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K Aug 29. 2023

프롤로그. 수많은 물건들이 천일야화를 이야기한다.

내가 미술감독이라는 일을 사랑하는 이유

폴 오스터의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책은 뉴욕 타임스에 실렸던 동명의 단편소설과, 그를 토대로 만들어진 <스모크>라는 영화의 시나리오, 영화의 제작과정에 관한 인터뷰가 실려있는 책이다. 이 책을 대학시절 헌 책방에서 샀으니, 읽은 지 10년은 더 된 것 같다. 이 책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기억에 남는 구절은 폴 오스터가 영화 미술에 대해 말한 부분이었다.


작은 커피잔이 탁자 위에서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고, 책상 위에는 허먼 멜빌의 엽서가 있고,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워드 프로세서가 구석에 처박혀 있다. 수많은 물건들이 천일야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영화 미술은 매혹적인 절제이다. 거기에는 진짜 영적(靈的)인 요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실제 존재하는 것들과 매우 가깝게 보여야 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물건들처럼 비쳐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상상과 허구의 세계를 위해서 재구성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미술처럼 세상을 주의 깊게 살피게 해주는 직업은 좋은 직업임에 틀림없으며, 영혼을 위해서도 아주 좋은 직업이다.


이 문장을 접했을 당시 나는 영화미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그저 영화와 책을 좋아하는 미대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스럽게 느껴지는 직업에 대해서 호기심을 느꼈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미술감독이라 나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무슨 일을 하는 걸까? 당시에는 미술감독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이러한 호기심이 내 삶의 자잘한 선택들에서 미술감독이라는 직업에 가까워지게끔 유도한 것 같다.


드라마 미술감독으로 일하는 지금, 폴 오스터의 문장들이 이 일의 핵심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물건들이 천일야화를 이야기'한다는 것, '실제 존재하는 것들과 유사하게 보이면서도 상상과 허구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세상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 일을 하면 할수록 더 크게 와닿는 말이다. 이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래서인지 끊임없이 세상에 대해 배우고 성장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이 글은 나를 위해서 썼다. 일을 하면서 힘들 때, 미술감독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멋지고 좋은지, 내가 왜 이 일을 좋아하는지 떠올리곤 한다. ‘이 정도 성가신 일로 이 성스러운 직업을 포기할 순 없지’ 따위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종종 하는 걸 보면, 미술감독이라는 직책은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직업이든 스트레스는 있기 마련이고,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개인의 예술적 성취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꽤 괜찮은 직업일 수 있겠다.


어쨌든 나에게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써, 내가 좋아하는 이 일에 대해 말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때로는 죽을 똥 살 똥 일 하는데, ‘무대디자이너’나 ‘미술감독’이라고 하면 ‘망치로 뭔가 만드는 사람인가?’하는 사람들의 오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 작품 한 작품 진행할 때마다, 새롭게 부딪히는 문제들과 새롭게 깨닫곤 하는 것들에 대해 기록하고 싶었다. 기회가 된다면, 이러한 기록이 또 다른 나—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 혹은 미술감독의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감과 도움이 되길 바라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