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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미술관 속으로 13.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 -2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Austrian Gallery Belvedere)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들을 꼽으라면 대다수 클림트의 [키스]를 꼽을 것이다.

필자는 이 작품보다는 앞서 Part 1에서 언급한 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의 [생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을 더 높게 평가하지만 말이다.


Part 2에서는 빈 분리파의 당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화려하면서도 에로틱한 작품들과, 클림트를 사사한 19금 포르노그래피의 개척자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의 작품을 중심으로 랜선 투어를 준비하였다.


쉬-잇! 애들은 가라~!


1층에 내려와 올려다본 천장화는 꽤나 아름다웠다.


Prince Eugene as a new Apollo and leader of the Muses, 1723 - Carlo Carlone


이 궁전의 소유주가 누구인가. 그 이름도 유명한 외젠 공작(오이겐 공작) 아니겠는가.

태양의 신인 아폴로처럼 뮤즈들에 둘러싸여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Marble Hall


1층의 대리석 홀의 인테리어를 봐도 클림트가 이끌었던 유겐트양식(Jugendstil, 19세기~20세기 초의 장식미술)을 연상시키듯 금박 장식으로 화려하다.



자 본격적으로 작품 소개 들어갑니다.~

처음 보게 된 작품, 아.. 낯이 익다.


Portrait of a Woman, 1893 - Gustav Klimt (1862-1918)




이 여인은 2009년 예술의 전당, 클림트전에서 만난 적이 있다.

무려 10년 만의 재회라니! (한국 전시를 끝으로 클림트 작품의 해외 출장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있다.)


당시 포스트를 다시 읽어보니, 최대 관심 작품이었던 유디트(Judith)보다 더 인상 깊게 봤었나 보다.

이 작품에 대한 감상 편은 그때의 코멘트로 대신하고자 한다.



구스타프 클림트 역시 초창기 때는 귀족들의 초상화 그려주는 것으로 수입의 대부분을 벌어들였는데, 훗날 작품들과 비교하면 동일인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여인의 몸에 걸쳐진 금박 장신구들이 실제 그것인 양 어찌나 빛이 나던지. 발그레한 볼의 아름다운 귀부인이 당장에라도 액자에서 걸어 나올 것 같았다. 우측 위의 클림트의 사인도 독특했고.


마치 지인을 먼 길을 돌아 예서 다시 만난 듯 반가웠다.



홀 중앙에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두상이 자리하고 있다.

말러는 세기말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추앙받는 위치인 빈 슈타츠오퍼 감독을 맡아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써 명성을 날림과 동시에 후기 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이기도 했다.

세계 최고는 최고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당대 최고의 음악가를 오마주한 작품인 것이다! 멋져 부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눈을 돌린다.

기념 촬영을 위해 줄이 서 있다. (모나리자 정도까지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세상 모든 연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클림트의 [키스].


Kiss, 1907/08 - Gustav Klimt (1862-1918)


앞서 언급한 국내 전시회에서 구매한, 유일하게 집에 걸려 있는 작품이다. 마눌님께서 가장 애정 하시는 그림이기도.

필자는 클래식에 비해 미술 작품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당시 마눌님의 미니홈피 - 그땐 그런 게 있었다. -에 이 그림이 올라와 있어 알게 된 것이었고, 미술 작품 관람을 좋아하시어 같이 따라다니며 관람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렇게...


이 작품이 갖는 은유는 아마 다 알 것이다. 너무나 유명하기에.

표현방식만 짚고 넘어가자.


꽃이 만발한 벼랑 끝에 남녀가 키스를 나누고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몸을 내어맡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여성은 지그시 눈을 감고 그 절정의 순간을 기다린다.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개어지는 순간, 그 찰나를 화폭에 옮겼다.


클림트의 '황금 시기'는 1903년 이탈리아 Ravenna 지방을 여행하다가 접한 중세 비잔틴 양식의 종교화 모자이크에 - 금박의 장식적 사용 - 감명을 받아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이 작품을 통해 그 황금기는 절정에 이르고 있다.



