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원동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미술
미술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수년간, 여러 번 듣고 고민해 온 질문이나, 각자 각기 다른 답을 내놓을 질문이기도 하죠.
때로, 미술은 충격과 궁금증을 유발하여 의식을 확장시켜 주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유례없는 퍼포먼스와 작품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느낌표'와 '물음표'를 던지는 작가가 있습니다.
오늘 아트베이커의 [MEET] 시리즈의 주인공인 세계적인 설치미술 작가 이불(Lee Bul, b.1964-)입니다.
'생선 썩은 내'라는 단어에서 어떤 냄새가 연상되시나요? 아마 그리 유쾌한 감각은 아닐 것입니다.
<화엄>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살펴보면, 화려한 구슬 장식을 한 생선이 비닐봉지에 담겨있습니다.
예상대로, 생선이 썩으며 전시장 내부에 고약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전시 개막 다음날, 작품의 일부가 심한 악취로 인해 일부 철거되기도 하였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흥미를 느꼈던 작가는 생명을 잃은 신체가 너무나 쉽게 부패하는 과정이 허무하게 느껴져 이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여성 신체에 가해진 폭력과 고문 행위를 화려한 비즈 장식을 꽂아 장식한 물고기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초대 회고전에서 선보였던 이 작품은 당시 국제적으로 큰 논란의 중심이 되며, 이 작품을 제작한 작가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이 잇달았는데요.
그 작가가 바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이불입니다.
이불은 부친이 지어준 본명으로, 한자로 새벽, 동이 트는 불(昢)을 쓴다고 합니다.
나이를 먹으니까 더 이쁘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날 일(日) 변, 태양이 들어가서 좋다
이불 작가가 태어난 해인 1964년은 정치적 수난과 부조리함이 만연했던 격동의 해였습니다. 박정희 제5대 대통령으로 재직한 지 1년이 되던 해인 1964년, 박정희 정부는 6·3 항쟁(한일협상 반대 운동)을 하는 약 1만 2천여 명의 학생들의 거리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유혈극을 벌였고, 계엄령 선포와 시위 무력 진압, 언론 검열, 대학휴교, 주동자 검거에 돌입했습니다.
반체제 활동을 한 이불 작가의 부모님은 좌파 정치 운동가로 낙인찍혀 연좌제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며, 이불 작가의 가족은 수시로 집을 드나들며 감시하는 공안당국의 감시를 피해 1년에 한 번 꼴로 많은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어렸을 적, 이불은 특이한 이름과 왼손잡이라는 특징 때문에 짓궂은 남자아이들의 놀림감이 됐고, 그 괴로움에서 싹튼 열등감이 훗날 그의 반항아적인 작품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강한 자의식을 갖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궁핍하고 굴곡진 유년시절의 풍경을 마주하며 자랐던 이불 작가는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눈을 뜨며,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굳센 포부를 가지게 됩니다. 좌익사범 연좌제에서 가장 자유로운 직업이 예술가였기에, 아홉 살의 나이에 그는 작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전기류 책을 보면 확 꽂히는 것 같았다.
'곤충기'를 쓴 프랑스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
이탈리아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진화론을 펼친 영국 생물학자 찰스 로버트 다윈 등을 읽으면서
그중 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특히 과학과 그림 등 모든 방면에 뛰어난
천재 다빈치처럼 되고 싶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현대미술계를 선두하며, 날카로운 사회 및 역사 비판의식과, 유토피아에 관한 인본주의적 탐구를 보여준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행위예술과 설치미술의 두 가지 영역으로 나뉘며, 이외에도 회화,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의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이 작품은 언뜻 보면 반투명한 얼음덩어리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한 사람이 갇혀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창씨개명한 이름인 '다카키 마사오(Takaki Masao)'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독재정권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이 담겨있는 이 작품에는 작가의 개인의 의식이 '예술적 시각언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정적인 언어나 호소가 아닌, 그저 관람객에게 시각적인 자극을 주며, 이를 통해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죠. 그가 세상을 바꾸고자 심었던 씨앗의 형태는 이런 것이었나 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던 작가는 국제무대에서 '동양인',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가진 한계를 마주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마주한 어려움을 직면하고, 이를 세상에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기회로 바라봅니다.
