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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by 김알옹

25권의 단행본, 24편의 논문, 10편의 인물연구, 기타 수십 편의 자료가 참고자료 리스트로 기재된 장편소설. 믿고 읽는 작가님인데 이런 대작을 써주시다니 그저 무릎을 꿇고 계신 방향으로 절을 올릴 뿐이다.


쓰는 일이 직업인 사람들에게 역사는 무궁무진한 소재이자 끝없는 유혹일 것 같다. 제대로 쓰면 역사 속의 사건이나 인물을 내 손으로 펼쳐낸다는 자부심도 들 테고. 하지만 독자들은 이야기가 상상력과 실제와 재미의 균형에서 자칫 한 발이라도 떨어지면 바로 외면하기 마련이다.


(나에겐 거의 천재 작가로 인식된 정세랑 작가님의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가 적확한 예다. 그토록 재미있게 이야기를 가지고 놀던 작가님이 신라시대로 가니 통 힘을 못 쓰더라. 게다가 그게 1권이라니… 그냥 1권에서 멈추면 좋겠지만 이미 그럴 수 없는 상황이겠지… 재미가 없어요…)


이 책은 아래의 세 가지 이야기가 균형 있게 잘 어우러지고 결국 서로 연결된다. 항상 섬세한 표현을 하는 작가님답게 무릎을 탁 칠 만한 표현들도 계속 나오고 “제가 원래 신데렐라인데 요즘 일 때문에 통모짜렐라가 됐어요”라는 대사도 등장한다. (작가님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주인공의 현재: 창경궁 대온실 수리 보고서 작성 중 뭔가 발굴하게 된다.

주인공의 과거: 섬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창경궁 옆 하숙집에서 살며 통학한다. 하숙집과 학교에서 만나는 악인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긴다.

할머니의(혹은 대온실의) 과거: 개항 후부터 해방까지 대온실에 얽힌 인물과 사건들의 이야기.


각 꼭지들의 이야기를 층층이 쌓으며 작가님이 공부했어야 하는 소재만도 대체 몇 개인 건가… 소설인데 역사서만큼 참고자료 리스트가 길다. 그만큼 애쓰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공부를 많이 하셔서 전문적인 내용도 어색함도 어려움도 없이 쉽게 풀어놓으셨고(무려 유홍준 선생님께 배우신 유물 발굴 및 복원), 인물도 잘 만들어내셨고(제갈도희님 매력 넘치고 리사는… 어쩜 악역도 이렇게 잘 만드실까 작가님은), 사건도 적절히 배치하셨고, 이걸로도 충분히 멋진 작품 구성인데 작가님 특유의 감성 어루만지는 표현들로 인물과 사건을 풍성하고 부드럽게 다듬기까지…


읽는 내내 흡족했다. 워낙 방대한 이야기를 한 권에 다 담았기에 이 작품이야말로 분권해서 좀 더 살을 많이 붙였으면 나는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1, 2권 정도로 나누고 3권은 특별히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진짜 쓰시는 거다!) 하지만 충분히 갈아넣어 쓰셨을 테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작가의 말에 작가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아주셨는데, 이 책으로 수리가 좀 되셨길 바란다. (작가님 인터뷰: https://m.segye.com/view/20241122505044)


기억도 안 나는 창경원 시절에 어머니와 갔던 사진만 남아있는데, 언젠가 한 번 창경궁에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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