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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비 Feb 15. 2022

[서평] 채식주의자 : 마무리될 수 없는 의례

영혜의 탈-인간화 과정을 중심으로_Written by  채은

  


한강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탈-인간화 행위를 각각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에서 서술한 중편 세 권을 엮은 소설이다. 세 권은 인물의 행위와 주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인 개를 먹은 기억과 간밤에 꾼 꿈이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채식을 선언한다. 강압적으로 고기를 먹이려는 가족을 완강히 거부하다 결국 자신의 손목을 긋고 쓰러진다. 그녀의 반사회적 행위는 두 번째 소설 <몽고반점>에서 극대화된다. 온몸에 꽃과 잎을 그리고 예술 퍼포먼스이자 정사를 하자는 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근친상간을 한다. 마지막 소설인 <나무 불꽃>에서는 스스로를 나무라 여기고 물구나무를 서거나 물만 먹으면서 병원 생활을 하다 죽음 직전에 다다른다.     


 

 채식주의 인간에서 식물적 육체가 되기까지 그녀는 탈-인간화의 길을 걷는다. 이 과정은 일정한 법식을 따르는 행사와도 같다는 점에서 하나의 ‘의례’로 보인다. 특히 영국의 문화사회인류학자인 빅터 터너(Victor Turner)의 의례 모델이 영혜의 행위와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터너의 개념을 바탕으로 영혜의 행위를 ‘의례’로서 설명하며 그녀의 탈-인간화 과정에 주목하고자 한다. 터너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아놀드 반 게넵(Arnold Van Gennep)의 통과 의례 개념을 바탕으로 의례 개념을 확립했고 특히 중간 단계인 ‘전이’ 단계에 집중한 학자이다. 통과 의례는 ‘분리->전이->통합’의 세 단계를 거쳐 나타나는데, 영혜의 행위도 이 과정을 따른다.     



빅터 터너

 

 영혜의 채식은 어느 날 갑자기 집안의 지배적 규범과 ‘분리’됨으로써 시작된다. 고기는 물론 달걀, 우유도 먹지 않고 가죽 제품을 버리며 남편에게서 나는 고기 냄새에조차 거부감을 가진다. 그녀가 일반적인 비건과 달리 수면 부족과 정신적 피폐함에 시달려 점점 야위어간다는 점에서 가족과 충돌하게 된다. 인혜의 집들이 날, 육식을 거부하고 자해를 하는 행위는 그녀에게 육식의 통상적인 가치가 무의미해졌음을 상징한다. 그녀는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가족 구조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한다. 결혼식, 성인식 등 사회적 인정을 받는 일반적인 통과 의례와 달리 영혜는 독립적으로 스스로를 사회에서 분리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주체성이 주목된다.     



‘전이’ 단계는 통과 의례의 중간 단계이다. 터너는 전이 단계가 이도 저도 아님을 의미하는 ‘리미널’(liminal)한 특성을 가짐에 주목했다. 영혜는 자해 사건 이후 병원에 입원해서도 채식을 지속하고 마치 온몸으로 광합성 하는 식물이 된 양 웃옷을 벗고 벤치에 앉아있기도 한다. 나아가 자신의 몸에 그려진 식물과 일체가 되어 스스로를 식물적 육체로 여기고, 상대와의 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식물을 표상하는 육체를 가진 자와 결합하려는 의지를 가진다. 영혜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워 사회의 완전한 인간 구성원이라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여전히 현실 사회이며 식물에게는 불가능한 말하기, 생각하기 등의 동물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그녀는 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났거나 식물-되기에 성공하지도 못한 애매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즉, 영혜는 사회의 분류 체계로 온전히 분류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이쪽(이전에 속했던 세속 사회)과 저쪽(앞으로 속하고자 하는 식물 세계)의 틈새에 끼인 자가 되었다. 터너는 세속 사회와 구분되는 전이적 공동체를 ‘코뮤니타스(communits)'라 명명했다. 영혜는 일반적인 코뮤니타스에서와 유사하게 재산과 지위나 표시로부터 자유로우며 신비롭고 초월적인 상태에 놓인다. 그러나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구성원이 없다는 점에서 고독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녀가 도달하려는 ‘통합’의 지향점은 마지막 소설인 <나무 불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혜는 땅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있는 나무와 같이 거꾸로 물구나무 서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또 식음을 거부하고 오로지 물로 수명을 이어가면서 나중에는 말과 생각도 지운 식물을 꿈꾼다. ‘통합’은 전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고 안정을 되찾는 단계이다. 그러나 영혜가 상정한 ‘새로운 사회’는 인간 사회가 아닌 식물의 세계라는 점에서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식물이 될 수는 없으며, 설령 죽음을 통해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식물’로서 생명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영혜는 ‘통합’ 단계에 정착할 수 없으며 의례의 끝에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다.      



 작가는 영혜의 행위를 단순히 ‘기이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향점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 의례 중 하나로 설정했다. 이로써 영혜의 행위 의도 자체는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피력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영혜의 의례에는 일반적인 통과 의례와 다소 차이 나는 부분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면 과연 영혜의 ‘나무-되기’를 의례로 인정할 수 있는 걸까? 보편적인 순서를 따르고 어느 정도 공통된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의례로 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조금 다르기에 미완성될 수밖에 없는, 비주류 의례인 것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의례를 마무리 짓지 않은 채 열린 결말로 이야기를 끝내면서 언젠간 영혜가 의례를 완수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한계를 단정 짓지 않고 ‘리미널’한 상태에 위치시킴으로써 여류 수행자의 공인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혜는 사회에서 벗어나 ‘코뮤니타스’에 방치된다. 이에 독자들로 하여금 코뮤니타스 밖 사회 구성원들의 보이지 않는 폭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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