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맥키는 <캐릭터>에서 “스토리가 존재(being)의 본질을 표현하는 삶의 은유라면, 캐릭터는 생성(becoming)의 본질을 표현하는 인간성의 은유다.(캐릭터, p21)”라고 말한다.
우리가 ’스토리‘를 통해 결코 경험해 본 적 없는 세계에서 살아보려면, 감정을 이입하여 그 이야기를 삶처럼 체험할 수 있게 해 줄 잘 만들어진 “캐릭터”가 필요하다. 맥키는 이러한 캐릭터를 잘 키워내기 위해서 창작자가 갖춰야 할 능력을 몇 가지 소개하는데, 그중 인상 깊었던 건 “클리셰를 거부할 것”이라는 부분이었다.
“클리셰는 처음 고안될 당시 너무 괜찮았던-사실상 너무 훌륭했던-탓에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재활용을 거듭해 온 아이디어나 기법이다. (…) 가령 코카인과 섹스를 무한정 즐기는 젊고 잘생긴 제트족들이 사실 우울하고 비참한 정서를 느끼고 있다는 발상은 전혀 새롭지 않다. 연극과 영화와 소설과 노랫말에서 수천 번 읊어 온 레퍼토리다. 탐닉의 공허함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데이지와 개츠비 이래 순수예술과 대중문화 양쪽 모두의 클리셰가 된 지 오래다. 부유층을 글감으로 삼을 생각이라면, 피츠제럴드만이 아니라 에블린 워, 노엘 코워드, 우디 앨런, 위트 스틸먼, 티나 페이가 창조한 수많은 캐릭터들, 그리고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콜 포터의 노래가 나오는 영화, 연극, TV드라마, 특히 HBO시리즈 <석세션>까지 두루 조사해 보기 바란다.(p30)”
바로 이 문단을 읽고 나서, 뜬금없이 우디 앨런의 영화를 하나 봐야겠다는 생각에 찾아본 것이 <블루 재스민>이다. 1947년 말론 브란도, 비비안 리 주연의 영화,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라고 하는데, 케이트 블란쳇의 열연으로도 유명하다.
영화는 뉴욕에서 최상류 층으로 살던 재스민이 여동생이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시작한다.
비행기 퍼스트클래스에서부터, 명품을 휘두른 재스민의 모습은 부유하고 우아해 보이지만, 사실 남편 할이 사기 혐의로 교도소에 들어가 자살한 뒤 재스민은 빈털터리 신세인 데다 정신도 온전치 않아 보인다. (비행기 옆좌석 할머니 불쌍...)
동생 진저의 집에 찾아온 것도 갈 곳도 없고 돈도 없어 얹혀살기 위해서인데, 빚쟁이 주제에 루이뷔통 트렁크를 잔뜩 들고 와서 동생이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재스민 역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의 옷차림은 샤넬 재킷과 에르메스 버킨백과 스카프 등 너무나 고급스럽고 우아하다. 케이트 블란쳇이라 더 우아해 보이는 걸까?
재밌는 건 이 우아한 착장이 나중에도 반복되면서.. 정말 소중한 단벌 재킷.., 무얼 입든 들고 다니는 버킨백이 끝까지 놓지 못할 정체성처럼 느껴지는 게 재밌었다.
이렇게 우아하고 호화롭게 살던 사람이,
별 볼 일 없는 남자들만 만나는 것 같은 여동생 진저와 거칠고 촌스러운 친구들과 어울리려니 미칠 노릇.
파티에서 만난 남자를 통해 자신을 구원해보려고 하지만, 재스민은 자신의 현재 상황을 속이고 거짓은 늘어만 간다. 일이 이렇게도 풀릴 수 있는 걸까? 약간은 기대를 가지며 이야기를 지켜봤지만, 역시 그런 구원은 있을 수가 없다.
초반에 재스민은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가식적이고 허풍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후반으로 갈수록 신경질적이고 공허한 모습이 많이 나타나는데, 연기와 캐릭터의 묘사가 날 것처럼 생생했다. 특히 의상에서 이런 변화의 디테일들이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사서 입은 새 옷은 핏도 잘 살고 반듯하지만, 몇 날 며칠 입고 다녀 내 체형에 맞게 불룩해지고 구겨진 옷처럼, 재스민의 재킷도 나중엔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발악하듯 슬퍼할 때의 재스민은 하필 얇디얇은 실크소재의 옷을 입고 있는데, 축 늘어지고 땀에 젖은 디테일로 인해 더욱 처참하게 느껴졌다.
허풍과 가식으로 만들어진 삶, 휘황찬란한 껍데기가 벗겨진 속에 자신이 진정 이룬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