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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 Jun 14. 2023

흔적

사진 산문집

낙지탕


어릴 적에도 어머니는 늙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나”라는 개체를 인지하기 시작하기 전부터 어머니는 늙어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다니던 학교-교도소 아님 진짜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교무실에서 동료 선생을 폭행하고 강제적으로 퇴임하게 돼버린 그날 이후로 미친 호전광에 어디서든 돈을 잃어주는 투전꾼이 되었다.-여담이지만 아버지가 자주 화투를 치던 집 앞 중국집 사장은 그 가게에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평생을 꽃 그려진 플라스틱 쪼가리 하나 놓지 못한 노름쟁이의 말로치고는 심플한 최후라 생각한다-


우리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엄마와 함께 거실에서 손을 잡고 잠을 잤는데 나는 어머니를 닮아 잠귀가 밝았다. 왕왕 아버지가 새벽까지 들어오지 않는 밤이면 어머니는 우리 몰래 일어나 조그맣게 기도하는 소리를 종종 듣곤 했다.

기도 내용이야 대부분 비슷했다. 아빠가 다치지 말고 누구 하나 다치게 하지 말고 들어오라는 내용의 기도였는데, 그걸 듣고 있으면


나는 누워 울었다. 왜 눈물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분노도 아니었고 안타까움도 아니었다.

그냥 기도하는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나왔다.


기도하며 아버지를 기다린 어머니는 밖에서 큰소리가 나면 혹여 아버지는 아닐까 하고 2층 창가에서 머리만 얌전히 내밀어 들여다보곤 하였고, 그렇게 새벽까지 마음을 졸이다가 아버지가 들어온 후에는 아침을 준비하였다. 아버지는 밥상에 국이 없으면 안 되는, 항상 탕 종류를 식탁에 올려 두어야 하는 특이 체질이었는데 자주 숙취 해소를 위한 낙지탕을 끓여 내놓곤 했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탕을 꼭 먹어야 하지 않았다.-나는 아직도 두족류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밥이 다 되면 어머니는 새벽에서야 들어온 아버지를, 특유의 술 냄새와 담배 냄새에 찌들다 못해 숨쉬기도 괴로운 아버지 방에 조심히 들어가 아버지를 달래듯 깨웠다. 아버지가 식탁에 앉으면 우리 가족은 조용했다. 각자 입맛에 맞는 반찬을 먹고 식사를 마친 순서대로 출근이나 등교 준비를 했다.

아버지는 과묵했고 다행히도 우리를 때리는 분은 아니었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아버지 비위를 건드리지 않아서 맞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지나온 유, 청소년기를 생각해 보면 그 특유의 술에 곯은 체취 냄새와 두족류만의 그 끈적끈적한 체액으로 범벅된 기분이다. 비루하고 냄새나고 가난한 삶, 그래도 나와 여동생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어머니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굉장히 진부한 이야기 형식이지만-어머니는 가난했지만 청렴했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와 동생에게 과자 사줄 여유가 되지 않아 직접 갈아서 만든 과일 쉐이크라던지 고구마 맛탕이나 감자튀김, 김치전이나 소면 등을 자주 해주었다.

그래도 나는 소시지가 제일 좋았다.


나와 여동생은 집에 있는 장난감이라고 해봤자 남들한테 받아온 것뿐이었지만 새 장난감을 사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어머니와 시장을 같이 보고 동네 완구점을 지나갈 때면 동생과 나는 가만가만 저건 무슨 장난감이고 저건 어느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인데 무슨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다 어머니가 “그만 집에 가자”고 부르면 조금만 더 구경하고 가겠다곤 했다.-근데 이건 또 이것대로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 같다. 한 번 정도는 사달라고 땡깡도 부려볼 걸 그랬나 싶은데…. -생각해 보니 떼쓰면 떼쓰는 대로 더 피곤했을 수도…-


중학교 때인가 아버지가 투전으로 집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어머니는 집에서 그림도 자주 그리시고 띠지 공예로 장신구나 소품 따위를 만들고는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했다. 집중해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고 그냥 좋았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멋진 사람, 따뜻하고 멋진 사람.


하지만 아버지가 투전으로 집을 잃은 이후 어머니는 기도하지 않는다.

더는 그림도 공예도 그리지도 만들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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