남자는 서 있고 그의 특징은 각진 모양이며 옷의 장식품은 정사각형이다.
여자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드레스에 있는 꽃 모티브는 여성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클림트는 남녀를 황금빛 후광으로 둘러싸고 현실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의 "키스"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사랑의 상징이 된다.
얼굴과 손의 자연스러운 묘사와 황금색 배경 사이의 상호 작용은 그림을 보석처럼 빛나게 만든다.
-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 작품 해설 인용


이 작품 하나를 보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유럽에는 유능한 여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여성 문필가 조르주 상드, 인상주의 화파에 속했던 베르트 모리조, 음악에서는 클라라 슈만 등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예술 분야에서 여성들이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


당시 빈에서는 '알마 쉰들러'라는 한 바람둥이 여성이 등장해 지식층을 온갖 휘젓고 다녔다.

앞서 언급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본처였는데, 아내이기 전에 클림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과 연인 사이였다.

남편 말러가 세상을 떠나자 빈 분리파의 후예인 오스카 코코슈카와 염문을 뿌리는 등 당대 유명인들과 끊임없이 애정행각을 벌였다.

외양을 떠나 그녀는 건축, 문학, 미술, 음악 등 예술 전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그녀의 지적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작품 속 주인공은 남자가 아닌 여성이다.

[키스] 속의 여성도 알마 쉰들러처럼 모든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팜 파탈'로 묘사했다.

당시 남성 중심 사회에 점차 영향력을 넓혀가던 여성에 대한 불안감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어쩌랴. 그 치명적인 매력을 감당할 수 없음을.



그림 속의 여성이 누구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었는데, 클림트의 평생 그림자 역할을 했던 '에밀리 플뢰게(Emilie Flöge)'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클림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사후, 여기저기서 클림트의 친자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열네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구멍 숭숭 뚫린 옷을 입고 그림만 몰두하는 화가에게 당최 어떤 매력이 있길래 숱한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클림트도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피카소를 오마주 했던 것인가.


피카소와 로댕 그리고 클림트.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변덕스러운 여성관을 은폐하고자 했던 희대의 여성 편력자들이다.

위대한 예술가의 창작욕을 일깨우는 수단으로써 자유분방한 연애는 허용해 줘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신 분이라면, 그로 인해 더없이 훌륭한 명작들을 만든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시는 분이라면 생각을 고쳐잡수시기를.

이러한 과도한 여성 편력 없이도 후대가 높이 평가하는 위대한 문화 사조를 창조한 이들이 (매우) 많았음을 생각하신다면.


클림트 덕분에 처음으로 오스트리아 회화가 국제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의 유명세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뒷배가 있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의 계승자인 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실레의 경우를 제외하면 많은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으며,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과 같은 자국 화가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비평가 프랭크 휘트포드(Frank Whiteford)는 클림트에게 이렇게 냉혹한 평가를 했다.


미술사에서 클림트의 영향은 한정적이었고, 그를 추종하는 유파도 없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와 유사한 화가는 없었다. 그러니 20세기 회화에서 그의 영향은 무시해도 될 정도다.


단지 변혁적인 새로운 미술 사조를 만들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화가의 위대함을 평가할 순 없을 것이다.

빈 분리파 화가들은 그 작품들의 외설성과 폭력성으로 인해 미술 세계에 던져준 파장이 컸기에 우리가 위대함과 동일시하여 혼동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독자 판단에 맡긴다.


그가 사망한 1918년, 공교롭게도 오스트리아 왕국은 해체되고 공화정이 들어서고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작은 국가로 분리되었다.


멋지게 포즈를 취하라고 했는데, 자세가 왜 그러니?


사랑하는 내 아들, 주니야. 너와 함께 빈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이 그림 봤다는 것 잊지 말거라.



클림트의 다음 작품을 보자.


Sonja Knips, 1897/98 - Gustav Klimt (1862-1918)


[소니아 닙스의 초상]. 전매특허인 금박 장식이 사용되지 않은 그의 '황금시대' 이전 작품.

빈 미술사 박물관의 천장화를 그렸듯 클림트의 회화 솜씨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철학]으로 대상을 수상하며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됨.

