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Austrian Gallery Belvedere)에 도착하였다.
벨베데레 상궁(Oberes Belvedere)에서 그 작품이 필자를 기다리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쭉 봐왔던 걸작.
독자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그 그림 아니거든요. ㅎ
들뜬 기대감 한가득 품고 미술관으로 향한다.
벽에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의 배치도가 그려져있다.
입장료 (성인 16€)를 지불하고 갤러리가 위치한 상궁으로 향한다.
이날 날씨는 환상 그 자체였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이 유럽 왕가에 불어넣은 바람이 있었으니, 스페인, 오스트리아, 독일의 작은 공국들도 그들 나름대로 베르사유 궁전과 같은 건물을 가지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1700년을 전후한 바로크(Baroque) 시대는 건축에 있어 가장 화려하고 위대한 시기였다. 비단 건축과 미술에만 반영된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하나의 무대처럼 활용되었다.
이 가운데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바로크를 가장 대담하고 일관성 있게 도입된 나라가 오스트리아라 할 수 있다.
정면 페디먼트(Pediment)의 윤관석은 바로 떨어지지 않고 바로크 양식의 시현처럼 한 번씩 틀면서 떨어진다.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과장한 치장을 하였다는 말.)
건축가 힐데브란트(Lucas von Hildebrandt, 1668-1745)의 플랜하, 바로크양식에 충실하게 화려함에 화려함을 더했다.
지붕에 쭉 도열한 인물 석상들, 외벽에 덕지덕지 붙은 부조들, 그리고 창문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장식물로 치장하였다.
상궁은 총 7개의 부분으로 마치 레고 블록처럼 조립돼 있는데, 이처럼 복잡하게 보여도 먼 거리에서 보면 궁의 전체적인 윤곽선은 또렷하다.
상궁 앞에는 프랑스식 정원이 펼쳐져 있다.
벨베데레 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다.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 갤러리 홀이다.(Groud Floor, 0층)
작품 감상하기에 앞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궁전 입구의 계단과 홀.
천정의 화려한 무늬와 기둥을 떠받치는 서 있는 화려한 대리석 조각들. 모두 힐데브란트가 설계한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환상적인 장식의 효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건물 안에 들어설 때이다. 우리는 이 실내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눈앞에 그려보지 않고는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다.
향연이나 연회가 베풀어질 때 등불들이 켜지고 그 당시의 화려하고 품위 있는 유행하는 옷차림을 한 남녀들이 도착해서 이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러한 순간 당시 어둡고 불빛 하나 없으며 불결하고 악취가 진동하는 거리와
귀족들의 이 휘황찬란한 거처 간의 대조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서양미술사 - E.H.곰브리치
귀족들은 이런 화려한 궁전에서 일반 서민들의 애환 따위는 집어치우고 오로지 그들만의 오락을 위해 연회를 열고 춤추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오스트리아 왕정의 몰락과 함께 공화정이 들어서고 벨베데레 궁전도 비로소 시민들에게 개방되게 된다.
1955년 5월, 이 장소는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 서명이 이루어져 모든 영토를 반환하고 단일 국가가 됨과 동시에 중립국이 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
Austrian Gallery Belvedere
벨베데레 궁전 컬렉션은 8세기에 걸친 작품 수천 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은 수집 작품들을 새롭게 전시함으로써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오스트리아 예술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1층에는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품들과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비더마이어*의 작품들이, 2층에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815-1848년까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나타난 서민적 양식
오스트리아 화가들 외에 장 프랑수아 밀레, 카미유 피사로,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낭만주의에서 인상주의에 이르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과, 에드바르트 뭉크 등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표현주의 작품들까지 다양한 컬렉션을 자랑한다.
- 벨베데레 팸플릿 +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2 인용
Upper Belvedere Floor Info
- www.Belvedere.at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은 0층(Ground)부터 2층까지 3개 층에 걸쳐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2022. 3월 기준)
> 홈페이지 : https://www.belvedere.at/en
- 0층 : 벨베데레 역사, 중세 미술
- 1층 : 1900년 빈 미술, 클림트 [Kiss], 낭만주의/비더마이어, 신고전주의, 바로크 미술
- 2층 : 기획 전시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은 수시로 기획 전시가 열린다. 필자가 방문했던 시기와 현재를 비교하면 층별 컬렉션 위치가 조금 변경되었다.
기존 작품들도 수시로 전시 위치가 바뀌니 방문 전 벨베데레 미술관 홈페이지를 참고하도록 하자.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에서 처음 만나는 작품은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의 작품이다.
르누아르가 인상주의에서 발을 떼 다시 고전적인 방식으로 인물을 묘사한 것이다.
