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필자의 역작 가운데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 편을 공유하게 되어 기쁩니다.
랜선 여행 독자분들을 위해 작품 하나하나에 세세한 감상평을 기록하였습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 예술의 자존심'을 넘어 자타 공인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다.
더불어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는 '세계 문화유산'이자,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온 관람객들로 항시 문전 성시를 이루는 장소이다.
프랑수아 1세는 왕국의 수도에 걸맞은 궁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1546년 루브르(Louvre) 궁전의 공사를 시작하였고, 무려 7명의 왕이 바뀌고 300여 년의 공사 끝에 비로소 완공하였다.
프랑수아 1세는 피에르 레스코 (Pierre Lescot)에게 공사를 맡겼고, 뒤에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Medici) 왕비가 튈르리 (Tuileries) 궁전을 완성하였다. 이후, 앙리 4세 -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간의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고 왕위에 올라 인제 모든 국민들에게 닭 한 마리는 먹을 수 있는 평안을 베풀겠다고 선언했던 왕. 이를 계기로 프랑스 상징이 '수탉'이 됨 - 와 루이 14세, 나폴레옹 1세 등이 루브르에 자취를 남기게 된다.
* 여기서 잠깐. 본 포스팅을 차분히 읽는데 1시간은 족히 소요되니 마음 단디 먹으시길. (35명의 화가와 그들의 작품 150 여 사진을 포함하고 있다.)
루이 14세는 루브르 건축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궁전의 여러 가지 양식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고 생각해 - 완전 네모, 좌우 대칭의 전형인 베르사유 궁전을 보라! - 개축 전문가인 이탈리아의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를 초빙해 대대적인 개축을 의뢰했다. 그러나 베르니니가 내놓은 청사진이 만족스럽지 못하자 종국에는 클로드 페로(Claude Perrault)가 떠맡게 되었다.
그는 루브르에 일련의 통일감을 주기 위해 기존의 건물을 감싸는 지금의 콜로네이드(Colonnade, 회랑)를 설계하였다. -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서 부분 인용.
루브르의 기원은 12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793년 프랑스 대혁명 때 박물관으로 변모한 이 궁전에는 기원전 700년부터 서기 1850년대에 이르는 예술품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컬렉션은 5개 층, 3개 전시관에 걸쳐 전시되고 있으며, 상호 연결되는 세 전시관의 이름은 프랑스의 역사적 인물 세 명의 이름을 각각 붙인 것입니다.
루이 13세의 재상 리슐리외, 앙리 4세의 재상 쉴리 그리고 루브르의 초대 관장인 드농이 그것입니다.
- 루브르 박물관 안내도
12세기 중반에 파리 도심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기획되었다가 14세기부터 왕실 궁전으로 사용되었고, 16세기에 이르러 프랑수아 1세가 [모나리자]를 비롯한 이탈리아 회화 작품을 전시하면서 비로소 왕실 컬렉션으로 변모하였다.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시점은 프랑스 대혁명 직후인 1793년. 나폴레옹이 세계 도처에서 약탈한 전리품들을 이곳에 전시하면서 현재는 약 40만 점에 달하는, 고대부터 19세기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컬렉션을 갖추게 된다.
영국이 제국을 건설하고 전 세계 짱 먹을때 식민지의 전리품을 대영박물관에 비치한 것처럼 프랑스도 유럽을 호령하던 시기에 이를 똑같이 시전 한 것이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강탈해온 기마상을 카루젤 개선문 위에 데코레이션으로 올려놨다거나 하는 등.)
현시대는 어떤가. 세계의 경찰 반 깡패 미국은 막강한 Economic Power를 이용해 전 세계 유명한 예술 작품을 돈으로 사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리고 MoMA 같은 곳에 전시해 놓고 있는 것이다. 200여 년의 짧은 역사에서 비롯된 그들의 문화적 열등감의 발로인가.
어찌 됐든 주먹이든 돈이든 힘센 나라가 이런 장소를 '구현'할 수 있는 것임을 증명.
