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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신 Jun 15. 2020

우리 역사로 바라본 우리 한식

질풍과 노도, 그 속에 담긴 우리 한식

옛날 우리나라의 모습ㆍ사진작가: 모름(Unknown)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집에 들어와서 쉬었던 농민.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한 끼를 먹고사는 신세. 가난하게 굶주리며 살아가던 농민들은 난리와 난리로 이어지는 그 험한 세상 세태 속에서 처량한 삶의 일상을 체념하듯 힘없고, 쓸쓸하고, 가슴 아픈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짐작 조차 할 수가 없다. 그렇듯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웠는지, 때때론 하늘만 바라보고 탄식을 뿜어내는 삶의 일상이 허다했다. 농민들에게는 어떠한 이념과 사상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오로지 하루를 살기 위해서 한 상 가득히 배 따습게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삶의 값진 가치는 없었다.

옛날 우리나라의 모습ㆍ사진작가: 모름(Unknown)

농민은 조선사람이지만 땅을 통한 수확은 조선사람의 손으로 가는 것이 많지 못했다. 개인으로는 일본 사람의 대지주가 다수에 달했고, 조선사람의 대지주가 있다고 하나 이들의 수는 날로 줄어만 가는 것이 연명이 멀지 않을 것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몇몇 부자 사람을 제하고 나면 조선사람은 똥 가래가 찢어지게 가난하였다. 그야말로 가랑이가 찢어지려 해도 힘줄이 걸려서 못 찢어지는 격이었다. '털 난 짐승이라야 쥐밖에 없고 곡식이라야 "콩팥"밖에 없고 밭이라야 공주한 밭밖에 없다.라는 말은 조선사람을 그대로 그리어 놓은 말이기도 하였다.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는 사상이 박혀 있던 조선사람은 농사밖에는 짓지 아니하였다. 우리 농촌은 좋은 쌀을 빼앗기고 농민들은 잡곡으로 연명했다.

옛날 우리나라의 모습ㆍ사진작가: 모름(Unknown)

어디로 갈꼬? 어떻게 살꼬? 대관절 조선사람은 어째서 가난했을까? 또 대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좌우익의 이데올로기는 어디까지인가? 어째서 그렇게 좌우익의 갈등이 심화되었을까? 우리나라에서의 좌우익 갈등은 땅에서 시작되었고, 땅으로 규결된다고 볼 수 있다. 땅이라고요? 조금 뜻밖이라고 생각이 들것이다. 이 땅의 문제는 멀게는 조선시대, 그리고 가깝게는 일제 침략에서부터 설명되어야 한다. 한반도의 식민지화에 착수한 일본이 제일 먼저 한 것은 8년간 토지 조사라는 것을 벌여 농민들의 땅을 약탈하였는데, 그 결과 농민의 8할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그들의 8할이 극심한 굶주림에 허덕여야 하는 전락 농가가 된 것이 식민지의 현실이었다. 그 와중에도 많은 지주들은 일본인들에게 협조하여 땅을 사들여 대지주가 되었는데, 그것이 이른바 친일 지주이다. 그들은 일본인 지주와 함께 농민들을 착취하며 식민 정치에 적극 협조해나갔다. 농민들은 수확량의 7할 이상을 지주에게 바쳐야 되는 현실 속에서 춘분기, 추분기의 악순환에 시달려야 했는데, 그런 비참이 집중된 것이 땅이 너른 삼남 지방이었고, 그중에서도 심했던 곳이 바로 전라도 지방이었다.

옛날 우리나라의 모습ㆍ사진작가: 모름(Unknown)