막 목욕을 끝내고 나온 여인의 모습이다. 같은 Theme로 여러 습작과 작품을 남겼다.
인상주의의 빛이 결국은 사람을 향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인물화로 방향을 틀어 인상주의와는 다른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아직은 인상주의 화풍의 요소 - 빛에 반사된 흐릿한 대상을 표현 - 는 남아 있다.
(그림에 비친 창문은 벨베데레 궁의 창문이니 오해 마시길.)
좌측의 작품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초상화 작품이고 우측의 여인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초상화이다.
모네는 초상화를 많이 그리지 않았다.
[The Chef, 1882]는 모네가 두 달 동안 노르망디(Normandy)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할 적에 묵었던 호텔의 소유주이자 Chef였던 Paul Antoine Graff를 그린 것이다. 머무는 동안 그의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감사의 표시로 그림을 그린 것 같다.
파스텔을 이용해 미묘하게 음영을 표시한 것이 눈에 띈다.
모네(Claude Monet)가 자신이 직접 가꾼 정원 산책길을 그린 것이다.
늦여름, 내리쬐는 햇볕에 길가에 심어놓은 꽃들이 반짝이고, 좁은 오솔길에 깔아놓은 모래가 밝게 빛난다.
1883년 봄, 모네는 파리 북서쪽의 지베르니(Giverny)로 이사하고 자신만의 Paradise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림에서 보이는 오솔길은 정원에 자리한 집 정문으로 향한 길이다.
양쪽에 과꽃, 다알리아들이 줄지어 피어 있고 머리 위로는 나무들이 아치 형태의 통로를 만들고 있다.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색조를 세심하게 Gradation으로 포착하였다.
모네는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빛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끝없이 관찰하고 여러 작품을 그리다 세상을 떠났다.
화면 안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낙타가 보이고, 모스크와 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동의 사막에서 상인들의 장이 열린 것 같다.
왁자지껄한 시장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전달된다. 마치 사진처럼 말이다.
화가는 비엔나 동양회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자신만의 그림 소재를 찾으려고 이집트를 무려 아홉 번이나 여행했다.
이 광경을 현장에서 그릴 수 없었을 테니 드로잉을 한 다음 그의 작업실로 가져와 완성하였다.
비엔나 북서쪽의 어느 기차역을 그린 광경이다.
역사 플랫폼에는 방금 정차한 기차가 연기를 내뿜고 있고, 열차에서 하차한 사람들과 마중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18년 파리 여행 중, 아침 일찍 일어나 모네의 [생 라자르 역]의 현장을 보러 생 라자르 역까지 찾아갔던 기억이 오버랩되는 순간!
과거 기차역 승강장은 계급의 경계가 잠시나마 사라지는 공간이었다.
귀족들이 신문팔이 소년과 함께 있고, 공장 주인은 노동자와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는.
왁자지껄도 잠시, 승객이 열차에 탑승하는 순간,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원래의 계급 사회로 되돌아간다.
다음은 19세기 전반, 빈 중산층의 취향을 반영한 비더마이어 양식의 화가, 페르디난트 게오르그 발트뮐러(Ferdinand Georg Waldmüller)의 작품이다.
알베르티나(Albertina)에서 만났던 오스트리아 화가의 그림이다.
여인의 옷의 주름 표현 등을 보면 역시나 사실적이다.
19세기 전반에는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중산층이 정치, 문화적으로 전면에 부상하고 있었고 이들의 그림 주문이 많았다.
따라서 서민들의 생활상을 담은 소박한 그림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비더마이어 시대(Biedermaierzeit, 1815-1848)는 나폴레옹이 집권하던 이전 시대로 회귀하고자 하는 이른바 '왕정복고'시대로도 불렸다.
비더마이어 풍의 회화는 역사적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중간쯤에 위치하여, 낭만주의 회화의 주관적인 상징 기법에 반발하며, 사실성을 그 중심에 두고 소시민들의 삶을 감상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작품에는 [장미로 여신을 장식하고 있는 소녀]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다.
소녀는 의자에 무릎을 지탱한 채 나무집 안에 있는 작은 인형에 흰 장미를 꽂고 있다.
높고 푸른 산으로 둘러싸인 지대에서 어찌 보면 미신과도 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
화가는 시골 사람들의 생활을 주제로 풍경화를 그렸으며,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소녀의 행위를 통해 당시 미신이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낭만주의의 기수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정물화도 선보이고 있다.
그 역시, 일순간 아름다움을 발산하고는 이내 시들어 떨어지는 한 떨기 꽃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유한한 삶, 덧없음을 말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관람 중에 내려다본 벨베데레 정원(Belvedere Garten). 좌우대칭의 전형적인 프랑스식 정원을 보여준다. (자연미 제로라 별로다.)
