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디버드 리뷰_written by 하진
두 모녀가 자동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으로 레이디버드의 17세의 삶이 레이디버드의 관점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의 한 해 가장 흥미로운 것은 2002년의 앞 뒤 숫자가 같다는 점일 뿐이라 하 며 새크라멘토에서의 자신의 삶이 너무나 평범하고 지루하다고 한다.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문화의 도시 뉴욕으로 대학을 진학하는 것이 그녀의 로망이다. 평범한 자신의 이름 ‘크리스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에게 레이디버드라는 이름을 지었고 그녀를 레이디버드로 불러주지 않으면 차에서 뛰어내리거나 화를 내곤 한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레이디버드의 1년을 보여주며 새크라멘토에서 뉴욕으로 이어진다. 주인공 주변에는 다양한 인물 관계가 등장하는데 그 중 엄마와의 관계가 가장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보다는 성장하는 영화 속 레이디버드와 엄마와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일반적인 모녀관계를 바라보려고 한다.
우리가 접하는 미디어 속에는 다양한 엄마들이 등장한다. 강한 엄마, 약한 엄마, 사랑이 넘치는 엄마, 철 없는 엄마, 못된 엄마 등등 미디어 속에 등장하는 ‘엄마’라는 캐릭터는 항상 특정한 성격을 보여준다. 그 중엔 주인공과 긍정적이고 애정 어린 관계를 가지고 있는 엄마도 있고, 뭘 해도 잘 맞지 않고 항상 어려운 엄마와의 위태로운 관계도 있다. 이러한 것들과 다르게 이 영화 속 모녀관계는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다. <레이디버드> 속 엄마는 누군가의 딸들인 우리가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 일상, 다툼, 기싸움과 대화 등을 가장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영화 내내 레이디버드의 관점에서 엄마와 대화하며 자연스레 과거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 과거의 엄마를 다시 마주한 기분이었다. 영화 후반부에 들어서는 엄마의 관점으로 보게 되기도 했었는데, 냉랭하게 딸을 공항에 내려주고 다시 울며 공항으로 운전해 돌아가는 장면에선 내가 엄마의 관점이 되어 미래의 나의 딸,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차마 못 보지 않을까 싶었다. 엄마가 운전하며 급히 공항으로 뒤늦게 돌아가는 장면은 대사 한마디 없이 엄마의 표정과 운전하는 모습, 음악과 풍경만으로 연출되었는데 엄마의 마음 속 대사가 들리는 듯 했다.
영화 속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엄마와의 감정 관계는 애증이다. 즉, 애정과 증오이다. 레이디버드는 엄마를 사랑하고 애정을 바라다가, 자신의 로망과 꿈을 막는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차없이 증오의 마음을 쏟아낸다. 레이디버드는 엄마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좋아해주길 바란다. 레이디 버드와 엄마가 옷을 사러 간 탈의실 장면에서 레이디버드는 엄마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 달라고 이야기한다. 우린 보통 좋아한다는 감정을 사랑이란 감정의 하위에 있는 감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이유로 못 할 짓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대하거나 방임하고 뒤늦게 후회하며 그 이유가 사랑이었음을 이야기하곤 한다. 특히나 가족간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아름답게 유지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좋아한다는 감정은 부서질까 두렵고 설레는 마음이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고결하게 생각하는 “사랑” 보다 “좋아함”이라는 감정이 더 소중할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얻을 수 있다.
몇몇 장면에서 레이디버드는 자신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떤 장면에선 사랑이 많은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또 다른 장면에서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레이디버드가 엄마에게 이런 이중적인 감정을 지니는 이유는 엄마가 그녀에게 든든한 지원자이자 방해자이기 때문이다. 딸은 살아가며 자신이 원하는 이상향을 갖게 된다.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 있길 바라는 자신의 이상향을 만든다. 그것이 크리스틴에겐 뉴욕 속 레이디버드였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엄마가 이를 지지해주기를 바라지만 여러 상황 속 엄마는 자신의 지지자가 되어주지 못하고 계속 반대하는 방해자가 된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엄마를 일종의 방해자로서도 표현한 것일까. 사람은 살아가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거나, 후회하게 될 선택을 하게 된다. 이는 시간이 흐르며 더 이상 손 쓸 수 없게 되어버리며 일종의 콤플렉스가 되기도 한다. 엄마가 된 이 사람 은 자신의 자식에겐 그러한 실수를 하도록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다. 심지어 나의 경우, 동생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들어 동생이 내리려는 결정에 하나하나 단점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보호 책임과 더불어 자신이 겪은 실수를 자식은 만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엄마는 기꺼이 방해자가 되며, 때로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여 자식은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방해자가 되기도 한다. 영화는 이런 점을 말하고 싶었다고 본다.
주인공의 엄마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 방해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충분히 여러 방법이 있는데 레이디버드가 뉴욕에 가는 것을 반대하고, 어차피 동부의 대학에 붙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성인이 되기 전 딸이 갖는 이상향은 어른 눈엔 터무니 없고 유치한, 잘못되어 보이는 한낮 로망에 불과 해 보일 수도 있다. 이는 레이디버드가 영화 속 하나하나 겪은 이상의 파괴에서 알 수 있듯이 언젠가 깨달았을 것이다. 레이디버드의 로망이었던 첫경험은 생각보다 별 것 없었고, 꿈꾸던 졸업 파티는 친구와 함께 보내게 되었는데 이렇게 차례차례로 소녀가 가지고 있는 로망이 깨지며 성장한다.
영화 마지막, 레이디버드가 자신의 이름을 크리스틴으로 소개하는 것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자신이 그렇게 바라던 타지도 사실 부질없음을, 사실 자신은 새크라멘토를 사랑했음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혹은 이상향을 쫓는 것을 멈추고 현실적으로 살아감을 마음 먹었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쁘다는 것을 판단하기에는 어렵다. 대학교에 진학한 크리스틴이 더 이상 이상을 쫓고, 자신에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생각하면 조금 슬픈 현실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특별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낮은 자존감과 결부된다고 생각한다. 그 낮은 자존심의 이유는 어려웠던 가정 형편이나 오래된 집과 같은 물질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엄마와의 갈등 관계도 해당한다. 엄마가 전하지 못했던 편지를 읽고 엄마 의 진심을 확인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굳이 특이 해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서 크리스틴이 된다. 결국 그녀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풍족한 지원도 남자친구도 아닌, 엄마의 마음이었다.
영화 <레이디버드>는 겉으로는 잔잔하지만 관람객의 감정은 요동치게 만든다. 누군가의 딸인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인 레이디버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과거의 내 모습을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 보는 느낌이라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하다. 그 누가 어떤 말을 해도 머리 속까지 들어오지도 않고 튕겨 나가던 그 시절의 나에게 그래도 다행이라고, 잘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결국 세상을 보는 눈과 내 마음의 방향은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결국 나로 인해 바뀌고 나를 통해 알 수 있다. 크리스틴이 새크라멘토를 처음으로 운전하며 달릴 때 자신이 항상 이 장소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가서야 안 것도, 그녀의 자발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우린 항상 눈 앞에 가장 소중한 것을 두고도 보지 못한 채 다른 것을 쫓아다닌다. 이 생각이 가장 짙게 든 영화였다.
아트비 문화예술 글쓰기 모임
글쓴이 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