그러다 마침내 해방을 맞게 되었지만, 한반도 땅에 38선 기준으로 미국, 소련에 의해 점령된 남북 지역에 중요한 차이가 발생되기 시작하였다. 북한이 조선 왕조를 설계한 정도전의 이념을 반영한 무상 몰수·무상 분배의 토지 개혁을 단행한데 반하여, 남한에서는 자기 재산을 앉아서 뺏길 수 없다는 지주들의 강한 반발 속에서 농지 개혁은 자꾸 미뤄지고, 거기에 따른 작인들의 실망과 분노가 커지면서 지주와 소작인 간의 땅을 둘러싼 갈등이 심해지자 그 갈등의 틈새를 좌익이 파고들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무상 몰수·무상 분배는 자기 땅을 갖고 싶어 하고, 한 끼라도 굶주리지 않고, 배부르게 한 상 차려 먹을 수 있는 소작인들의 간절한 열망과 마음을 파고들기에 충분하였다. 그 결과 해방 이후 급변하는 한반도 땅에 많은 소작인들은 사상이 뭔지도 모른 채 좌익에 동조하거나 가담하게 되었다. 전라도 지방에서 많은 소작인들이 빨치산으로 불리어지며 지리산으로 입산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자신의 땅을 소작인과 협의 없이 알아서 처분하거나 염전을 만들어서 토지 분배에 제외되고자 했던 지주의 태도, 그리고 아무런 협의에 대한 설명과 이유도 듣지 못하고, 땅에 목숨을 붙이고 살아가던 소작인들은 땅을 잃게 되자, 분노가 극에 달하여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남한의 농지 개혁의 시작만을 기다리면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우선적으로 받고자 한 소작인들의 주인의식 마음이었다.

옛날 우리나라의 모습ㆍ사진작가: 모름(Unknown)

한반도 땅에 농지 개혁이라는 파장 속에서 좌익들은 지주들의 땅을 뺏어서 모두 작인들한테 골고루 나눠 주겠다고 말했다. 세상에 그렇게 기막힌 인심을 써주는 경우가 어디에 있으랴. 그 말에 싫어할 사람도 거부할 소작인들도 없었을 것이다. 살아생전에 땅을 가질 수 없다면, 저승에 가서라도 땅을 갖는 소원을 풀고 싶어 한 소작인들의 열망과 삶. 그러한 소작인의 소원이 이루어져 열 마지기 정도의 땅을 가지게 되어 농사를 지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런데 농사를 지어서 얻게 된 그 쌀을 나라에 내놓고 매달 배급을 타 먹는 것은 어떠했을까? 소작인들은 바로 미쳤다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자신이 지은 농사를 제 손으로 일구고, 한 상 가득히 배부르게 밥을 먹고사는 맛에 땅을 일구고 사는 것인데. 무엇하러 초친 맛에 나라 배급을 타서 먹으려 하겠는가? 그럼 이건 어떠했을까? 공동으로 농사를 짓고 정해진 배급을 타 먹는 것 말이다.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주인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땅에 누가 제대로 농사를 지으려 할까? 나의 텃밭의 배추가 주인집 텃밭 배추보다 속살이 더 잘 여문다는 이치의 이야기가 왜 나오겠는가. 좌익이 땅을 무상 몰수·무상 분배한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사상의 이론이었다. 남한에서 1949년 6월 21일 유상 몰수·유상 분배의 농지 개혁이 시행되자, 좌익에 대한 민심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무상 몰수·무상 분배를 선동한 좌익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옛날 우리나라의 모습ㆍ사진작가: 모름(Unknown)

그러한 사회적 급변과 역경을 겪는 과정 속에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서로 간의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밀고 밀리는 접전이 계속되면서 판문점에서는 지루한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있을쯤, 어느 접전 지역에서는 동족상잔의 표본적인 피해를 낳으며 원초적인 전쟁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놈의 세상이 어디 이치대로 되는 세상 이던가? 이렇듯 농민의 탐식은 연일 끊이질 않았다. 식구들과 작은 짐승들이 깃털을 품고 살아가듯이 등 따습게 배나 골치 않으면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자 했던 마음, 그것이 우리 땅을 일구며 살아가던 우리 농민의 마음과 모습이었다.

옛날 우리나라의 모습ㆍ사진작가: 모름(Unknown)

그러나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에 있나? 뿌리가 없는 나무는 결국 죽고 만다. 삶의 질풍과 노도(Sturm und Drang)를 외면하거나 피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은 삶의 질풍과 노도(Sturm und Drang)를 마주치게 된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거친 파도와 질풍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어서 보람된 삶과 가치 있는 삶을 찾고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있다. 그런즉, 땅을 통해 농사를 짓고 곡식을 수확하여 맛난 쌀로 한 상 가득히 밥 상을 차려 놓은 것이 우리 한식이 품고 있는 참된 질풍과 노도(Sturm und Drang)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역사, 우리의 땅, 우리의 농민, 우리 한식은 하나의 세월 속에서 서러운 추억의 현으로 가만가만 흔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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