인물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인상적이다.


모델은 의자 가장자리에 앉아 약간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화가에 집중하고 있다.

여인의 얼굴은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세밀하게 묘사한 반면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다소 흐릿하게 표현했다.

이렇듯 지적인 모습 물씬 풍기는 사교계의 부유한 상류층 여성으로부터의 열렬한 구애는 바로 이 초상화 그릴 즈음부터 시작되었으니..


그림 속 여인, 소니아 닙스(Sonja Knips)가 결혼하기 전부터 클림트는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녀는 이 초상화 외에도 후술할 클림트의 [Adam and Eve, 1901]을 소유한 여인이기도 했다. (그의 후손들은 그 둘이 연인 사이였다고 주장.)

그림에 포인트를 주기 위해 넣은 것으로 보이는 붉은색 스케치북, 그것도 벨베데레 갤러리에 남아있다.

그 스케치북에는 클림트가 즉흥적으로 떠올렸던 아이디어 - Judith 1, Philosophy 등 -에 대한 스케치가 포함돼 있다.

이 빨간 스케치북은 꽤 많았다고 하는데, 1945년 에밀리 플뢰게가 살던 아파트의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한다.


Fritza Riedler, 1906 - Gustav Klimt (1862-1918)


[프리차 폰 리들러의 초상]. 작품 속 여인 역시 클림트의 부유한 고객 중 한 명 이었다.

의자에 앉은 여인의 얼굴은 다소 창백하지만 침착하고 위엄이 느껴진다. 그녀는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고 있다.

여인이 앉아 있는 소파는 물결 모양과 고대 이집트의 눈 모양의 기하학적 패턴으로 작품에 장식미를 더하고 있다.

앞선 그림에 비해 화면의 '평면화'가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하학적 패턴과 평면화가 클림트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특징이다.


이 고객 역시 상류층 여인이었다. 클림트는 그녀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마치 후광과 같은 효과를 내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그녀의 머리 뒤에 배치했다.

빈 미술사 박물관의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1599-1660)가 그린 [Infant Maria Teresa]의 자세와 머리모양을 차용했다고 전해진다.


개화한 양귀비꽃이 만발한 초원, 1907 - Gustav Klimt (1862-1918)


그의 화려한 금박 장식 그림은 온데간데없고, 활짝 핀 양귀비꽃들과 나무로 화면이 가득 차 있다.

햇빛도 그림자도 없고 화면은 붉은 양귀비꽃으로 뒤덮여 마치 태피스트리처럼 보인다.

프랑스 인상주의로부터 영감을 받았는데, 인상주의의 일시적이고도 순간적인 대상의 묘사가 아니라 조화롭게 어우러진 자연의 모습을 평면 속에 담담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의 '황금기', 에로티시즘 회화와 동시기에 제작된 풍경화로 일반 풍경화와는 사뭇 다르다.

정사각형 프레임에 빛은 일체 찾아볼 수 없고, 화면 가득 풍경만 보인다.

수평선은 화면 맨 위에 보일락 말락 위치하고 있어 좀 답답하다.

특별한 주제를 고민하고 그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양귀비꽃이 점점이 찍혀 있는 것이 그가 추구했던 금박 패턴과 일치한다.


클림트는 1900년도부터 여름휴가를 휴양지인 오스트리아 아터제(Attersee)에서 보내게 되는데 그때 그린 그림이다.

이곳은 클림트의 풍경화 46점에 등장하는 장소로, '구스타프 클림트 센터'가 위치하고 있어 그의 초기 습작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다음은 그의 풍경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해바라기 풍경화다.


해바라기가 있는 시골 정원, 1907 - Gustav Klimt (1862-1918)


이 작품은 한 해전, 빈에서 '반 고흐 특별전'이 개최되었고 거기서 봤던 고흐의 [해바라기]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붉은 양귀비꽃을 비롯해 정원의 다양한 색깔의 꽃이 반점처럼 표현돼 있고, 중앙에 노란 해바라기 꽃이 보인다.

생명력이나 생동감은 느껴지지 않고 다분히 정적이다.