[Floor Information]
루브르 박물관은 길이 약 1km, 너비 약 30m 규모의 면적을 차지하며, 고대 이집트 유물관, 고대 근동/메소포타미아 유물관, 그리스/로마 유물관, 이슬람 미술관, 회화관, 조각 전시관, 장식미술, 소묘와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집품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전시 작품이 많아 온전히 감상하려면 2~3일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필자도 전일+야간으로 두 번 방문했지만 다 둘러보지 못했다.)
전시실은 쉴리관, 드농관, 리슐리외관 등 세 개의 전시관으로 구분돼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주로 유리 피라미드를 통해 입장한다.
1. 쉴리관 :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유물과 17세기~19세기 프랑스 회화
2. 드농관 : 13~18세기 이탈리아 회화, 18세기 말~19세기 초 나폴레옹 시대의 회화
3. 리슐리외관 : 공예품, 궁정 예술품, 메디치 갤러리, 플랑드르 회화, 북유럽 회화
쉴리관으로 입장하여 고대 루브르 박물관의 성채를 지나 밀로의 비너스를 만나는 루트를 추천.
루브르 궁의 역사부터 알고 시작하자는 의도.
● 개관 시간 : 오전 9시부터 18시까지. 수요일/금요일 21:45분까지. (15유로) *화요일 휴관.
● 홈페이지 : https://www.louvre.fr/
뮤지엄 패스가 있어 빠른 속도로 유리 피라미드를 통과.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간다.
오전 9시 20분경. 지하 2층으로 내려와 보면 이미 수많은 관광객들로 실내가 바글바글.
이곳은 안내 데스크가 있고, 매표소, Cloak room, 오디오 가이드 (5€)를 대여할 수 있다.
*오디오 가이드 대여 부스는 지하 1층에도 있다.
리슐리외관, 쉴리관, 드농관에 입장할 수 있는 진입로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아뿔싸.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하려고 하니 여권을 보여달라고 하여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친절한 한국인 가족분을 만나 우리를 위해 또 한 번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해주셔가지고.. 지면을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나중에 브런치를 통해 제가 책을 쓰게 되면 책 한 권 드릴게요~
열심히 발품 팔았지만 全 작품을 다 둘러보지 못했기에 본 포스팅에서 언급하지 않은 작품들은 다른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쉴리관으로 입장하면 Louvre Medieval (중세 루브르) 출입문을 지나 옛 루브르 궁의 모습이 드러난다.
지금은 과거의 영화로운 모습은 아니지만 설명 자료를 통해 과거 웅장했던 성채의 모습을 잠시 떠올려 본다.
이윽고 마주한 것은 고대 이집트의 유물. 스핑크스(Sphinx)다! 그런데 네 얼굴에 슬픔이 배어있구나.
이 유물은 기원전 이집트 수도였던 Tanis 지방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이집트를 제외하고 가장 큰 스핑크스.
B.C 260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결하게 돌조각을 다음은 것이라거나 얼굴의 매끄러운 곡선을 볼 때 그 시대의 우수한 crasftsmanship 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가슴팍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보면 19대 왕조, 22대 왕조 등 후대 왕조에 의해 비문이 새롭게 덧쓰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쟁의 전리품으로 사용되었고, 종국에는 이곳에 팔려왔으니 이렇듯 슬픈 얼굴을 지을 수밖에.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한 후 노획한 전리품. 평원한 사막에서 무덤을 지키고 있어야 할 조각상이 이런 꽉 막힌 지하공간에 갇혀 있다니.
그는 고대 유물을 싹쓸이할 목적으로 건축가, 고고학자, 수학자 등 전문가들을 대동하고 이집트에 출정을 나갔던 것이 아니었던가.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처럼 제 집이 아닌 곳에 생뚱맞게 전시된 모습은 약소국의 설움을 느끼게 한다. 이집트인이 보면 얼마나 안타깝겠나.
우리나라도 '직지심체요절'이라고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더 앞선 금속활자본이 있지만 안타깝께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그것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는 약탈된 것이 아니라 구한말에 프랑스인이 적법한 절차를 통해 구매한 것이라 환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로소이다. 이 외에도 프랑스 내 한국문화재 대부분은 적법한 구매 절차를 통해 소장하였기에 강제 환수하기도 어렵다고.
