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l 시작도 끝도 없이 예측불가하게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태계
전시 제목 '리미널'의 사전적 의미는 '한계'이고, 전시적 의미의 리미널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작가는 "불가능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전시에서 새로운 주체성은 어떻게 탄생될 수 있는가",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 의존성을 어떤 방법으로 인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작품으로 풀어냅니다.
전시는 예측 불가능성을 가시화하고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새로운 생태적 환경을 제안하며,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겹쳐지거나 분리되면서 그 의미가 진화합니다. 작품은 실시간 데이터를 활용한 프로그램과 생명공학을 결합하며,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 관계가 생성하는 감각적이고 시적인 세계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작품은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배우고 진화하며 복합적인 환경(milieu)을 형성합니다.
전시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살아 있는 환경입니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명체들이 진화하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수족관의 환경처럼 특별히 구성되어 있지만 어떤 일이 발생할지 예측 불가능한 ‘불확실성의 세계’입니다.
여기서 관람객은 스스로를 낯설게 인식하고, 인식을 확장하며 또 다른 현실을 상상하게 됩니다.
작가는 프랑스 파리 태생으로 뉴욕과 파리를 오가며 작업하며 요즘엔 산티아고에서 새로운 작업 하며, 영화 음악, 춤을 과학 및 철학을 컴퓨터 프로그램, 게임, 개, 꿀벌 조각이라는 매개변수를 사용해 영화, 설치, 영상, 음향, 애니메이션, 건축 등의 매체로 표현합니다.
시뮬레이션은 혼돈을 지날 수 있게 해주는 여러 가능성의 투영이다.
전시장 입구엔 전시를 본 후 반납해야 하는 팸플릿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팸플릿을 집어 들었는데, 안내해 주시는 분이 "내부가 어두워서 팸플릿을 들고 들어가기보단 벽에 있는 QR을 찍어 폰으로 보는 게 나을 거"라는 꿀팁을 알려주셨다. 나는 순순히 팸플릿을 내려놓고, QR을 찍은 후 입장했어요. 과연 전시장은 어두웠고, 처음엔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으며 지킴이 분들은 플래시를 갖고 안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눈이 적응된 후에도 팸플릿에 쓰인 글을 보긴 어려운지 몇몇 관람객은 폰의 플래시를 켜서 읽는 모습을 보았네요.
훨씬 더 많은 작품이 있지만, 인상깊었던 5개의 작품만 글에 담았어요.
리미널 (Liminal), 2024 - 현재
실시간 시뮬레이션, 사운드, 센서
전시 제목과 같은 제목의 영상작품입니다. 영상에 나오는 인간 형태는 뇌도, 얼굴도, 세계도 없는 채로 무한하고 평평한 곳을 움직이죠. 영상 속 모든 설정은 외부에서 오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반영하여 변화합니다. 자극을 찾고 배우며 진화한 인간 형태는 학습이 쌓여 종례엔 인간의 영역을 초월합니다.
텅-빈 형태의 인간 형상을 보고 영화 <Room next door>을 떠올렸어요. 종군기자로 활동할 만큼 열정적이고 주도적으로 삶을 살던 주인공은 암에 걸려 한 달여의 삶을 남겨두었어요. 주인공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친구 잉그랜드는 남편과의 이야기 속에서 "죽음을 앞에 두지 않아도, 비극 속에서 사는 방법은 많거든"이라는 말을 합니다. 배우 수지가 출연한 드라마 <안나>에서도 비슷한 의미의 대사가 있죠. "사람들은 지옥이 장소라고 생각해. 지옥은 상황인데". 텅 비고 공허한 인간과 - 학습하여 삶을 만들어가는 중인 비인간.
"존재"한다는 건 어떠 의미일까요.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될까요. 살아있는 것만이 존재를 증명하는 건 아니니까요.
오프스프링 (Offspring), 2018
라이트박스, 빛, 안개, 향, 사운드 시스템(에릭 시티 '짐노페디 2,3번, 클로드 드뷔시 편곡)
작품의 빛은 작품을 둘러싼 외부 조건을 지속적으로 학습하여 도출됩니다. 외부공간이라 함은 관람객이겠지요. 어떤 시스템이 어디에서 관람객을 인식하는진 모르겠지만 빛과 안개는 비규칙적,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듯했습니다. 특히 안개를 땅에 닿지 않을 만큼 적당히 분출하는 조절 시스템과 현대미술작품에서 흔히 나오는 -조용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으면서 신경을 건드리는- 미묘한 사운드가 좋았어요. 드뷔시와 에릭 시티의 짐노페디 2번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는데 원곡, 편곡 모두 좋으니 아래에 짐노페티 2번 곡을 첨부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 v=LfpJZHC14XE
휴먼 마스크 (Human Mask), 2014
영상, 컬러, 사운드, 19분
후쿠시마 주변 핵 배제 구역의 버려진 식당에서 어린 소녀의 얼굴 가면을 쓴 원숭이가 등장합니다. 원숭이는 자신이 배운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기도, 끝없이 가만히 있기도 해요. 가면 안 원숭이의 눈동자를 비출 때 무언가 의미를 담고 있는 연출인 거 같기도 해요. 원숭이는 지시와 본능, 우연과 필연 사이를 오갑니다.
