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미술은 아날로그가 디지털을 닮아가고,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흉내내며 경계를 흐리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런 흐름의 배경에는 몇 가지 시대적 감각과 환경이 얽혀 있다.
우선, 디지털 이미지의 무한 복제성에 대한 피로감이 크다. 누구나 쉽게 만들어내고 퍼뜨릴 수 있는 이미지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진정성을 갈망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아날로그 특유의 질감과 손의 흔적, 시간의 흔적에 대한 동경이 깊어졌다. 그래서 디지털 환경 안에서도 이러한 ‘손맛’을 복원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또 디지털 세대조차 물질성과 감각적 접촉에 대한 관심을 가지며, 하이브리드 감각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모두 서로의 언어를 빌려 자신의 가능성을 넓히려는 것이다.
유통 환경의 변화도 이러한 흐름에 한몫하고 있다. 디지털 작업은 NFT 형태로 거래되고, 아날로그 작업은 디지털화되어 다시 플랫폼 안에서 유통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존 전략을 모색 중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아날로그는 실제 물감으로 픽셀 이미지를 구성하거나, 수작업 회화 안에 디지털 작업처럼 보이도록 ‘레이어’의 개념을 도입하기도 한다. 실크 스크린이나 도트 패턴 같은 인쇄의 효과를 붓으로 재현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반대로 디지털은 종이 질감이나 붓 터치를 흉내 내는 브러시 효과를 개발하고, 캘리그래피나 수작업 드로잉의 느낌을 살린 일러스트를 만들어낸다. 또한 조형성과 텍스처의 물성을 디지털 조각이나 3D 프린트로 구현하려는 시도도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결국 이 모든 흐름은 단순한 형식적 유희가 아니라, ‘원본’과 ‘실제’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본질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디지털은 손의 흔적을 욕망하고, 아날로그는 비물질적 효율을 흉내 낸다. 그리고 그 중간 지점에서 지금도 새로운 미술 언어가 조용히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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