그리스 아테네의 수호신이자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
평화를 사랑한 측면에서 스파르타가 모신 아레스와 여러모로 대비된다. 그녀를 기리는 신전이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신전은 언제 가볼 수 있으려나.ㅎ
그리스 시대의 작품들을 오마주 했던 로마가 그들의 청동 작품을 대리석으로 만들어 복제한 것이다.
오늘날 미술관에 소장된 대부분의 고대 조각상들은 여행자나 기념품 수집가들을 위해서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복제품들이다.
로마시대에 이르러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 메소포타미아 문명, 에게 문명 등 - 이교도 작품은 온전히 남아있지 못하게 되는 처지가 됐으니까.
그나마 이러한 작품들로 그리스의 걸작들이 어떠했을지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
이 조각상은 투구를 쓴 아테나의 모습을 한 copycat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높이가 3.05m에 달한다.
품목번호도 있다. (Accession number : Ma464)
몸에 걸친 옷의 주름을 살펴 보라. 어떻게 딱딱한 대리석을 가지고 이렇게 섬세한 조각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스 미술가들이 옷 주름을 이용해 인체를 표현했던 방법은 지금도 그들이 얼마나 형태에 관한 지식을 중요시했던가 하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스 미술이 그 뒤 여러 세기에 걸쳐서 그처럼 찬양을 받은 것은 규칙의 준수와 규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유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아테나의 맞은편에는 밀로의 비너스가 보인다.
그리스 신화에서 파리스의 황금 사과를 얻기 위해 헤라, 아프로디테(라틴어: 비너스) 그리고 아테나 세 여인이 맞붙었는데, 헤라는 권력을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테나는 지혜를 제시하였는데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준다.
결코 서로 친할 수 없는 아테나와 비너스이기에 큐레이터가 멀찍이 떨어뜨려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ㅎㅎ
어떤 神일까요? 너무 쉽나요?
왼쪽은 독수리와 함께 있는 걸 보니 신들의 왕 제우스이고 오른쪽은 돌고래에 올라탄 사랑 사냥꾼 에로스와 함께 있는 걸 보면 비너스.
그러고 보니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는 비너스와 전쟁의 신 아레스 사이에 난 자식인데, 아레스는 아테나처럼 지략과 방어로서의 전쟁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호전적이고 파괴적인 전쟁을 일삼았던 신으로 그려진다. 미인은 그런 남자에 끌리나보다.
자 드디어 0층의 최고 인기몰이, 8등신 미녀를 보러 갑니다.
밀로의 비너스. (원제: Aphrodite, known as the "Venus de Milo", 기원전 3~1세기)
이 아름다운 여인을 보러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합니다.
*루브르의 3대 여신 :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지난번 루브르에서 봤을 때도 아름다운 자태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의 비너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갖춘 작품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 작품의 발전을 보여준다.
나선으로 비틀어진 몸, 공간에서의 위치 설정, Hip에서 미끄러질 듯 미끄러지지 않는 drapery(휘장) 등 혁신적인 모습이 바로 그것.
이 조각가가 아름다운 육체를 모델링 할 때 사용한 명료성과 단순성, 그리고 거칠거나 모호한 부분이 하나도 없이 신체의 주요 부분을 구분해서 보여주는 방법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이 비너스 상은 1820년 그리스 밀로라는 섬에서 발견되었고, 루이 18세가 이를 루브르에 기증하게 된다.
이 조각상의 원래 모습은 과연 어떠했는지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었다. 기둥에 기대서 있거나, 팔꿈치를 아레스의 어깨에 올려놓았을 거라는 등 다양한 자세를 상상하곤 했는데, 이는 곧 그녀가 활 또는 항아리(Amphora)를 들고 있었는지에 따라 아르테미스 혹은 다나이드(로댕의 조각 작품인 살아있는 여인 같은 바로 그 '다나이드') 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상체가 반쯤 벗어지고 그녀의 육감적인 몸의 곡선을 근거로 아프로디테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한편, 근처에서 비너스의 잔해로 보이는 팔뚝과 무언가를 쥐고 있는 손 등이 발견됐기 때문에 비너스가 사과를 움켜쥐고 있을 거라는 주장이 있었다. 파리스(Paris)로부터 얻은 - 그러고 보니 프랑스 파리와 스펠링이 똑같네.- 황금 사과를 쥐고 득의만면한 자세를 하고 있었을지도~
하지만 끝내 복원을 시도하지 않고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기로 결정한다. (이 것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머리가 훼손되지 않은 비너스 상이다.)
