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드와 본질사이]

밀도와 궤적을 읽는 감각의 중요성

by 김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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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너무나 빠르게, 또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고정된 객체나 중심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고 생성되는 ‘사건(event)’ 중심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는 사물이나 현상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연속적이고 유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변화 중심의 관점은 하나의 위험도 안고 있다. 너무 흐름만을 쫓다 보면, 각 객체나 사건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밀도, 내면성, 절실함 같은 중요한 요소들이 잔상처럼 희미해질 수 있다. 모든 것을 ‘프로세스’로만 해석하고 정체성의 고정을 거부하면, 작품이 품고 있는 구체적 문맥이나 존재의 고통 같은 핵심들이 증발할 위험이 있다.


이처럼 움직임 중심의 사고는 분명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가능하게 하지만, 반대로 몇 가지 중요한 것을 놓치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억의 상실이 있다. 객체가 지닌 과거성이나 서사, 맥락은 '되기'의 흐름 속에서 쉽게 희미해질 수 있다. 또 하나는 윤리의 부재다.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무엇에 책임을 지고 무엇을 지켜야 할지조차 알기 어렵게 된다. 움직임만 있고 기준점이 없다면, 도덕적 좌표와 저항의 위치도 함께 미끄러지기 쉽다.


또한 해석의 무한 증식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본질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것이 해석 가능해지고, 결국 어떤 것도 확정되지 않은 채 해체만 반복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제기되어온 대표적인 비판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균형의 중요성이다. 우리는 분명 중심 없는 흐름 속에 살고 있지만, 그 흐름을 따라가되 그것이 남기는 ‘밀도’와 ‘궤적’을 읽어내는 감각이 필요하다. 시대의 변화는 흐름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빠르고 정확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가지 않게 하려면, 우리가 붙잡고 있어야 할 뿌리는 놓지 않아야 한다. 본질과 감각 사이의 균형,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감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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