다음 작품은 가운데 노란 가운의 의학교수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료 시술 과정을 설명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1867년 테오도르 빌로쓰라는 의사는 빈 종합병원에서 가장 뛰어난 선생님이자 Researcher였다.
화가는 흉부 수술(Abdominal Surgery)의 선구자였으며 수술 시행 과정을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다.
실제, 19세기 후반 빈 의학 대학은 유럽에서 의학 분야에서 선도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1900년에 이르러서야 여학생이 의학 분야에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강의실의 학생들을 보니 다 남자 같구나.)
오 엊그제 본 빈 성 스테판 대성당(St.Stephen's Cathedral)이다. 현재의 모습과 그림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다.
세부적인 묘사가 인상적이다.
다음 그림은 위에서 언급한 비더마이어풍의 또 다른 그림.
오스트리아 중산층의 평범한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마치 그 시절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관객들에게 보여주듯이.
아이들은 Corpus Christi 축제를 맞이해 옷을 차려입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지는 않다. 참석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
이 시절 의복과 신발은 제한적으로 공급되어 소외된 아이들은 구석에서 울게 마련이었다.
사진 전면에 맨발로 서 있는 남녀 아이들이 보인다. 뒤에 흰 드레스를 입은 아이들과 대비되는 모습.
왼쪽의 할아버지 옆의 여자아이는 축제에 참여하지 못해 슬픈 나머지 눈물을 훔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도 삶의 일부분임을., Waldmüller는 축제 아침,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의 조화, 그리고 축제의 들뜬 분위기를 잘 묘사했다.
자 다음은 2층 갤러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머물게 한 작품을 소개한다.
美少女가 책을 읽는다.
손을 가슴에 다소곳이 올리고 머리를 귀로 단정히 올린 채 독서에 집중한 모습.
굉장히 사실적이다. 액자 속의 그림이 아니라 액자 너머에 정말 이 소녀가 앉아있는 게 아닐까..
역시 비더마이어(Biedermeier) 화풍의 작품으로 오스트리아풍의 사실적 묘사를 뚜렷이 보여준다.
프란츠 아이블(Franz Eybl)은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조각으로 시작해 풍경화, 역사회화로 전환하고 석판화로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나갔다. 유화로 그린 그의 초상화는 뛰어난 회화 기법과 모델에 대한 충실한 묘사로 특히 인기가 많았다.
화가에게는 다소 이례적인, 독서하는 소녀의 묘사는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발산한다.
따뜻한 톤이 적음에도 색상의 조합과 균형 잡힌 빛을 사용해 소녀의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세기, 중산층에서 발전한 독서 문화는 점차 더 넓은 사회 계층이 접근할 수 있는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예쁘게 빗어 넘긴 머리의 윤기가 굉장히 사실적이다.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손에 잡힐 듯하다!
머리카락의 광채가 너무 사실적이라 여러 번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소녀의 귓바퀴 묘사도 너무 사실적이다.
목에 건 가느다른 목걸이와 그 그림자, 발그레한 소녀의 손가락과 잘 다듬은 손톱까지.
소녀가 금방이라도 필자에게 말을 걸 것 같다. 멋진 오빠! 오빠도 독서 좋아하세요 하고. ㅎ
지극히 사실적인 묘사로 작품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몇 번이고 소녀를 보고 또 보았다.
이곳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를 남긴다.
소녀는 저 위치에서 여전히 독서 중... 언제까지나 저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붙잡을 것이다.
2층 갤러리에서 대리석 홀(Marble Hall)을 내려다본다.
내벽에 부착된 코린트식 기둥의 금빛 장식이 클림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1층에 클림트의 작품이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1층에서 본격적으로 접할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의 작품이 이곳에 있었다.
에곤 실레의 연보를 보니 불과 스물여덟 해를 살다간 청년이다. 무엇이 그리 급했나.
모델이 박사다 보니 그런지 책에 둘러싸여 있다. 발 디딜 틈도 없다. 손에도 책이 들려 있다. 너무 의도적이 아닌가?
모델을 앞에 두고 그렸다기보다는 화가가 상상한 공간에 모델을 잠시 옮겨 그린 것 같다.
그림에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어둡고 칙칙한, 아주 음산한 분위기.
이 분의 전공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면 화가의 심리상태를 반영한 것인가
다행히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어 어두운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희석시킨다.
모델인 휴고 박사는 의사이자 물리학자였다고 하는 정보밖에 없다.
이곳,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은 총 22점의 실레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어느 미술관이나 공간 부족으로 소장한 작품을 모두 전시하지는 않음.)
그의 작품은 스승인 클림트와 함께 1층에 주로 전시돼 있다.