양팔은 몸에 붙어있는 군더더기에 불과할 테니, 이렇듯 토르소 형태의 조각상이 명료성과 단순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보편적 美의 기준을 확립한 장본인은 리시포스라는 사람인데, 그는 8등신 '카논(Canon)의 법칙'을 정의하였는바, 이 작품이 여기에 정확히 부합한다. 왼쪽 다리를 들어 콘트라포스토(a.k.a 에스라인)을 형성한 것 등 완벽한 아름다움을 빚어내었다. -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부분 인용.
작은 두상, 풍만한 몸과 봉곳하게 솟은 가슴의 유두, 복부 근육 등 작품의 부분 부분을 뜯어 보면 이 작품이 왜 칭송을 받는지 알 수 있다.
사랑의 비너스~♪♬ 어릴 적 TV 광고 CM송이 생각난다.
간혹 이 작품을 곁에 두고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자폭행위나 다름없으니 지양하시길.ㅎ
그리스 시대에 이르러 또 하나의 놀라운 발전이 있었으니 미술 역사상 최초로 발을 정면에 보이는 대로 묘사를 한 것이다.
이전 고대 근동 (아시리아, 바벨론 등) 및 이집트 미술품 중 그런 작품이 없었다는 측면에서 대단한 발전이다.
도자기에서 가운데 남성을 잘 살펴보라.
왼쪽 발은 우리가 익숙한 옆모습으로 묘사했는데 오른쪽 발은 정면에서 본 것처럼 발가락을 작은 원으로 그렸다.
이른 바 단축법 (Foreshortening, 인체를 표면과 경사지게 또는 직교하도록 배치하여 투시도법적으로 줄어들어 보이게 하는 회화 기법) 을 적용한 것으로 이는 고대 미술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리스 미술가는 더 이상 모든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인다고 여겨졌던 형태로 그림 속에 담으려고 의도하지 않고 대신 그가 대상을 바라본 각도를 참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에는 [테세우스와 켄타우르스]라는 안토니오 카노바 - 카사노바 아님-의 유명한 작품(아래 사진)이 입구 중앙에 전시되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데 벌써부터 두근두근. 얼마 안 남았구나!
큐피드가 테세우스의 포즈를 따라 하는게 여간 귀엽지 않다.
* 아래 사진은 2019년 6월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필자가 촬영한 사진입니다.
안토니오 카노바는 이탈리아 조각가인데 그의 대표작은 잠시 후 이 글에서 만나게 된다.
이어지는 그리스 조각관에서 독특한 작품을 보게 된다. 잘 모르는 분들은 그저 아름다운 여인이 뒤 태만 보고 지나치는데 반대편 모습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직접 가서 보시기 바란다.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이 역시 고대 그리스의 작품을 로마시대 때 복제한 것.
삼미신(三美神)은 고대로부터 오랫동안 여러 작품 속에 많이 등장하는 소재로 그리스신화에서는 Charm, Beauty, Creativity를 의미하는 제우스의 세 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미인대회 '진·선·미' 되겠다.
이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이 있지만 필자는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Primavera, 봄)]에서의 삼미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이 그림은 비너스의 탄생과 더불어 보티첼리의 대표작이다. 우피치에서 가장 보고 싶은 작품이다.
그 배경으로는 대학생 때 좋아했던 Caterina Caselii의 1974년 앨범 재킷에 등장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
필자에게는 봄이 오면 항상 생각나는 노래이기도.
이 그림에서도 삼미신이 비너스와 함께 등장한다. 큐피드가 눈을 가린 채 삼미신 중 '절제(Castitas)'를 상징하는 하나에게 화살을 쏘려 한다. 순결을 지키려는 마음을 멀게 해, 즉 무장 해제시켜 사랑의 유혹에 빠지게 하려는 것?
우피치 미술관은 또 언제쯤 가볼 것인가. 갈 곳이 너무 많구나.
