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은 무대 위의 드라이버다
작년 F1더 무비 개봉을 앞두고 F1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F1의 역사, 경기 운영 방식, 유명한 선수들에 대한 재미있는 영상들을 찾아보며 F1에 익숙해졌고, 넷플릭스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F1: 본능의 질주>를 보면서 각 선수와 팀이 만들어내는 드라마에 빠져들었어요.
시리즈의 시즌을 몇 회 보면서 떠오른 다른 시장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국의 아이돌, KPOP입니다. 시속 300km로 질주하는 서킷 위의 세계와 화려한 조명 아래 K-팝 무대가 꽤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레이싱'과 '아이돌', 왜 이 두 세계는 어떻게 닮아있을까요?
F1 드라이버가 되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좁은 바늘구멍 중 하나입니다. 이들의 여정은 보통 대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카트(Kart) 운전대를 잡으며 시작됩니다. 이후 F4, F3, F2라는 하위 리그를 마치 피라미드 오르듯 하나씩 정복해야 하죠. 매 단계마다 천문학적인 자본과 부모의 희생, 그리고 스폰서의 선택이 필수적입니다. 그렇게 노력한 수많은 아이들 중 살아남은 단 20명만이 전 세계 서킷의 주인공인 F1 시트(Seat)에 앉을 수 있습니다.
아이돌의 여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되는 '연습생' 생활은 F1의 주니어 아카데미와 같습니다. 노래와 춤이라는 기본기부터 언어, 태도, 정신력까지 매주 '월말 평가'라는 혹독한 레이스를 거치며 걸러집니다. 기획사는 한 팀을 데뷔시키기 위해 자본을 투자하고, 연습생들은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간을 불확실한 미래에 올인합니다.
두 직업의 가장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공통점은 바로 '시한부적 특성'에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 능력이 정점에 달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중후반,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모든 에너지를 화려하게 태워야 합니다. 전성기가 지나면 무대와 서킷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운명을 알면서도, 그들은 단 한 번의 챔피언십과 단 한 번의 1위를 위해 인생 전체를 투자하죠. 성공의 열매는 그 어떤 직업보다 달콤하지만, 그 기회는 오직 서킷 위에 선 극소수에게만 허락됩니다.
F1에서 드라이버의 실력만큼 중요한 것이 '머신(차량)'의 성능입니다. 아무리 천재적인 드라이버라도 팀의 엔지니어링과 거대 자본의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승 후보에도 들 수 없습니다. 이는 아이돌도 마찬가지죠.
데뷔부터 큰 인기를 얻고 매 곡마다 트렌드를 이끌었던 그룹 뉴진스를 둘러싼 상황을 보면 이 비유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드라이버 = 아이돌 멤버 (퍼포먼스와 재능)
치프 엔지니어 = 프로듀서 (독창적인 기획과 디렉팅)
컨스트럭터(팀 제조사) = 하이브 (거대 자본, 글로벌 네트워크, 인프라 지원)
뉴진스라는 압도적인 드라이버들이 민희진이라는 치프 엔지니어가 설계한 하이퍼카를 타고 서킷을 장악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 차를 제작하고 운영할 수 있게 뒷받침한 하이브라는 거대 컨스트럭터의 자본과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갈등은 이 세 주체의 신뢰와 균형이 깨지면서 발생했습니다. 드라이버와 엔지니어는 팀의 경영 방식과 지원에 의문을 제기하고, 컨스트럭터는 팀의 통제권과 계약을 강조하면서 결국 '우승 머신'이 서킷 위에서 멈춰버린 것이죠. 팬들이 느끼는 답답함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자본이 만난 이 완벽한 팀이 내부 갈등으로 인해 서킷에도 오를 수 없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F1과 K-팝의 유사한 특징을 이야기했지만 크게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아이돌 시장에서 반복적으로 문제가 되는 계약 문제죠. 왜 K-팝은 문제가 생겨도 팀을 옮기거나 변화를 주기 힘들까요? 답은 우리 산업의 역사에 있습니다.
2009년, 이른바 '노예 계약'이라 불리던 불공정 관행을 막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는 '표준전속계약서'를 도입했습니다. 당시 동방신기 사태를 겪으며 아티스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 전속 기간 7년'이라는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이죠.
당시에는 최선의 방패였던 이 '7년'이, 지금은 아이돌 산업의 유연성을 가로막는 벽이 되기도 합니다. 2009년에는 선진 시스템으로 한 발짝 나아간 성취였지만 15년이 지난 현재는 개선되어야 할 걸림돌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과가 좋으면 더 좋은 조건으로 이적하고, 맞지 않으면 팀을 옮기는 '시장 논리' 대신, 무조건 7년을 채우거나 아니면 파국을 맞이해야 하는 이분법적 구조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스포츠에는 '스토브리그(Stove League)'가 있습니다. 시즌이 끝난 겨울, 난로(Stove) 주변에 모여 선수들의 이적 소식과 계약 갱신을 논하며 다음 시즌을 기대하는 시기죠.
만약 K-팝에도 F1처럼 매 시즌 혹은 2~3년 단위의 '시트 쟁탈전'과 '이적 시장'이 존재한다면 어떨까요? "어느 그룹의 메인 보컬이 이번에 새로운 레이블로 이적한다더라", "어느 그룹과 프로듀서가 함께 어느 레이플로 이적한다더라"는 소식이 배신이 아닌, 커리어를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존중받는 풍경 말입니다.
창작자의 재능과 아티스트의 노력이 시스템의 오류에 갇혀 낭비되는 것은 아티스트, 팬, 나아가 국가적으로도 손실입니다. 이제 K-팝도 아티스트를 묶어두는 방패를 넘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자유롭게 달릴 수 있게 하는 '유연한 서킷'으로 진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 글에서는 아이돌 아티스트의 육성과 매니지먼트의 분리, 그리고 이적료 시스템이 가져올 K-팝의 변화에 대해 상상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