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단 호크
지금은 경쟁에서 밀려나 경영난에 힘들어하고 있는 왓챠는 처음엔 영화 기록 앱이었다. 지금은 기록하는 기능에 왓챠피디아라는 이름을 붙여 아직 서비스 제공 중이고, 왓챠는 OTT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대학생 시절, 공부하기 싫으면 학교 도서관 영상실에서 영화를 여러 개 빌려 하루종일 보기도, 당시 다들 그랬듯 프루나 같은 곳에서 불법 다운로드한 고전 영화들을 하루종일 보기도 했다. 그 영화들을 보고 기록해놓지 않아 머릿속에서 휘발되는 기억들이 아쉬웠는데, 마침 30대에 접어들어 왓챠가 출시되고 어린 시절 봤던 영화들을 별점을 주는 방식으로 기록해 놨다. 1,000편이 넘는 영화가 순식간에 기록됐다. 인생의 몇 개월은 영화만 보고 살았다는 결과에 몹시 뿌듯했고 그 뒤로 본 영화는 모두 체크해놓고 있다. (드라마/웹툰/책도 기록할 수 있는데 드라마는 200편가량, 웹툰도 200편가량 봤더라. 책은 영화/드라마/웹툰보다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별점을 줄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 트와일라잇 영화 시리즈에 별 반개를 누르는 건 쉽지만 톨스토이의 소설에 별 다섯 개를 누르는 건 '내가 감히...'라는 생각에 어렵더라.)
그 영화 중 별 다섯 개인 영화가 약 100편 정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비포 선라이즈>다. 아마 동년배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 보고 줄리 델피 같은 미녀와의 로맨스를 꿈꾸며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거다. (난 돈이 없었다.) 그리고 못생긴 그놈의 자식은 영 거슬리기만 했지... 에단 호크.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책상 위로 올라가던 그 소년이 몇 년 뒤에 유럽 여행을 떠나 미녀와 밤새 수다를 떨고, <가타카>에서 만난 우마 서먼과 결혼을 하고(딸 마야는 나중에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의 로빈으로 나온다>, <위대한 유산>에서 기네스 펠트로와 키스를 하고, 몇 년 뒤엔 <본 투 비 블루>에서 쳇 베이커로 분하기도 하고, 또 몇 년 뒤엔 넷플릭스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 영화에 출연했지만 나에게 별점 반 개를 받기도 했다. (연출 탓이다. 연기는 문제없었음)
그런데 난 몰랐다. 에단 호크가 책도 썼는지. 어느 날 도서관에 갔더니 그의 소설이 신작 서가에 꽂혀 있었다. 제목이 <완전한 구원>이라고? <A bright ray of darkness>가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해석될까 의아해하며 책을 빌려왔다.
연극 이야기다!!!
주인공 윌리엄 하딩은 할리우드 영화배우이다. 락스타 메리와 결혼해서 5세 딸과 3세 아들을 뒀다. 메리와의 결혼생활에 약간의 위기가 생겨 잠시 별거 중 촬영 차 들린 남아공에서 한 여성과 외도를 하다 사람들에게 들켜 온갖 언론에 조리돌림을 당하게 됐다. 그 와중에 그가 출연하는 브로드웨이 연극,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가 개막을 앞두고 있다. 윌리엄은 헨리 퍼시 - 홋스퍼 역을 맡았다. (찾아보니 2003년에 에단 호크가 동일한 극에 출연해서 동일한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윌리엄은 에단 호크의 페르소나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가족을 잃을 거라는 두려움에 윌리엄의 멘털은 완전히 무너졌다. 코카인을 하고, 다른 여자와 원나잇을 시도하고, 쉬지 않고 술을 마신다. 메리는 그를 냉대하고, 아이들은 그의 이혼이 싫다고 어리광 피우고, 연극 전문 배우들 사이의 유일한 영화배우로서 연기를 못할 까봐 항상 불안에 사로잡혀있다.
그런 그는 연극 무대에 올라가 자신의 역할에 집중하면서 조금씩 상태가 나아진다. 연출, 동료 배우들, 친구는 그의 편에 서서 그를 끝없이 응원해 주고, 그는 치열한 연습 끝에 무대 위에서 홋스퍼 그 자체가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메소드 연기인가) 본 공연들이 이어지며 이런저런 사건사고도 생기고, 끝내 메리와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아 그를 힘들게 하지만, 결국 그는 무대 위에서 책임을 다하고 자유를 찾는다. 덤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도 회복하고. 그에게 무대는 끝없는 어둠을 비추는 밝은 빛이었다. 완전히 구원받기도 했네!