그리스 시대 작품 하나 더 보고 로마 및 이탈리아 전시실로 이동하도록 하자.
드농관으로 이동하면 로마 및 이탈리아 조각상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상' 과 안토니오 카노바의 '큐피드와 푸시케' 조각상 등이 그것이다.
로마제국은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문화권과 이집트, 유대 지방, 카르타고 - 한니발의 원정 -, 이탈리아의 옛 지방인 갈리아 등과 바다 건너 브리타니아와 서쪽의 게르마니아, 그리스 지역 등 유럽을 넘어 아시아, 아프리카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아래 지도)
이러한 대 제국의 건설을 통하여 로마의 문화가 고대 지중해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로마는 점령지의 국민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고 능력 중심의 인재를 선발하는 등 관용을 베풀고 자신들보다 나은 부분에 대해서는 새로운 문물을 익히는 데 매우 개방적이었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 이런 이유로 로마는 천년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개방성이 빚어내는 지속가능한 사회 건설.
멋진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다. 이 조각이 뭘 나타내는 걸까. 늑대의 젖을 빠는 것으로 보아 로물루스가 떠올랐는데 어떠한 설명이 붙어 있지 않아 그냥 지나쳤는데, 이윽고 파리 에투알 개선문 전망대에서 개선문의 외벽 부조를 설명하는 자료에서 확인을 하게 된다.
나의 세밀한 관찰력에 새삼 뿌듯해하며.
로마의 기원이 된 Tiber 지역을 나타낸 고대 조각품이며, 이것을 이탈리아로부터 수송하는 프랑스 군대를 개선문 외벽에 부조 형태로 조각해놓은 것이다. (지금은 루브르에 전시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음에 마주하게 되는 조각상은 그 유명한 '큐피드와 프시케'.
큐피드의 키스로 죽음의 잠에서 막 깨어난 프시케를 껴안는 역동적인 모습을 안정적인 구도로 잘 빚어낸 카노바의 대표작이다.
보기만 해도 ♡♡ 뿅뿅 나오는 작품.
저 작품이 애초에 대리석 한 덩어리는 아닐 것 같고, 여러 대리석 조각을 붙여서 형상화한 게 아닐까 싶다. (확인되지 않음.)
이 전시실에서 꼭 봐야 할 또 다른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와 '저항하는 노예' 두 조각상이다.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 중 하나인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으로 그가 왜 뛰어난 조각가였는지 엿볼 수 있다.
역동적인 자세와 함께 살아있는 듯 생생한 근육의 모습은 단연 그가 최고의 조각가임을 입증한다.
대리석에서 숨 쉬고 있던 영혼이 마치 대리석에서 깨어나와 육체가 되어 걸어 나올 것만 같다. (이러한 찬사는 훗날 오귀스트 로댕에게로 이어진다. 로댕 미술관은 이어지는 브런치 포스팅 참고. )
미켈란젤로는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고 무덤의 데코레이션인 이 노예상들을 1513년에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황제가 죽은 후 재정적인 이유로 무려 40여 년에 걸쳐 변경되었고 결국 그는 Roberto Strozzi에게 헌정한다.
두 노예의 각자 처한 상황을 대비되는 모습으로 표현했는데, 하나는 죽음에 순응하는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는 속박에서 몸부림치는 노예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죽어가는 노예 (The Dying Slave)는 미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그는 분명 (영원한) 잠에 빠져드는 모습이다. 반면에 저항하는 노예 (The Rebellious Slave)의 경우는 몸을 비틀며 무언가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나타낸다.
도상학적 해석으로 보아 이 작품의 주제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미스터리. 죽어가는 노예 옆에 원숭이 형상을 한 조각은 또 무엇인가.
이들 노예들이 정복된 지역을 상징하는지 교황의 죽음으로 해방되는 노예를 상징하는 것인지 말이다.
어찌 되었든 고통받는 육체에서 벗어나려는 영혼의 움직임을 잘 표현한 걸작이다.
이 전시실을 지나 1층 드농관(Denon) 방향의 계단을 올려다본다.
루브르의 또 다른 여신이 두 날개를 펼치고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계단을 오른다.