2층 갤러리 마지막 홀에 들어와 왼쪽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필자가 고대하던 걸작이 눈앞에! 정말 깜짝 놀랐다는 표현이 맞았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의 [생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
이 명작을 본 순간 발이 얼어붙었다. 이 작품 보기를 얼마나 염원했던가.
앞서 필자가 이곳 벨베데레 궁전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작품이었다. 클림트의 [키스]보다 훨씬 더!
필자 초딩시절에 학습 전과로 유명했던 '표준 전과'의 겉표지가 바로 이 그림이었기 때문에 동시대 사람에게는 꽤나 각인되어 있다. (필자 연령대가 대략 나오죠? ㅎ)
백마를 타고 진두지휘하는 시대의 영웅, 자크 루이 다비드는 나폴레옹 1세의 영웅적인 면모를 어쩜 이렇게 짱 멋지게 묘사할 수 있단 말이더냐! 직관하게 되면 이 작품이 풍기는 강한 인상에 다들 넋놓고 쳐다볼 수밖에 없으니..
놀란 말은 앞발을 들고 있지만 나폴레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렬한 붉은색 망토를 휘날리며 전장에서 진격을 명하고 있다.
바위에 그를 지칭하는 'BONAPARTE'가 각인돼 있고, 앞서 이 알프스 고개를 넘은 두 명의 영웅, 한니발과 신성로마제국 샤를마뉴 대제의 이름이 그 아래에 쓰여있다. 나폴레옹이 그들과 동급이 됐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나폴레옹 정권을 찬양하는 데 있어 다비드만큼 열성적이고 탁월하게 수행한 대중 선동가는 따로 없었다.
다비드는 황제의 영웅적 이미지를 고취하기 위해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고, 보다 강화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폴 들라로슈 (Paul Delaroche, 1797-1856)라는 후대 화가의 그림을 보면, 다비드의 그림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동일한 주제를 그렸는데 화가에 따라 이렇게 그림이 달라질 수 있음을.
나폴레옹 사후,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는 의뢰인으로부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다.
전작에 비해 나폴레옹의 영웅적 이미지는 온데간데없다.
실제로 알프스산맥을 넘을 때 나폴레옹은 노새를 타고 있었으며, 먼저 병사들이 알프스를 넘은 후에 길을 잘 아는 현지인들의 안내를 받아 산맥을 넘었다는 사실!
엄동설한, 나폴레옹 특유의 가슴속에 한 손을 올려놓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칙칙한 외투에 감춰져 더 쓸쓸해 보이고, 표정도 침울하다.
나귀도 피곤에 지쳐 머리를 떨구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고, 눈도 쳐져 있다.
백마를 타고 힘차게 알프스 고개를 넘는 영웅은 어디 가고, 노새를 탄 채 추위에 떨며 터벅터벅 이동하는 모습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도 누가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따라, 180도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 그림을 통해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고,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알프스산맥을 넘어 오스트리아 군을 종국에 격퇴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그의 영웅적인 면을 일깨워주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다비드의 그림이 멋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망토와 말의 갈기가 역동적인 모습을 시현한다. 사선 구도를 택해 더욱 진취적인 느낌 작렬!!
협곡의 모습은 흐릿하게 묘사하고 오로지 인물의 영웅적인 모습에 포커싱 했다.
필자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을 좋아한다.
너무나 사실적이고 마치 눈앞에서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는 것 같은 몰입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VR 이런 것 다 필요 없다.
이런 멋진 구상을 어떻게 했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대작들은 [루브르 박물관 편] https://brunch.co.kr/@artelove/4 에서 찾아보시기를.
나폴레옹 본인도 이 작품이 맘에 들어 해 자신이 머물던 궁정마다 걸려고 세 점을 더 주문한다.
다비드 본인이 소장한 하나를 포함 도합 5점이 존재한다. 원본은 파리 근교 말메종 성에 걸려 있다. (그 원본을 또 보러 말메종 성에 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감동을 가라앉히고 다음 작품을 찾아본다.
씨시는 당대 최고의 개미허리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스위스 제네바 여행 중 어느 정신병자에 의해 살해당한다.)
호프부르크 왕궁의 여러 광장에 세워진 청동상들의 축소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헬덴 광장에 있는 카를 대공과 빈 미술사 박물관 광장의 마리아테레지아 여제의 동상 등.
이상으로 벨베데레 국립 미술관 1편을 마친다.
다음에 소개할 클림트의 작품과 에곤 실레의 작품들은 지금 소개한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성격의 작품들이기 때문에 - 클림트의 작품은 에로틱 그 자체, 에곤 실레는 퇴폐 미술의 본좌 - 지금까지의 분위기와 사뭇 달라 별도로 분리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다.
(19세 미만 관람불가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2편을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