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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비 Feb 15. 2022

[서평] 채식주의자 : 무해한 인간의 몸에 대한 상상

wirtten by 이담


한강 <채식주의자>



 우리의 기본적 의사소통의 수단은 바로 ‘말’이다. 입으로 소리내서 하는 모든 말들은 나의 의사가 되어 뜻을 전달한다. 하지만 이 ‘말’은 모든 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 쉽게 거짓을 담을 수도 있고, 교묘한 의도를 던질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말의 저의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하지만 ‘말’은 우리가 쉽게 사로잡히는 ‘목소리’라는 감각적 힘을 가진 탓인지 말이 가장 중요한 언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의 ‘몸’도 중요한 언어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상대의 표정과 몸짓을 같이 파악하는 것처럼 몸이 표현하는 언어도 중요한 대화의 맥락을 제공한다. 마력을 가진 목소리에서 멀어져서 내 몸의 움직임을 생각해보자. 오히려 몸을 사용하는 ‘행동’은 더욱 나의 무의식과 직결되어있고 쉽게 스스로를 속이기도 어렵다.    

  

 한강은 「채식주의자」를 통해 이 ‘몸의 언어’를 문학적으로 표현해냈다. 「채식주의자」 속 영혜는 몸의 언어, 행동으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낸다. 육식을 거부하고, 더 나아가 물과 햇빛만 섭취하려 하는 영혜의 행위는 나무가 되고자하는 선명한 목적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목적은 사회규범에서 벗어난 비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영혜는 별다른 변명이나 설명없이 망설임 없이 하려는 일을 해 나갈 뿐이다. 어떠한 고뇌도, 부언설명도 첨언되지 않은 그녀의 행위는 냉정하다.

 영혜의 행위는 총 세 단계의 변화를 거친다. 이 변화는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 3부작 각각에서 표현된다. 



 다시 꿈을 꿨어. 누군가가 사람을 죽여서, 다른 누군가가 그걸 감쪽같이 숨겨줬는데, 깨는 순간 잊었어. 죽인 사람이 난지, 아니면 살해된 쪽인지. 죽인 사람이 나라면, 내 손에 죽은 사람이 누군지. 혹 당신일까. 



 영혜의 변화의 계기는 꿈이다. 꿈에서 어떤 ‘얼굴’을 목격한 영혜는 육식에 대한 강한 혐오를 느끼고 이에 모든 동물성 음식을 끊고 엄격한 채식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혜는 여전히 불면을 달고 사며 몸 내부의 불편함을 없애지 못한다. 그러던 와중 형부에 의해 몸에 몽고반점에서 시작되는 꽃을 온몸에 그리게 된다. 유사-식물적 육체가 되는 경험을 한 순간, 영혜는 전에 없던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영혜는 이제야 명확한 목적지를 찾은 듯 모든 음식을 끊고 햇빛과 물만 받아들이며 나무가 되기를 시도한다.      


 영혜의 몸은 ‘나무-되기’, 즉 비인간적 존재가 되기 위해 움직인다. 소설은 모두 영혜 자신이 아닌 주변인물의 시점으로 진행된다는 점과 영혜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영혜의 행동만을 지켜보고 이를 바탕으로 그녀의 의중과 내부 심리를 짐작할 수 밖에 없다. 



인간 사회라는 폭력의 장



 영혜는 왜 나무가 되려 했을까?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영혜가 놓여진 상황으로, 바로 사회라는 폭력의 장이다. 꿈에 대한 서술, 아버지의 신체적 폭력, 영혜를 파출부로 바라보는 남편의 무감한 시선, 처형인 영혜를 성적 대상으로 욕망한 형부 등에 둘러싸인 영혜는 어릴 적부터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한번도 이를 벗어난 적이 없어보인다. 폭력은 영혜의 몸에 내재되어 이에 저항하기 보다 영혜는 순응하며, 목석같은 사람처럼 자랐다. 하지만 그 고통은 내부에서 그 크기를 키워왔음에 분명했다. 그 고통은 꿈과 육식에 대한 혐오로 나타났다. 이 고기가 주는 혐오와 고통을 뿌리치기 위해 영혜는 몸부림쳤다. 


