오세요. 저는 밑에서 기다리면 되잖아요.”
순간,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못 간다고 자갈밭에 대자로 뻗은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울프염 대원은 말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돌아서 있었고, 벡터는 내가 힘든 건 충분히 이해한다고 속삭였다.
“저번에 홍 선생과 은 길보다 더 힘들어. 나도 죽겠어. 그래도 여기까지 왔잖아."
시위하듯 누워 있는 동안, 남극의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서면 나중에 후회할까?’
이미 나는 경이로운 남극에 완전히 매료되었는데, 굳이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 올라가서 ‘끝장’을 봐야 할까. 하지만 앞으로 이곳에 다시 오지 못한다. 세상 어느 여행지이든 돈만 있으면 두 번, 세 번 갈 수 있지만, 남극은 한 번 빠져나가면 영원히 잃어버리는 공간이 된다. 재회는 기억으로만 가능하겠지.
월동 천사는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쉬니까 힘이 나긴 나네요.”
이내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건 등반보다는 클라이밍에 가깝지 않았을까. 나는 왜 월동 대원들 중에서도 여기를 안 올라보고 귀국하는 이들이 있는지를 혹독히 깨달았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돌아오고 나서 기억이 잘 안 났다. 발밑으로 무너지는 자갈들, 날카로워 디딜 수 없는 암석들. 믿을 건 같이 올라가는 사람들뿐이다.
어쨌든 한 발 한 발 오르자, 정상이 보였다. 안도하는 순간, 거기에 도착하려면 1미터 정도 높이의 급경사를 올라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때, 먼저 올라간 월동 천사가 두 팔을 내밀고 거의 완력으로 나를 끌어 올렸다. 우리는 몇 명 서 있기에도 좁은 산마루에 올라 소리 지르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3. 문학... 제 전부입니다.
잠시 체육관 앞 홀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벽에 붙은 기지 시간표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점심시간이 우리와 다르네.”
“작가님, 어떻게 알았습니까? 한자를 읽은 겁니까?” K 선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K 선생이 이어 말했다.
“작가님, 작가님한테 문학은 뭡니까?”
너무 진지한 표정이라 나는 당황했고, 아주 진지하게
“문학… 제 전부입니다.”
하는 고백을 했다.
K 선생은 역시 그렇구나 싶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언제 한번 기지에서 북토크를 열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일은 머무는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극에서 그냥 ‘나’로 머물러 있는 것이 좋았다. 동료 작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근처에 작가가 없어서 좋았고 예민하게 일상을 대하지 않고 무던해지는 마음이 좋았다. 세밀하게 세공하던 일상을 아주 굵은 붓으로 쓱쓱 살아내는 기분이었다. 원고 작업보다는 내 발과 내 손과 내 눈으로 행하는 경험들이 우선이었다.
한국에서는 백지 앞의 시간을 위해 나머지 일상들이 미뤄지거나 희생됐지만, 남극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출판사 대표이기도 한 박정민 배우에게 마감을 못 지켜 미안하다며, 남극의 기운을 받아 작업하고 오겠다고 했지만, 뻔뻔하게 한 자도 쓰지 않고 있었다.
조리지원대원의 이름이 ‘박종민’이라서, 나는 누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제 발이 저려 깜짝깜짝 놀랐다.
일상에서는 이렇게 뜬금없이 재미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저렇게 소설을 잘 쓸까. 내면에 다른 자아가 있는 건가요?
원래 나는 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다. 한 지인이 말하길 "넌 남한테 관심이 없어서 남의 이야기를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에세이 따위 별 관심 없어한다고 해서 몹시 놀랐다. 남한테 관심이 없다는 나를 관찰해서 내 특징을 알아낼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남이 지어낸 소설은 나를 대입시키거나 혹은 내 상상 속에서 홀로 그려볼 수 있지만, 누군가 이미 경험한 사실을 자기의 감상을 담아 쓴 글은 딱히 눈이 가지 않는다.
작가님을 워낙 좋아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중간중간 '남극? 내가 남극에 갈 일이 평생에 있을까?' 라며 에세이 거부병이 도지려고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글 사이사이 보이는 작가님의 재미있는 모습과, 에세이 안에서도 종종 소설 같은 표현들이 등장해 나를 잡아끌어 책의 끝부분까지 오게 해줬다. 남극과 작별하는 작가님의 마지막 문장들.
절벽 쪽에 한 무리의 젠투펭귄들이 모여 있었다.
동물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원칙대로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데, 한 발 한 발 내게 다가왔다. 곧 3월이 되건만, 아직 솜털을 달고 있는 아기 펭귄들이었다. 너희 늦둥이구나. 싶으면서 콧날이 시큰해졌다.
인간처럼 펭귄도 개중에는 좀 늦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고마울까. 가장 강한 것만 살아남는 게 아니라, 저마다 다른 힘과 속도를 지닌 존재들이 공존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질서라는 사실이.
아기 펭귄들은 내가 들고 있는 등산 스틱을 톡톡 쪼았다. 뾰족한 부분을 내 부리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걔들은 나름 다정한 인사를 한 거라고.
나는 잘 있으라고, 겨울을 잘 견디라고. 말하며 아쉽게 돌아섰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남극에 오고 싶어 했던 정확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