연극을 대하는 연출과 배우의 자세가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무대 뒤에서 배우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주목받지 못하는 배우들은 어떤 아픔을 갖는지, 관객 앞에서 연기하는 건 어떤 느낌인지, 연출은 어떤 식으로 배우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지, 극 중 자신의 상대방 캐릭터에게 사랑에 빠지면 얼마나 난처해지는지 등등 정말 실감 나는 장면들의 연속이다.
작중 윌리엄은 자기 연기에 영향을 받기 싫어서 첫 번째 공연 이후 언론의 비평을 절대 읽지 않는다. 절대 읽지 않고 듣지도 않으려고 애쓰는 장면이 재미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의 비평을 읽고, 오히려 그 비판에 힘을 얻어 더 좋은 연기를 보여주게 된다.
실제 에단 호크도 연극 무대에서 비판을 받았는지 찾아봤더니 2003년 당시의 몇몇 비평들이 있었다. 실제로 아주 강한 비판도 있다. (네가 무대 위에서 살아서 연기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더라)
"Mr. Hawke's hyped-up dude of a Hotspur, Hal's arch rival, may be too contemporary for some tastes. It's hard to credit him as the embodiment of an older order of chivalry. But he's great fun to watch as he fumes and fulminates."
- New York Times
"Hal의 주요 라이벌인 Hotspur 역할인 Ethan Hawke의 과장된 연기는 일부 취향에 비해 너무 현대적일 수 있습니다. 그를 오래된 기사도 질서의 화신으로 여기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의 폭발적인 연기를 보는 것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There is only a single truly ineffective performance. Movie actor Ethan Hawke is simply out of his depth as Hotspur, the aggressive young rebel leader whose exploits are the envy of the land until impetuousness leads him into folly. Hawke barrels his way through the role with the volume turned up. The feeling is true (although a bit overstated), but Hawke cannot channel it through the verse, instead simply slathering it on top, messily. His demise at the battle of Shrewsbury is something of a relief."
- Variety
"정말 비효율적인 연기자는 단 한 명뿐입니다. 영화배우 Ethan Hawke는 성급함이 그를 어리석게 만들 때까지 땅의 부러움을 받는 공격적인 젊은 반군 지도자 홋스퍼 역을 맡았습니다. Hawke는 볼륨을 높인 채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의 감정은 진실되었지만 (약간 과장되었지만) Hawke는 대사를 통해 그것을 전달할 수 없으며 대신 단순히 지저분하게 흩뿌릴 뿐입니다. Shrewsbury 전투에서 그의 죽는 장면은 오히려 안도감을 줍니다."
벌써 20년도 넘었다. 대학 시절 입학하자마자 단과대 연극동아리에 가입했다. 무대엔 두 번 올라갔고, 연출을 한 번 했고, 무대를 한두 번 만들었다. 무대 위의 경험은 내 팔과 다리가 얼마나 쓸모없는지, 내 목소리는 얼마나 호소력 없고 내 눈빛은 얼마나 흐리멍덩한지 뼈저리게 깨우쳤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재능이 없는 배우가 노력까지 하지 않으면 관객은 배우의 역할과 처한 상황에 몰입할 수 없게 되고, 대사를 외우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며, 연출의 의도가 조금이라도 명확하지 않으면 그 연극은 산으로 간다. 무대 위에서 감정을 끌어내려고 연출 시절 배우들에게 가한 신체적/정서적 학대 때문에 아직도 후배들 얼굴 보기가 무섭다.
영화와는 다르게 연극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공연 일정이 끝나면 무대를 해체하고 웃음과 눈물로 가득 찬 뒤풀이로 밤을 지새운 후, 그대로 끝이다. 참가한 사람에겐 후유증이 남는다. 몇 달 동안 함께했던 동료들과 갑자기 떨어지게 되고, 매일 연습하러 갔던 곳에 더 이상 가지 않고, 이제 대본을 볼 일이 없다. 깊게 빠져들수록 그 후유증도 지독하다. 대학생 나부랭이 아마추어들도 이러는데 대학로에서 구르고 구른 프로들은 오죽하겠는가.
무대 위의 눈부신 조명, 분장실에서의 배우들, 무대 뒤의 어둠,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의 생활, 개인적인 아픔을 무대 위 감정으로 치환시키는 과정, 그 유명한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허무감, 내가 짧게나마 젊은 시절 조금이라도 맛봤던 것들이 책 안에 담겨있어서 읽는 내내 깊은 추억 속에 잠겨 있다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