작품을 보며 P와 J,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생각했어요. 우리의 소비엔 무의식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우리가 선택한 직업이나 가고 있는 길, 선택하는 취미 등 모든 건 우연처럼 보이지만 우연히 선택된 게 아니라 무의식이 내린 결정의 총합이라고 하죠. J 성향은 소비에 관련된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자 하며 통제되고 있다고 믿죠, P 성향은 J 성향에 비해 자신의 직감을 믿으며 그것이 최선이라 여기는 긍정적 마음가짐이 있는 듯해요.
가면을 쓰고 빙글빙글 돌고 때로는 가만히 기다리며, 인간처럼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원숭이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나요?
U움벨트 - 안리 (UUmwelt - Annlee), 2018-2025
딥 이미지 재구성, 스크린, 센서, 사운드, 향기
실재하지 않는 인물인 안리를 상상하는 누군가의 정신적 이미지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에 의해 생성됩니다. 이미지는 지속적인 최적화, 학습, 딥 뉴런 네트워크를 통해 끝없이 수정합니다.
인간의 상상을 비인간적인 인지(언어와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모든 표현방식을 우회하여)로 표현합니다. 상상의 주체인 인간은 스스로 외부가 되어 결과를 미리 결정할 수 없게 됩니다. "결과를 미리 정하지 않고 언어와 감각을 통해 전달하는 모든 표현방식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결과를 보여준다."
-정신 이미지는 뇌 컴퓨터 인터페이스를 통해 생성됨.
-알리라는 상상의 인물을 상상하는 인간의 뇌 활동을 포착함.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상황을 상상한 경험은 많을 것입니다. 나의 행동다음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곤 하죠. 하지만 실제 하지 않아 상상할 수 없는 형태를 규정지으려 할 땐, 명확한 대상이 떠오르지 않을 거예요. 작품은 이러한 인간의 뇌를 스캔하여 보여줍니다.
작품을 보며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아이트레커를 떠올렸어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미래를 예측하여, 범죄자를 미리 잡는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입니다. 작품의 내용과 정반대의 상황이죠. 아이트레커는 눈동자의 행로를 쫓는 기기입니다. 아이트레커와 뇌스캔의 차이점은 존재하는 대상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없는 대상을 상상하려 애쓰는 모습을 출력한다는 차이점이 있는 정반대의 기계지만 '이미지로 출력'한다는 공통점이 아이트레커를 떠오르게 합니다.
카마타 (Camata), 2024 – 현재
기계 학습으로 구동되는 로보틱스, 자기 생성 영상, 실시간 인공지능 편집, 사운드, 센서
카마타는 침대라는 의미의 포르투갈어입니다. 일련의 기계가 아타카마 사막에서 무덤 없이 발견된 인간 해골을 놓고 움직이는 모습을 담은 영상입니다. 아타카마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건조한 사막으로, 천문학자들이 태양계 밖에 존재하는 행성을 연구하는 시험장이기도 하죠.
영상 속 머신러닝으로 구동되는 기계에 어떤 값이 입력될까요? 사실 기둥에 달려있는 동그란 금색 구 안의 센서가 영상 속 이미지와 소리에 영향을 미칩니다. 머신러닝은 전시공간의 센서에 영상을 받아 사운드와 영상을 실시간, 지속적으로 편집하여 출력합니다. 그래서 영상은 시작이나 끝이 없고, 진정한 의미의 자기주도 학습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영화인 셈이죠.
피에르 위그의 작품은 으스스하고 무섭다는 소식을 미리 듣고 가서인지, 예상치 못한 기괴함을 느끼진 않았지만, 이쁘고 귀여우며 통통 튀는 작품을 접하다가 아주 어두운 공간에서 기괴한 작품을 만나니 좋았습니다. 마치 말이 없으며 전반적으로 차갑고 스산한 예술영화를 본 듯 말이죠.
저는 전시장에서 처음 만나는 미디어 작품 <리미널>에선 친근한 느낌, <오프 스프링>에선 익숙한 감정을 느꼈는데요. <리미널>에 나오는 피조물의 살갗의 핏줄이 보일 만큼 클로즈업된 채로, 가만히 서서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토도독 칠 때 친근한 느낌이 든 이유를 명확히 알았어요. 그 이유는 초등학생 때부터 조금은 어두운 느낌의 독일 청소년 문학을 읽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죠. 검은 꼬마마녀가 나오거나, 특이한 청소년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좋아했기에 리미널에 나오는 피조물이 가진 으슥함이 너무나 익숙했답니다.ㅎㅎ 성인이 되고 나선 틸다 스윈튼같이 크고 통뼈의 마른 살갗을 가진, 하지만 몇 시간이고 굳건히 서있을 수 있을 거만 같은 인물을 좋아하는데요. 딱 그런 몸을 가진 인물이 화면에 나옵니다. 얼굴이 블랙홀같이 검어 속내를 알 순 없지만 굳건히 존재하는.
피에르 위그의 개인전을 본다는 게 재밌고 신기하면서도 지난 리움미술관에서 한 전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요. 지난 전시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또한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미생물의 경계를 허무는 전시였기에 리움 학예팀이 하나의 작업물에 여러 의미, 철학, 생각을 중첩시키는 작가를 좋아한다는 생각 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은 다양한 담론을 넣는다는 생각이 든 전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