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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Nuance Jan 17. 2023

여백, 새로운 울림으로 진동하다.

이우환 작가


작가는 종종 작품을 마주한 이들을 다그치는 듯 하다. 너희는 보잘것없는 사물에 얼마만큼의 정을 두고 사느냐? 모든 의미, 가치, 용도, 쓸모, 그리고 이러저러한 부가적인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나서도 사물을 향해 말을 걸겠는가? 보라. 돌과 철이다. 여기에 그대가 마주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이들과 과연 어떤 친분을 맺고,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모든 방면으로 여백을 증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라. 그리고 새로운 관계항의 가능성을 발견하라.


감각의 귀환

가는 곳마다 워낙 현란하고 소란스러운 환경이다 보니 모든 익숙한 자극에 무뎌질 대로 부뎌져 버렸다. 이놈의 감각기관이 하는 일이라곤 결국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는 것이 태반인 지경에 이르렀다. 하물며 흔하디 흔한 돌과 철판이라고 다를 것이 있으랴. 하지만 별볼일 없는 돌과 철판일지라도 작품이라는 미명아래 마주한 뒤에야 겨우 다시금 눈여겨 보게 된다. 익숙함에 길들여진 감각들이 실로 오랜만에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Relatum-Silence, Iron plate 280x210x1cm, Natural stone 70x60x60cm, 1979

(image : https://www.studioleeufan.org/main)


돌과 철이 곧 세상이다.

작품은 명료하다. 돌과 철이다. 하나는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위적 생산물이다. 우주가 아무리 광대하다고 하나 그 안에 만물은 '자연' 아니면 '인공'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작심하고 단순히 보자면, 드넓은 세상도 한낱 돌과 철에 불과한 것 아닌가? 돌과 철은 곧 세계의 함축이자 소우주다.


잘 생긴 돌

무릇 자연으로부터 온 물건 중에는 제 모습을 갖지 않은 것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돌이라. 각양각색의 돌 중에서도 모양새가 가히 장관이라 여길만한 것들이 있다. 소위 잘 생겼다고 하는 돌은 형상이 웅장하거나 기묘해서 불연 듯 산이나 동물의 형상을 떠오르게 한다. 아니면 무늬가 섬세하거나 색이 화려해서 마치 그림을 대하듯 보게 된다. 이들의 멋스러움은 모두 스스로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연상시킴으로써 얻어진 결과니 본래 타고난 성질은 감춰지기 마련이다. 돌을 앞에 두고도 자꾸 다른 것을 보려 하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범한 생김새가 기이하다고 하나 그 감상이 지난번보다 더 할 것도 없고 덜 할 것도 없다. 우리네 감응이 늘 이와 같다면, 볼 때마다 희석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러한 만남은 서 너 번만으로도 족하다.


무난하게 생긴 돌

아무런 특색 없이 무난한 돌은 그저 스스로가 돌이라는 것을 내비칠 뿐이다. 달리 치장하려 하지 않는다.때문에 한없이 돌로만 여겨지다가도 문득 새로운 감응을 하게 된다. 타자로 하여금 섣부르게 일관된 관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미 자기만의 판단을 근거로 나를 규정해 버린 자들과 마주하는 일은 참으로 난감하다. 외모로 먼저 판단한 자들은 마치 장신구처럼 소유하려는 자들이요, 능력으로 먼저 판단한 자들은 이용해 먹으려는 자들이다. 기대는 늘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원인이 된다. 단지 상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남의 이유가 충분한 관계라야 본으로 삼을만하지 않겠는가? 관계의 새로움은 언제나 이미 규정된 상념의 여백으로부터 발견된다.



Lee Ufan, Hunting for stones, East Hamptom, NY, Oct 2010 

Photo : David Heald / Coryright:Solomon R. Giggenheim Foundation

(image : https://www.1fmediaproject.net/2011/07/30/guggenheim-museum-presents-lee-ufan-marking-infinity/)


돌의 선택 기준

이우환 작가는 애써 무난한 돌을 찾기 위해 그토록 해메 다닌다. 그는 말한다. 돌을 고를 때 남들이 이해 못하는 자기만의 비밀스런 기준이 있다고. 그 기준에 해당하는 돌이란, 돌 이외에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외모의 녀석들이지 싶다. 나로서는 작품의 돌을 두고 도무지 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냥 '돌다운 돌'이다. 가히 여백이 넘쳐나는 돌이다. 번잡스러움이 없는 돌은 응시를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새로운 올림을 도모할 뿐이다. 시선은 돌을 벗어나 주변을 한가롭게 훑는다. 비로소 주변과 맺는 관계를 본다.



Phenomenon, Steel and glass plates 1x140x171cm each, stone 40cm high, 1968

(image : http://web.guggenheim.org/exhibitions/leeufan/series/mono-ha)

(image : https://en.wikipedia.org/wiki/Lee_Ufan#/media/File:Lee_Ufan_at_Guggenheim.jpg)


철보다 강한 돌

깨진 철판 위로 돌이 놓여 있다. 균열은 돌을 명백한 가해자로 지목한다. 철을 깨트린 돌이라. 돌도 흔하고, 철판도 흔한 터라 현장의 상황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허나 외형으로만 판단하려는 타성에서 벗어나면 분명 경악스러운 사건이다. 철이란 본래 돌보다 강한 물성을 얻기 위해 고안된 물건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장면은 기존의 강, 약의 질서가 무너진 것이다. 작가는 상식적 물리법칙을 전복시켜 놓았다.