주위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이 운집해있다.
마치 루브르 박물관에서 시간 약속할 때 '니케 옆으로 와~'하듯이. 루브르 박물관에서의 만남의 광장인 셈.
작품명 The Winged Victory of Samothrace. (BC 3세기~1세기경) 헬레니즘 양식의 걸작품 중 하나.
배의 이물(prow)에 올라서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Zeus의 메신저)를 형상화한 조각상. 이것은 기원전 2세기경 해전의 승리를 기념해 사모트라케 섬의 위대한 신에게 바친 봉헌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승리의 여신은 에게해 북서쪽 사모트라케 섬에서 1863년 150여 개의 파편 덩어리로 발견되었다.
오른 날개는 완전히 유실되어 왼 날개밖에 없었는데 초기에는 이를 복원할 기술이 부족하여 하체만 루브르에 전시(1879년) 하였다가 이후 기술의 발전으로 왼 날개의 주형을 떠 오른 날개를 복원해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 보이는 왼 날개만이 Original이며 왼 가슴과 오른 날개는 석고로 만들어 복원한 것이다.
비스듬한 날개의 각도와 뒤로 뺀 왼쪽 다리로 인해 Spiral effect를 만든다. 이 효과로 인해 더욱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이러한 vigorous movement는 헬레니즘 양식의 특색으로 훗날 바로크 양식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맞바람에 몸에 걸친 drapery(휘장) 가 육체를 휘감아 돌며 펄럭이는 모습을 보라.
둔부에 불어오는 바람으로 휘장이 뒤로 밀려 접혀있는 모습은 정말 리얼 그 자체!
저 가슴팍과 배꼽 부분에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그 세기까지 짐작케 한다. 파도에 젖은 옷 속에 비친 속살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다!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런다고 정말 속살이 들여다 보이지는 않는다.)
오른쪽 날개는 fake 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왼쪽 부분만 집중 관찰한다. 역시 오른 날개는 왼 날개에 비해 디테일하지 않다. (이걸 모르고 가면 정작 오른쪽 날개에서 사진을 찍게되는 경험을..)
그래서 Single viewpoint 라고 하며, 사모트라케의 니케 상은 항상 왼쪽 부분을 찍은 모습이 대부분이라는 것.
저는 왼쪽 사진빨이 더 좋아요~
루브르의 3대 여신 가운데 필자는 니케가 제일 맘에 든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 조각상에 얽힌 사연을 알고 보니 더 자세히 보게 되고 느낌이 더욱 생생하게 전달되어서 일까.
모나리자는 너무 사람이 북적대 온전한 감상을 하기 어렵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겠으나 이 작품은 올려다볼 수 있기에 - 모나리자처럼 큰 사람의 뒤통수에 가려지지 않음 - 계단참에 앉아 편하게 감상할 수 있어 좋다.
드디어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관으로의 입장.
정신 못 차리는 작품의 향연이 눈앞에 펼쳐진다. 아마 여러분들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될 것이다.
이곳은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약탈한 수많은 유물들이 전시돼 있으며 루브르 최고의 컬렉션으로 칭해져 소위 'Grand Gallary'라 불린다.
이 갤러리는 쉴리관에서 지금은 소실된 튈르리 궁까지 연결하는 총 457미터에 달하는 복도로 건축되었다.
이 복도는 해마다 파리 살롱 전이 열린 장소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살롱 카페'로 1년에 한 번씩 아카데미가 주최하는 살롱 전이 열려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이다.
벽면에 보티첼리의 작품이 걸려 있다. 그의 스타일은 대번에 알 수 있다. 여기도 삼미신이 등장하는구나.
프레스코화 타입이라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군데군데 벗겨진 흔적이 보인다.
르네상스 회화의 큰 특징인 원근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피렌체 화가 파올로 우첼로의 '산 로마노의 전투'(아래)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은 어디 해외 출장 중인 듯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나머지 두 형제와 상봉하고 있었는지도.)
총 3개의 연작*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 가운데 [미켈레토 아텐톨로가 구원병을 이끌다(The Counterattack of Michelotto da Cotignola at the Battle of San Romano)] 한 작품이 이곳에 전시가 돼 있다.