반 고흐가 해바라기의 잎사귀나 줄기보다 해바라기 꽃 자체의 태양 같은 에너지에 주목했다면, 클림트는 해바라기가 주는 전체적인 형태와 색채가 주는 아름다움에 취했다.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잎사귀를 유난히 집중적으로 그렸는데, 아마도 클림트식 풍경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녹색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무수히 많은 작은 꽃들의 반짝거림 속에 서 있는 해바라기는 그 자체로 자연에 녹아 있는 것 같다.
-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2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영원한 꽃의 예술가"라는 명성을 잘 보여준다.

싱그러운 초록색 배경에 해바라기와 달리아, 금잔화, 과꽃 등 화사한 꽃의 바다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풍경화를 그릴 때 오페라글라스, 뷰파인더 등을 가지고 가서 오페라글라스로 줌인하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평면성을 캔버스에 옮기는 실험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풍경화 속에는 원근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평면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다.


Sunflower, 1907/08 - Gustav Klimt (1862-1918)


위의 그림과 비슷한 느낌의 작품.

다만 해바라기가 주인공으로 더욱 부각돼 있다.

햇볕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대상의 형태와 색채에만 주목했다.

소담스러운 작고 예쁜 꽃들이 해바라기 하단 부위를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해바라기가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가? 빈 분리파 작품에 대한 어느 평론가는 '사랑에 빠진 요정'을 보았다고 평가했다.

어떤 사람들은 클림트의 뮤즈이자 패션 디자이너인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여름이면 클림트는 그녀와 늘 오스트리아 아터제 호수(Lake Attersee)에서 휴양을 보내며 여러 풍경화를 그렸다.


다음 작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클림트의 작품이다.


Adam and Eve, 1916/19 - Gustav Klimt (1862-1918)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에서 감상했던 클림트의 마지막 작품이자 클림트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이브의 오른팔 주변의 채색이 덜 된 것이 보이듯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다.


[키스]와 마찬가지로 이브가 당당한 주인공이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꼬고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끄러움이란 모른다. 아담은 그저 병풍~ 이브의 하얀 살결과 아담의 구릿빛 육체미가 명암대비 효과를 만들어낸다.

특히 클림트는 이브의 몸에 극진히 신경을 썼다. 그녀의 통통한 몸에 정맥혈관이 보이는 것처럼 생생한 톤으로 묘사하였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감과 순수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역시 팜파탈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에 반해 아담의 모습은 뒷배경과 구분되지도 않고 - 있는 듯 없는 듯 -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성서의 아담의 모습처럼.


클림트의 작품 세계에서 성서(Bible)를 다룬 적은 거의 없다.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죄를 지어 타락한 이후의 모습이 아니라 타락 이전의 행복한 이브의 모습을 그렸다.

이브의 발 언저리에 화사하게 피어난 아네모네는 다산의 상징이며, 아담을 덮고 있는 표범 가죽은 고대 그리스에서 거칠고 억제되지 않은 욕망을 나타낸다.

이브를 통해서 인류 타락의 근원이 시작이 되었고, 아네모네가 피어오르듯 다음 세대로 끊임없이 재생산됨을 내포하는 듯하다.

한편, 인류의 어머니인 이브는 순수한 아기처럼 호기심을 쫓는, 기대감으로 가득한 여인으로 관객을 바라본다.




다음에 소개할 그림은 퇴폐 미술의 본좌, 19금 미술을 창조한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의 작품들이다.

에곤 실레의 작품을 두고 예술이냐? 외설이냐? 논쟁이 많다.


오늘 소개할 작품들은 그나마 강도가 약한 수준의 그림들만 가져왔는데, 필자는 그의 그림은 외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미술사학자이자 세상에서 가장 권위있는 서양미술사를 소개한 책을 지은 저자인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ans Gombrich, 1909-2001, 오스트리아 빈 태생)의 [서양미술사-총 637페이지] 첫 페이지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
아름다운 것에 대한 문제는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냐에 관한 취향과 기준이 그처럼 다르다는 데 있다.
- 서양미술사, E.H. 곰브리치


그렇다. 미(美)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미술가들이 살던 시대상이 각각 다르고,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며, 그 작품을 만들 때의 명확한 목적이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상자는 자신의 선호에 맞춰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가가 처한 환경을 이해하고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하지만 이게 쉽지가 않은 것이다. 그 정도 수준의 '보는 눈'을 갖춘다는 것이.