 이 몸부림의 방식으로 선택한 처음의 채식주의는 외부를 향한 공격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억압에 시달린다. 영혜는 고기를 거부해 가족들 앞에서 아버지에게 뺨을 맞아야했고, 남편과 그 주변인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받아야 했다. 가족과 멀어진 영혜가 형부가 꽃 그림을 그려준다는 대가로 요구한 성관계를 받아들이자 가족들은 바로 영혜를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비이성적 존재로 규정하고 정신병원에 가둔다. 이렇게 외부의 폭력은 영혜의 모든 행동에 빨간 딱지를 붙였고 탈출의 몸부림을 가속화 시켰다. 영혜의 탈출은 자연히 외부를 향해 가시를 세우지도 못하고 내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식물적 존재로의 변화



 다만 이 내부를 향한 탈출의 과정이 결국 ‘나무-되기’로 귀결되는 즉, 자기파괴적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영혜는 이 모든 상황에 질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혜는 자신의 몸 그자체를 나무라는 식물적 존재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영혜가 자신의 몸-인간의 육체 자체를 폭력의 주체자 피해자라는 모순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즉, 영혜는 이 모든 폭력의 근원이 거대한 폭력의 고리를 이어오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본 존재인 셈이다. 이 깨달음이 가능했던 이유는 모순적이게도 그녀의 몸 자체가 폭력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왔던 몸이었고 동시에 아버지가 보신탕을 위해 개를 트럭에 매달아 죽을 때까지 달리게 한 기억을 선명히 가지고 있는 만큼 인간의 잔인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나무-되기’라는 행동은 인간 중심적 사고와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온 현대 사회의 폭력성을 고발함과 동시에 그 반대의 길을 도모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나무라는 식물은 그 자체로 무해하다. 어떠한 선명한 악의랄 것이 없으며 자연의 굴레대로 생성과 죽음을 맞는 존재다. 자신의 가슴을 좋아하고, 몸에 꽃을 그리는 것을 기껍게 받아들였던 이유는 그 어떤 것도 해치지 않는 무해함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영혜는 정신병원까지 내몰리게 되면서 이러한 존재가 될 것을 꿈꾼다. 나무를 닮은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영혜의 몸은 오직 햇빛과 물을 먹이 삼아 살아가며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확장적인 존재다.    

 따라서 영혜가 행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꿈인 동시에 탈출이다. 이 사회에서 벗어난 존재가 될 때 영혜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해방을 맞이할 수 있다. 정신병원에 갇혀 자신의 행동을 가로막는 일 또한 없을 것이며, 폭력적인 가족의 간섭과 행위들도 없을 것이었다. 해방을 향한 열망을 향해 영혜의 몸은 착실히 이를 수행했고, 이 열망은 죽음을 넘어선 차원의 것이었다.         



몸의 언어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 돌아보기



 이렇게 영혜의 몸의 언어, 즉 몸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더 넓게 이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의 몸이 자행하는 폭력들과, 동시에 희생되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점, 이 탈출의 실마리를 식물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까지. 물론, 영혜가 현실에 머무르지 못하고 정신적인 탈출을 하는 것에 불과하는 것과 인간의 몸이 식물로 된다는 것의 비현실성을 생각하면 이러한 이해는 극단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그저 비현실적이라 치부하기에는 그 판단이 이 소설이 내내 이야기한 인간중심적 사고의 폭력성과 이기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영혜가 식물을 꿈꿨는지, 그리고 이 인물을 중심에 두지 않고 타자의 시선에서 거리를 두고 영혜의 행동만 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식물의 영위 방법이 앞으로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일 수도 있는 셈이다. 이 방향의 실현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도 볼 수 없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이, 혹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후의 삶이 가능하게 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먼저 이뤄져야 할 것은 그동안 고착되어 온 인간중심적 사고의 변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고의 변환은 영혜처럼 몸으로, 행동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몸이 일으키는 변화는 말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본격적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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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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