그는 원근법의 발견에 너무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밤낮으로 사물을 단축법으로 그려보곤 했다고 한다.
사실 단축법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은 런던에 있는 작품으로 전사한 병사를 단축법으로 묘사하였는데, 주변 대상에 비해 너무 작아 이상하게 보이지만 원근법에 의해서 그림 속의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화가의 의도.
* 런던 내셔널 갤러리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각각 한 점씩 전시돼 있다.
한 작품을 둘러싸고 일단의 사람들이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가운데 성모가 예수를 안고 있고 주위에 여섯 천사가 그녀를 감싸고 있는 작품.
마에스타는 옥좌에 앉은 성모를 뜻하는 일반화된 표현이다. 치마부에는 조토의 스승으로 알려져있다.
다음은 따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어 사진에 담았다.
보티첼리의 작품으로 아기 예수가 성모에게 매달리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그려냈다.
성모 마리아는 무뚝뚝한 표정을 보이는 데 그녀는 신격화된 대상이고 존귀한 위엄을 나타내야 하므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다.
투명한 옷을 통해 비치는 포동포동한 아기 예수의 속살. 너무 귀엽다. 이런 작품 하나 집에 두면 분위기가 따뜻해지지 않을까.
그랑갤러리는 천정에서 투과되는 빛으로 인해 분위기도 밝고 산뜻하다.
복도에 작품이 쫙 걸려 있다 보니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한쪽 면을 다 보고 다시 처음으로 와 다른 쪽 면에 작품을 감상해야 할지 아니면 이쪽 저쪽을 보면서 가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데, 결국은 마음 끌리는 대로 발을 옮기며 감상했던 것 같다.
그랑갤러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라는 작품이 보인다.
기둥에 묶인 채 처참하게 화살을 맞는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슬픈 얼굴이 드러난다. 그는 한때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사령관이었는데 기독교인임이 드러나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순교를 하게 되었고 화가는 이를 소재로 삼았다.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얼굴 표정을 보면 슬픈 얼굴을 짓고 있는 것이 또렷이 보인다.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에 이르러 기존의 神 중심의 회화관에서 벗어나 인간을 다시 캔버스에 옮기고 인간의 감정을 작품 속에 묘사하게 된다. 로마시대는 인간의 창조성이 결여된 암울했던 '암흑시대'였던 반면 르네상스 시기는 그리스·로마시대의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다시 부흥시키는 '창조의 시기'였던 것이다.
르네상스 예술은 그리스를 원형으로 하기 때문에 그리스 예술이 추구한 미학을 좇아 철저히 이성적이며 균형미와 조화, 절제미를 강조한다.
특히 회화에서 원근법과 명암법이 확립된 이후로는 가장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구조인 좌우대칭에 피라미드 구조를 적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부 묘사는 조각처럼 손에 만져질 듯 명료한 선묘와 해부학에 근거한 과학적인 인체 표현이 특징이다.
-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1]
만테냐의 작품 속에도 이러한 르네상스를 구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뒤쪽 멀리 언덕과 흰 건물이 보이고, 앞쪽으로는 사수로 보이는 두 사람과의 거리를 느낄 수 있다. 그도 우첼로처럼 원근법의 마술을 통해 새로운 효과를 과시하게 위해 이를 적용한 것이다.
한편,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몸은 단련된 운동선수의 육체로 묘사했는데, 당시 인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코린트식 열주의 세세한 묘사도 찬찬히 감상하시길.
만테냐의 이 작품과 유사한 그림이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에도 걸려있다. 조만간 보게 될 터인데 기대가 된다. 이 근육질 몸매의 순교자를 다른 장소에서 또 보게 되다니~
다음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Ghirlandaio)의 작품.
그는 플랑드르의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세부적인 묘사에 관심을 가진 화가이자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다.
위 작품은 [방문]이라는 타이틀로 종교화에서 곧잘 등장하는 이야깃거리이다.
마리아(가운데 푸른 옷)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임신 소식을 듣게 되고 방문한 사촌 누이와 함께 기뻐하는 모습이다.
아치 사이로 푸른 하늘과 그 아랫마을이 내다보인다. 여기도 원근법을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 보는 작품은 Bergognone의 작품.