처음 소개할 그림은 초상화이다.


Eduard Kosmack, 1910 - Egon Schiele (1890-1918)


웬 깡마른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본다. 퀭한 눈으로. 뼈마디가 튀어나온 양손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뭔가 불안한 얼굴을 하고있다.

회색 배경에 어둡고 칙칙한 톤 일색으로 모델을 그렸다.

빈 분리파 회원으로 클림트의 '평면성'에 영향을 받아 그림자도 없고 다분히 평면적으로 묘사했다. 그러고 보니 캔버스도 정사각형.


에곤 실레 그림의 특징은 강한 선과 인물의 표정이다.

풍경화든, 초상화든. 이러한 방법을 통해 내면의 감정을 분출했던 것이다. 표현주의 화가답게.


Hauswand (Fenster), 1914 - Egon Schiele (1890-1918)


[창문들이 있는 건물 정면]이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그의 어두운 그림과 비교하면 밝은 색조가 눈에 들어온다. 빨간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으니.

그러나 기와를 저렇게 그려 넣은 것을 보면 그의 정신 상태가 뭔가 불안해 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인가.

심리 검사 테스트에서 무언가 대상을 깨알같이 겹쳐서 묘사하는 경우 그 사람이 가진 마음의 걱정거리를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레의 마음속에 쌓여있는 불안과 공포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아버지는 매독으로 사망했고, 이런 연유로 어린 시절 그의 머릿속은 '성'에 대한 강박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클림트가 소개해 준 열일곱 '발리 노이칠'과 작은 시골마을에서 동거할 때 그린 그림이다.

창문과 기와를 직사각형 패턴으로 그려 장식 효과를 주었다. 클림트의 풍경화처럼 지평선이 없고 관심 있는 대상만 화면에 담았다.

그나마 그림 아래에 좁다란 길을 그려 넣어 공간감을 준다. 이마저 없었다면 2차원 평면이었을게다.


Four Trees, 1917 - Egon Schiele (1890-1918)


실레의 풍경화에서도 평면성을 엿볼 수 있다.

산이 중첩되어 있고 그 너머에는 붉은 노을이 지고 있다. 하늘엔 회색빛 구름이 층층 져있구나.

생뚱맞게 전면에 네 그루의 나무가 - 잎이 물든 것을 보니 가을이다. - 노을 진 풍경을 지배하고 있다.

원근법은 철저히 파괴했다. 세상에 나무가 산보다 더 크다니.


화가는 가을 저녁 풍경을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그림과 Romanticism에서 차용했다고 전해진다.

전면의 나무 네 그루는 덩그러니 배경에서 분리돼 있고 그래서 격리돼 있다.

자신의 우울한 삶에 대한 상념, 실레의 고독과 불안감이 풍경화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하다.




다음은 실레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죽음과 소녀]이다.


'죽음과 소녀'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예술가들이 차용하던 레퍼토리였다.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현악4중주의 최고봉으로 인정하는 '알반 베르크 4중주단(Alban Berg Quartett)'의 연주로 들어보자.

실레의 작품을 감상하는데 더한층 몰입도를 배가할 것이다.

* 알반 베르크(Alban Maria Johannes Berg, 1885-1935)는 빈 태생으로 쇤베르크, 안톤 베베른과 함께 세기말 음악계를 뒤흔들었던 신 빈학파의 멤버중 한 명이다.



Franz Schubert - String Quartet No. 14 in D minor (Death and the Maiden) - I. Allegro - Alban Berg Quartett

https://www.youtube.com/watch?v=nAVzHdkDb94&t=2s


앞서 언급한 열일곱 살의 소녀, 발리 노이칠(Wally Neuzil, 일명 '발리')과 4년간의 동거를 마치고 새로운 여인 - 부르주아 집안 출신의 - 에디트(Edith Harms)를 만나 결혼한 시기에 그린 그림이다.