인지의 오작동

물론 단순한 조작이고 뻔한 눈속임이다. 돌과 철판 사이에 투명한 유리가 있다. 깨진 것은 당연히 유리일 뿐이다. 이렇듯 사소한 조작만으로도 우리의 인지능력은 오작동을 한다. 맨몸으로 세상과 맞설 때, 인간의 신체능력이란 나약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세계로부터 인과성을 파악하고, 현상으로부터 법칙과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자부하는 예리한 인지능력 조차 약간의 두틀린 풍경만으로도 허점을 드러내기 일쑤다. 



Relatum, Chalk on rubber and 3 stones (50cm high each), 1969

(image : http://web.guggenheim.org/exhibitions/leeufan/series/mono-ha)


불구가 된 표준치수

고무재질의 줄자가 돌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한껏 잡아당겨 늘어난 자는 길이를 측정하는 도구로서 불구가 되었다. 표준 길이가 철회됨으로써 우리는 치수로 재단 가능한 세계를 상실한다. 인간의 잣대로 만사를 재단할 수 있다는 믿음은 한낱 허상에 불과하다. 이 허상으로 인해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는 통제하고 이용하고 소유하는 방식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 직면한 세상은 지배를 토대로 한 관계 설정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듯 일상적 맥락이 어긋남으로써 발생하는 공백은 관계에 새로운 공명을 일으키는 근간이다.



Relatum-Four Sides of Messengers at versailles, 2014

(image : https://www.radiofrance.fr/francemusique/podcasts/balade-dans-l-art/les-sculptures-de-lee-ufan-au-chateau-de-versailles-3594904)


사물로의 접근 

4개의 돌이 철판 위의 모서리에 앉아 서로를 향해 마주한다. 마침 제목이 "사방으로부터의 전령사(Four Sides of Messengers)"다. 자리가 마련된 김에 자기들끼리 쌓아둔 대화를 나누는 중일까? 비록 저들의 음성이 귀에까지 닿지 않지만, 기꺼이 짐작해 보고 은근슬쩍 끼어들어 볼 참이다. 그 옛날 이태백도 저 멀리 지구 밖에 있는 돌덩이(달)를 벗삼아 술 대작을 했는데(*월하독작) 손 닿을 거리에 있는 돌과 어울려 잠시 대화를 나누는 것 쯤이야 그리 심각한 객기는 아닐 게다. 이 또한 가끔 누려 볼만한 풍류가 아니겠는가?  



Relatim-A Rest, Stone and iron pole, 2005

(image : https://www.studioleeufan.org/main)


어울림

자연과 인공, 세상을 이루는 두 개의 축이다. 서로 대립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곧 잘 어울려 지낸다. 하나는 서슴없이 휴식처가 되어 주고, 다른 하나는 살며시 기댄다. 하물며 사람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인간'이 잉태한 존재가 아니던가? 사람이야 말로 자연과 인공 양 쪽에 무리 없이 속하는 유일한 족속이다. 저들 사이에서 우리가 끝끝내 이방인으로 남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Lee Ufan sitting on Relatum-Expansion Place at PaceWildenstein, New York, 2008

Photo : Curtis Hamilton for Art Asia Pacific

(image : http://li367-91.members.linode.com/Magazine/62/IllusionsAndInterrelationshipsLeeUfan)


침묵하는 것들과의 대화

우리는 애초에 타고나길 만물을 벗 삼고, 세상과 친분을 쌓기에 더 없이 유리한 입장이다. 생각에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기껏해야 잠깐의 한가로운 호사로 만족해서야 되겠는가? 모든 침묵하는 것들과의 대화에서 나의 음성은 더욱 선명해 진다. 그 음성의 진동이 나와 내가 속한 세상 사이에서 귀한 울림을 만들어 낸다. 이우환 작가가 비워둔 여백은 사물과의 관계를 한결 더 각별하게 만든다.




*이태백 - 月下獨酌 (월하독작 제1수)



花間一壺酒 (화간일호주)

꽃 사이에 술 한 병 두고,


獨酌無相親 (독작무상친)

친하게 지내는 이도 없이 홀로 마시네.


擧杯邀明月 (거배요명월)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對影成三人 (대영성삼인)

그림자 비춰 대하니 마침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 (월가불해음)

달은 본래 술을 마실 줄도 모르고,


影徒隨我身 (영도수아신)

그림자는 그저 나를 따라 흉내만 낼 뿐이라.


暫伴月將影 (잠반월장영)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삼아,


行樂須及春 (행락수급춘)

모름지기 이 봄날을 마음껏 즐겨보노라.


我歌月徘徊 (아가월배회)

내가 노래를 부르면 달은 이리저리 서성이고,


我舞影零亂 (아무영영란)

내가 춤을 추니 그림자가 어지럽게 일렁이는구나.


醒時同交歡 (성시동교환)

술이 깨어 있을 적에는 함께 즐기다가도,


醉後各分散 (취후각분산)

취한 뒤에는 각기 흩어지네.


永結無情遊 (영결무정유)

속세의 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귐을 길이 맺어,


相期邈雲漢 (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나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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