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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비 Feb 27. 2022

[서평]거대한 변화를 일으킨 작은 희망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written by 채은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


 SF 소설은 다소 현실주의적인 나와는 친하지 않은 장르였다. 온갖 허구와 상상으로 가득 찬 글은 실용적이지 않아 다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은 SF 소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변화를 주었다. 이 소설에는 아포칼립스,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다소 현실감 없는 스토리가 등장하나, 작가는 이를 통해 현 시대에도 통용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희망’을 가지고 ‘변화’를 일으키는 다양한 인물들에 빠져들게 되었다. 과연 무엇이 그들에게 희망이 되었고 결국에 고난을 극복하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식물’이었다. 멸망 후 황폐해진 환경 속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준 것이 거대한 히어로도, 위대한 발명품도 아닌 ‘식물’이라는 점에서 꽤나 신선함을 느꼈다. 소설 속에서 식물은 어떻게 사람들의 희망이 되고 변화를 일으켰을까?     



 이 소설에서 멸망은 2050년대, ‘더스트 폴’이라는 초대형 재난으로 인해 발생한다. 재건 이후 시대 사람인 과학자 아영이 ‘모스바나’라는 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멸망 후 그 식물을 사용했던 나오미에게 찾아가고, 모스바나에 얽힌 멸망 시대로부터의 역사를 듣게 된다. 멸망 시대, 아마라-나오미 자매가 정착하게 된 ‘프림 빌리지’에서 희망의 상징이 된 것이 바로 온실과 모스바나였다. 마을 위쪽의 유리 온실에서는 사이보그 연구자인 레이첼이 더스트 저항성 식물인 모스바나를 재배해 마을을 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 온실에 희망을 걸며 각자의 일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모스바나는 자신의 생존과 직결된 구원자이며 마을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절대자였다.


 외부 위협이 잦아지면서 사람들이 온실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긴 했으나 모스바나를 향해서는 끝내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외부 습격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도 그들은 그 식물을 가지고 떠났기 때문이다. 프림 빌리지를 빠져 나가서 돔 밖을 레이첼의 식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 마을 사람들은 이 희망을 가지고 각자의 위치에서 식물을 심었다. 훗날 아영이 밝혀내기를, 그들이 각지에서 희망을 좆으며 식물을 재배했던 행위가 더스트 1차 감소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더스트 종식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식물은 인간과 동물에 뒤쳐져 큰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 속에서만큼은 엄청난 역할을 해낸다. 실제로 모스바나의 약효가 분명한지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 조용히 지구에 퍼지고 서서히 재난을 극복시키는 존재로 등장한다. 작가는 멸망이라는 큰 위기에서 대단하고 신파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소소하며 우리 주변에 늘 존재했던 것에서 답을 찾는다. 더스트는 오랜 시간에 걸쳐 감소되었으나 결국 모스바나가 가져온 결과를 통해 작은 존재가 가진 번식의 위대함 즉, 작은 것을 꾸준히 좆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나비 효과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나아가 꼭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도 꾸준히 희망을 좆는 자, 즉 프림 빌리지 사람들의 인내가 있었기에 변화도 일어날 수 있었다. 어쩌면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거대한 목표가 아닌 작은 습관을 통해 삶을 바꾸어나가는 ‘일상력’의 중요성 또는 작은 관심을 통해 변화해가는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주는 것 같다.     




 

뮤지컬 <하데스타운> , 한강 「채식주의자」





그런데 수많은 ‘작은 존재들’ 중에서 작가는 왜 하필 식물을 선택했을까? 식물을 주제로 한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며 나름의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선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나무’가 되어 꼿꼿이 세상과 다른 길을 걷고 싶어 했던 영혜가 떠올랐다. 영혜는 자연 훼손에 무감각해진 인간 사회를 벗어나 식물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 인물이다. 그녀의 지향과 같이 인간에 의해서 파괴된 지구에서 유일하게 희망이 될 수 있는 유토피아가 바로 식물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더스트 청정 지역인 프림 빌리지를 모스바나 식물이 가득한 공간으로 그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에서 희망으로 상징되는 ‘빨간 카네이션’도 떠올랐다. 낭만주의자인 오르페우스가 봄이 올 거라며 노래를 부를 때나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갈 때 그의 손에서 빨간 꽃이 피어난다. 모스바나와 유사하게 <하데스타운>에서도 식물이 희망으로 표현된다. 어쩌면 주로 꽃이 피기 시작하고 식물이 무성해지는 봄이 가진 생명력과 대부분의 식물이 모습을 감추는 겨울의 황폐함을 대조하며 식물을 생명의 상징으로 그린 것일 수도 있겠다. 식물이 재건을 통해 인류를 살릴 수 있는 생명 구원자로 표현된 것이다.     


 <지구 끝의 온실>은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한 여러 의미와 가치를 전달하는 SF 소설이다. 인간 사회를 구원하는 이상향을 식물로 표현한 점과 그 희망을 꾸준하게 믿고 가꾼 자들이 확실한 변화를 만들어 냈다는 메시지는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작가는 프림 빌리지 사람들의 행위가 가져온 나비효과를 통해 작지만 꾸준한 관심과 실천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흔히 주목받지 못하지만 결국 인류의 구원자를 식물로 설정함으로써 환경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성찰해보게 한다. 작품이 미래를 배경으로 쓰인 소설이지만 결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는 않음을 깨닫게 된 것 같다. SF 장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거나 보다 현실적인 SF 스토리를 추구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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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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