Death and the Maiden, 1915 - Egon Schiele (1890-1918)


수도승의 옷을 입은 남자는 실레 자신이고 뼈만 남은 앙상한 팔로 감싸 안은 여인은 발리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창조성이 극대화된 시기는 그녀와 지냈던 시간이었다.

발리는 온전히 실레만을 위해 모델이 되어주고, 실레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고, 수치심을 느낄만한 포즈를 거리낌 없이 취하던, 모든 것을 퍼주던 여인이었다.

실레는 발리에게 일말의 미안한 감정이 남아있어서였을까.


여인이 적극적으로 남자를 감싸 안으며 매달리고 있는데 그녀의 팔은 끊어질 듯 가느다랗다.

발리와의 앞날을 예견해서일까. 자신에게 매달린 그녀를 바라보는 실레의 눈은 공허하다!

화가가 보여주는 두 남녀의 불안정한 자세, 그 깨지기 쉬운 균형은 어느 순간에 깨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실레가 발리와의 이별을 고통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두 남녀의 슬픈 운명을 암시하듯 배경도 어두컴컴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다.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의 감정도 썩 유쾌하지는 않은 듯하다.

발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간호병으로 근무하다가 나이 스물셋이 되던 해 성홍열로 사망한다.


우측의 그림은 실레의 [포옹, 1917년작]


실레의 [죽음과 소녀] 옆에 이와 대비되는 작품 [포옹]이 나란히 걸려있다.

앞선 작품과는 달리 남성이 더 적극적이다. 구릿빛 근육질 피부는 희고 보드라운 여성의 살결과 대비된다.

하얀 시트를 깔아놓고 남녀가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다.

남성은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고 있고, 여성의 음부는 살짝 드러나 있다.


실레는 이러한 작품을 그릴 때 사다리에 올라가서 모델에게 포즈를 취하게 하고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통상 작은 노트에 스케치한 후에 이를 커다란 캔버스에 옮기는 방식으로 진행)


실레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불안한 묘사와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에서 노골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에로티시즘으로 끊임없이 도발한다.
죽기 1년 전, 화가는 에로틱한 힘에 대한 영원한 미스터리를 다시 한번 탐구한다. 남성과 여성은 완전히 서로에게 빠져 있다.
바닥의 구겨진 천은 이 만남의 강렬함을 강조한다. 그 옆에는 묘하게 긴장된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으며, 두 사람이 끌어안는 포옹은 뭉클한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정서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린 이 그림은 단단한 윤곽선과 강한 붓놀림을 통해 Schiele의 운명을 반영한다.
-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 작품 해설에 덧붙임



위 두 작품이 내뿜는 기운이 너무 좋지 않아 잠시 보고는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이에게 보여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다음 그림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물론 배경은 어둡고 칙칙하긴 마찬가지지만.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Edith Schiele, 1917 - Egon Schiele (1890-1918)


[앉아있는 에디트 실레의 초상화]이다.

실레가 자신의 부인을 그린 것으로 격정적인 누드화 속의 주인공이 아닌 정숙한 여인의 느낌이 풍겨난다.

결혼한 지 3년 후에 그린 부인의 초상화로 표현주의 화가답게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의 아내를 그렸다.

하지만 예의 실레의 강렬한 선은 찾아볼 수가 없다. 발리를 통해서만 이 그의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 발현될 수 있었던 것일 것이다.


이 작품은 미술관에 전시 허가를 받은 그의 첫 작품으로 1918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전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주립 미술관(Austria State Gallery) 관장은 여인의 옷이 너무 다채롭다고 하여 실레는 이렇듯 차분한 파란색으로 덧칠했던 비하인드스토리가 있다.

100년이 지난 2018년에 과학적 기법을 동원하여 색채 등의 복원 작업을 통해 원작을 복제하였고 이곳에 보관하고 있다.


채색을 복원한 원작, 2018


마지막으로 소개할 에곤 실레의 작품은 [가족]이다.