이불 작가는 '정치'에서 '인종'과 '젠더'로 작업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켰습니다. 자신의 단단하고 굳건한 포부를 당당히 드러내며 세상에 맞선 작가는 앞서 소개한 <화엄>이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철수되었을 때, 미술관 측이 이를 모두 작가의 책임으로 돌리자, 계약 위반 고소장으로 손해배상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이후, '동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은 수모와 울분의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히드라>는 동양 여성을 순종적이고 유약하고 종속적인 존재로 재현하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비웃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관람객이 펌프 페달을 직접 밟아 바람을 불어넣어야 일으켜지는 관객참여형 조각으로 다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인 미술 전시 공간에서는 관람객이 작가의 작품을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권력 구조가 있었다면, 풍선 모뉴먼트 조각물인 이 작품에는 관객이 개입하며, 각자의 머릿속에 저마다의 '느낌표'와 '물음표'가 떠오르게끔 합니다.
<낙태(Abortion)>는 이불 작가가 완전히 벗은 몸으로 등산용 밧줄에 묶여 객석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퍼포먼스 형태의 작품입니다. 홍익대 조소과를 갓 졸업한 스물다섯 살의 이불 작가는 파격적인 퍼포먼스 <낙태>로 미술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세상을 바꾸고자 한 몸 내던졌던 젊은 작가 이불의 자발적인 고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이어지자 무대에 앉아있던 관객들은 달려가 그를 끌어내렸습니다.
그때는 두렵지만 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별로 잃을 게 없었으니까.
가진 게 없던 20대에 몸을 던져 저항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을 펼친 이불은 이제 세계 미술계를 뒤흔드는 스타 작가가 됐습니다.
여성 작가, 그것도 아시아의 여성작가라는 내 정체성은
국제무대에서 핸디캡으로 작용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나의 태생적 환경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그 핸디캡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 신경숙 외 18인 <땀방울에 비친 그녀들의 이야기>, 1999
세계 무대에 선 이불 작가에게 그의 몸은 핸디캡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의 핸디캡을 예술로 승화시켰습니다. 작가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동양인 여성의 몸을 향한 부조리한 성차별적 시선과 억압을 마주한 관객에게 무언의 눈빛을 보내며 자신의 고통과 울분을 전달하였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관람객에게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세계적인 작가 이불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 뿐만 아니라 구겐하임 미술관(The Guggenheim Museum), 파리 퐁피두 센터(Centre Ponpidu), 도쿄 모리미술관(Mori Art Museum),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도 전시를 선보였습니다. 그는 1999년 제48회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한국관 대표 작가로 참여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불은 국제무대에서 각광받으며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큐레이터 얀 후트(Jan Hoet, b.1936-2014)가 헤르포트 미술관을 개관하며 선발한 20세기 현대미술계의 거장 50인 중 이불은 아시아 작가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며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b.1881-1973), 파울 클레(Paul Klee, b.1879-1940), 앤디 워홀(Andy Warhol, b.1928-1987),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 b.1921-1986)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이불은 런던, 베를린, 도쿄, 뉴욕 등 전세계 주요 도시에서 꾸준히 대규모 회고전을 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2012년 아시아 여성작가 최초로 도쿄 모리 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은 동시대 최고 작가로서의 작가의 위용을 증명한 전시였습니다. 2019년에는 20년 만에 베니스 비엔날레에 또 한 번 초청받아 전시를 개최했습니다. 작가는 2014년, 광주 비엔날레 눈 예술상, 2016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수상, 2019년, 호암상 예술상 수상을 했습니다,
이불 작가의 낯설면서도 장식적인 작업 언어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가운데, 세상을 바꾸기 위한 이불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습니다.
8월 26일부터 10월 14일까지 성북구에 위치한 BB&M 갤러리에서 <이불>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불 작가의 신작인 회화 연작 <퍼듀(Perdu)>와 유토피아적 모더니티의 열망을 상징화한 대형 설치 작품 <Willing To Be Vulnerable - Metalized Balloon>을 함께 선보입니다.
오는 9월 6일부터 시작될 제2회 프리즈 서울 2023(Frieze SEOUL 2023)에서도 이불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프리즈 서울의 리만머핀 부스(C11)에서는 이불뿐만 아니라 서도호, 성능경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한국 작가들을 만나볼 수 있다고 하니 놓치지 마세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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