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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떼 시민교육팀 Jan 31. 2023

복제의 정당성

엄격하게 구분하자면 모든 예술과 예술 행위는 동일하지 않다.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없는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말일 수 있다. 예술은 작품을 두고 예술의 행위자와 향유자 모두가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세계에 접근했는가에 따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비가역적 상황에 가깝다. 예술은 그 자체로 복제 불가능한 현존재성을 취한다.


그러나 예술은 복제에 대한 열망을 숨김없이 드러내 왔다. 주조(鑄造)나 인쇄 기술이 공격적일정도로 예술과 짝을 이루었던 배경에는 이 열망이 있었다. 자본을 만난 예술이 시장에 등장해 값으로 매겨지기 시작하면서 희소성과 독자성이 예술의 상품적 가치를 좌우하게 되었다는 의심은 극단적이지만 설득력이 있다(오죽하면 ‘대체 불가능한’ 디지털 예술이 등장했겠나). 그렇다 하더라도 예술과 예술 행위 자체의 유일성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제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문화예술교육을 바라본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문화예술교육은 새로운 교육 방법에 목마르다. 새로운 방법이 나쁜 것은 아니다. 관행의 문제를 발견했거나, 풀리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안을 찾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결이란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과 비례한다. 새로운 방법에만 집중하면 이것을 간과하게 된다.


커리큘럼이 문화예술교육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 핵심이 되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화예술교육에 접속하려는 예술가는 우선 어떤 커리큘럼을 만들지(창작의 연장으로) 떠올린다. 그런데 추상에 가까운 작업방식을 구체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치환해 시간별로 배치한 문서로 만드는 과정은 한계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예술과 예술행위를 한정된 매체로 전환할 때 발생하는 문제가 예술가가 문화예술교육 커리큘럼을 작성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안은 커리큘럼들은 서로 유일무이함을 두고 경쟁하기도 한다. 이는 지원사업에서 더 심해진다. 창의성 혹은 독창성이라는 심의 기준은 마치 관용구처럼 되어버려서 예술가가 어떤 생각을 문화예술교육으로 전환하려는 것인지 확인하는 장치로 기능하지 못한다. 문화예술교육이 말하는 창의성과 독창성이 일종의 ‘기표’임을 알아채면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은’ 혹은 ‘기존의 방식을 뛰어넘어’ 등의 표현으로 커리큘럼의 새로움을 드러내려고 애쓴다. ‘늘 하던 대로’ 라거나 ‘수년간 이어온 작업방식 그대로’라는 표현은 금기시된다. 마치 그것은 노력하지 않고 발전이 없다는 낙인을 스스로 찍는 것과 같기 때문인 것 같아서일까 싶기도 하다.


예술가의 전문성은 늘 하던 방식을 꾸준히 이어오거나, 수십 년간 자기 방식을 실험한 결실이 축적되며 형성된다. 그런데 이런 예술가들이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접속하기 위해 자신의 방식과 전혀 다른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면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의식조차 희석되어 버린다면 절망과 포기만 남을 뿐이겠지만, 다행히 끊임없이 이 문제에 공감하는 예술가와 문화예술교육 기획자가 등장하고 있다.


문화예술교육에 접속하는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교육으로 복제한다. 예술행위를 복제하고, 예술가의 태도를 복제하고, 감상과 향유의 순간을 복제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학습자가 모방하는 과정, 예술가가 복제하며 심어 둔 감각을 통해 복제의 끝에서 학습자의 창작 동기가 발현되는 것을 즐기고 기뻐한다. 문화예술교육자가 되려는 예술가는 성장을 위해 문화예술교육을 수없이 복제하는 축적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 이때 문화예술교육의 전문성이 꾸준히 자기 방식을 반복해온 결실에 대한 복제여야 한다는 점이 전제가 된다. 즉, 자기 방식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 커리큘럼을 만드는 데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일대다(一對多)의 교육환경, 이미 배정된 교육 시간, 비자발적인 참여, 예산 규모에 따른 재료선택과 시간 선택 등 이미 정해진 것이 많을수록 예술교육을 위한 작업의 융통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관행처럼 여겨지는 프레임 안에서는 예술가가 자기 방식을 복제하는 경험을 만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 예술가가 작업하는 방식과 거리가 생기기 시작하면 문화예술교육의 복제는 사라진다. 한 뼘만 강하게 표현하자면 복제가 아닌 ‘처리’에 가까워진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일대다의 교육환경을 벗어나거나, 불특정 학습자와의 첫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친밀하거나 평소 안면이 있는 사람을 학습자로 상정하거나, 자율성에 근거한 작업시간 설정을 교육 현장에서도 풀어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안에서 예술가의 작업을 교육으로 복제하기 시작한다면 복제 불가능한 예술과 예술행위의 현존재성이 문화예술교육에서도 본격적으로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탕 / 프로젝트 아티스트, 교육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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