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나를 노트북으로 본다면 메모리를 기억력, 혹은 학습 능력 정도로 볼 수 있을까?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흔히 얘기하는 암기과목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리, 역사 같은 과목의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정말 단기적으로 시험을 위해 공부하고 시험지 제출하는 순간 다 잊어버리는 타입이었다.
특별히 공부하지 않아도 성적이 잘 나오고, 좋아했던 과목은 국어. 어릴 때 집에 책이 많거나 특별히 독서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때문인지 국어책에 나오는 예문만 봐도 재미있게 빠져들었고, 선생님들의 설명을 듣는 것도 좋아했다.
늘 내 성적의 마이너스를 책임지는 건 영어, 수학이었다. 첫 번째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시작하면서 영어와 수학만 붙잡고 올려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영어 선생님 말씀으로는 국어를 잘하면 영어도 성적 올리기 쉽다고 해서 희망을 가졌는데, 수학이 점점 재미있어지고 성적이 오르는 동안 영어는 거북이처럼 더디게 기어올랐다. 그 후로 2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영어는 늘 가까워지고 싶지만 가까워지지 못하는 상대로 책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공부 외에 다른 기억을 생각하면 구체적인 상황이나 정보보다는 주로 감각적인 부분이다. 특히 시각적인 부분.
어린 시절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바로 할아버지가 손에 쥔 붓끝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할아버지께서 나를 돌봐주셨다. 할아버지는 먹을 갈아 붓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리셨는데, 난 특히 꿩이나 봉황 같은 새 그림 구경을 좋아했다. 먹을 머금은 붓이 지나가면 부드러운 꼬리 깃털이 만들어지는 모습이 그 시절엔 마술 같아 보였다. 난 할아버지 옆에 엎드려 달력 뒷장에 낙서를 끼적이는 게 일상이었다.
이후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장면은 초등학교 1학년 겨울, 초등학교 하교하고 집에 오는 길 골목에 걸려있던 상여등 불빛. 그리고 열려있던 우리집 현관문과 집 바깥까지 어지럽게 놓여있던 많은 신발들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생각하면 그 이미지가 또렷하다.
그리고 시각적 즐거움에 취약하던 내가 빠져들었던게 초등학교 때 우연히 본 마돈나의 뮤직비디오였다. 꽤 오랫동안 마돈나를 좋아했고, 이후에는 영화에 빠져들어 왕가위 감독과 팀버튼 감독, 이명세 감독을 특히 좋아했다. 모두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감독들이었으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취향과 방바닥에 엎드려 끼적이던 낙서가 이어져 지금껏 그림을 업으로 삼고 있다. 덕분에 종종 ‘금손’이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는데, 그 칭찬의 대상은 손이 아니라 눈이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난 춤이나 운동은 고사하고 저글링이나 펜 돌리기 조차도 잘하지 못한다. 타고난 몸치라 몸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을 보면 부럽고 신기할 뿐이다. 그나마 보는 눈이 높고 예민한 탓에 그림을 그려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지금도 내 손은 눈보다 한참 감각이 떨어져서 내 그림엔 만족을 못한다는 거다.
**내 기억 및 감각 사양 (2025년 5월 기준)
기억 저장 방식: 단순 암기보다 이야기, 혹은 시각 자극을 통해 입력된 정보가 오래 보존됨.
논리적 정보나 순서 중심의 데이터는 단기 저장 후 소멸 가능성 높음.
입력 포트: 시각적 자극 예민. 기능보다 디자인 위주의 소비 위험이 있음.
출력 기기: 손 및 몸 제어 능력은 상대적으로 낮음. 꾸준한 연습 필요.
업데이트: 취향과 표현 방식에 발전을 위해 지속적인 시각적 자극 필요.
주의사항: 창작물에 대한 낮은 만족도가 자존감에 영향을 줄 수 있음.
이럴 경우, 독서나 운동 등 정신적 회복 루틴을 적용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