1918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할 당시에는 '웅크리고 앉은 부부'라는 타이틀로 올려졌다가 그의 사후, 미술 평론가가 이 제목을 붙였다.


The family, 1918 - Egon Schiele (1890-1918)


이 작품은 실레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이자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마지막에 그린 그림이 가족이라는 부분에서 애틋한 마음이 드는구나..

그가 꿈꾸었던 가족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을까.. 잠시 그의 불우한 삶이 머리를 스치운다.


여성은 아이를 다리품에 보호하고 있고 아이는 엄마의 다리를 부여잡고 있다. 그 뒤로는 (팔이 상당히 긴) 남성이 여성과 아이를 감싸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입지 않은 가족의 원초적인 모습. 가족끼리는 숨길 것도 없는 관계이므로 누드가 적합하다고 볼 수 있겠다.


남성의 얼굴은 실레 본인의 얼굴이다. 여성은 에디트를 그렸다.

그녀의 부드러운 곡선은 남성의 우락부락한 선묘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세 사람의 시선이 제 각각이다.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그림 전체에 드리워져 있다. 뒷 배경은 여전히 어둡고 스산하기만 하다.


실레는 앞날을 예견한 것일까.

1918년 실레의 아내 에디트는 실레의 아이를 임신한 채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한다. 아내가 떠나고 3일 후에 그 역시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클림트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미술을 이끌 것이라 했던 기대주는 그렇게 광기 어린 스물여덟의 삶을 살다 홀연히 떠났다.

그의 스승이 눈을 감았던 같은 해에 말이다.



실레의 작품은 감상자에게 많은 '실례'를 범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성'과 '성욕'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작품들의 경우는 그의 정신병력적인 성 도착증에 기인한 바 크다.

클림트가 소개해 준 열일곱 살짜리 소녀와 동거를 하면서 그녀의 옷을 벗겨놓고 그림을 그렸으며, 성행위를 하게끔 하고, 미성년자를 유괴해서 노골적인 그림을 그린 혐의로 고발돼 철창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미에 대한 기준이 없다고 하였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으로서의 도덕감정이 없는 화가의 작품을 우리가 예술이라고 칭할 수 있는가? 그것도 미성년자를 누드로 그린 작품을 높게 평가한다고?

필자가 신앙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작품은 외설에 다름 아니다.

후대 사람들이 그의 불우한 삶 속에서 채 꽃피우지 못한 천재의 광기라는 미사여구로 포장해놓은 것일 뿐. (너무 독설인가.)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에서 소개할 마지막 작품, 빈 분리파의 핵심 멤버였던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의 그림.

클림트와 실레의 작품을 깊게 탐구해 봤으므로 여기서는 가볍게 터치하고자 한다.


The Painter Carl Moll, 1913 - Oskar Kokoschka (1886-1980)


모델의 주인공은 세기말 빈 예술계의 거인이자 수년에 걸쳐 전시회 주최를 주도했던 사람, Carl Moll이다.

1897년 빈 분리파가 창립할 때 공동 창립자이기도 했으며, 오스카 코코슈카가 잠시 비밀 연예를 했던 '알마 말러'의 계부이기도 했다! (이렇듯 알마 말러의 주위에는 예술계의 거장들이 차고 넘쳤다.)


Carl Moll 이 52세 일 때 그린 것으로 그는 안락의자에 앉아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생기 있는 붓놀림으로 인해 모델은 차분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활기차다.

어두운 배경과 인물의 역동적인 붓놀림에서 엘 그레코(El Greco)의 영향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1층 갤러리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과 스승이었던 그보다 더 노골적으로 성애를 묘사한 에곤 실레의 작품이 어우러진 현장이었다.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은 과하지 않아 부담이 없지만, 실레의 그림들은 너무도 강렬하고 어두운 분위기 일색이라 홀 전체를 압도하는 느낌이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고 느끼셨을지 궁금하다.


필자에게는 소중한 아이와 함께한 관람이어서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에 대한 추억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들아! 후일 이곳에 다시 오게 되면 아빠의 글 참고해서 작품 감상하길 바란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거란다.


이것으로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 - Part 2를 마친다. 

다들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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