세 개의 패널로 구성된 제단 장식화.
좌측 패널에 성 어거스틴(St.Augustin) 과 무릎을 꿇고 있는 기증자.
가운데 패널은 아기를 봉헌하는 장면 같고, 우측에 머리에 칼이 박혀있는 이가 성 베드로 (St.Peter)이다. - 무슨 핼러윈 데이 복장도 아니고.
여기서부터 그랑갤러리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집니다. 자 다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익히 보아온 작품.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침례 요한(John).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소년'으로 침례 요한을 묘사했다. 그의 손가락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아마도 장차 세상을 구할 메시아의 임재를 뜻하는 포즈가 아닐까.
모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에 거주했을 때 흠모했던 미소년이었고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보통 침례 요한은 낙타털로 만들어진 가죽 옷을 입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는 표범무늬로 보여 神 바쿠스를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본 작품 속 인물이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이 분은 예수에게 침례 의식을 행한 침례 요한이다.
- 침례(浸禮)와 세례(洗禮)는 완전히 다르다. 침례는 물에 몸을 완전히 담근 후 다시 물에서 나오는 것을 지칭하고 세례는 말 그대로 물을 (빗자루 같은 것으로) 흩뿌리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게 아니라 온몸을 물에 담근 후 다시 나오신 것*이므로 '침례'를 받으신 것이고 그래서 세례 요한이 아니라 '침례 요한'인 것이다. 성경 번역의 오역이 아닐 수 없다.
* 마 16:1 As soon as Jesus was baptized, he went up out of the water. At that moment heaven was opened... [대한성서공회 NIV]
성경에서는 살로메의 간계로 헤롯왕에게 처형되고 마는데, 여러 화가들이 작품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쟁반에 담아 나오는 요한의 잘린 머리 그림... 곧 보게 됩니다.
드디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역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에는 [암굴의 성묘]로 번역된 작품으로 마리아를 중심으로 우측의 침례 요한, 좌측의 아기 예수와 천사가 위치하며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 구도는 훗날 라파엘로에도 영향을 줘 그의 성모자상에도 등장한다. (곧이어)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초로 적용한 '대기 원근법 이 적용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대기원근법 : 색채는 멀리 볼수록 흐리게 보인다는 사실에 기초해 멀리 있는 물체일수록 부드럽고 흐릿하게 나타내고, 가까이 있는 물체일수록 또렷하게 나타내는 기법 -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1 인용
지금 시점에서 보면 당연한 진리인데도 이 시대에는 이런 원리를 회화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면의 아기 예수와 침례 요한의 몸은 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배경은 어둡고 부드럽게 묘사해 입체효과를 준다.
비교적 오랜 시간인 약 4분간 본 작품을 감상하고 - 정면에서 봤다 비스듬히 봤다 - 다음 작품으로 이동한다.
앞서 언급한 침례 요한의 최후의 모습.
살로메를 저렇게 순진무구한 얼굴을 한 여인으로 묘사하다니! 은쟁반에 피가 뚝뚝
그나저나 옷의 주름의 묘사라든지 배경을 검게 하여 주제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는 매우 뛰어나다.
또 다른 다빈치의 작품 [성 안나와 성모자].
양(예수의 보혈을 알레고리) 을 감싸 안고 놀고 있는 예수를 감싸는 마리아와 그러한 마리아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의 자애로운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아기 예수가 포동포동한 것이 너무 귀엽귀엽. ^^
그림에서 예수보다 삼각형의 축이되는 위치에 Anne 을 배치해 그녀를 더 강조하고 있다.
인물들이 상호 체인처럼 얽혀 있는데 함 들여다봅시다.
Anne의 오른팔은 마리아의 오른팔로 연결되어 아기 예수를 안으려 하고 있고, 마리아의 왼팔은 예수의 몸에 가려져 예수의 왼팔로 연결되어 양을 안고 있는 것처럼 구성하였다. 이것은 Anne으로부터 마리아로, 마리아에서 예수로 이어지는 혈통을 의미하도 하며, 최종적으로 어린 양에게 이어진다. - Louvre.fr 홈피 인용
이 작품은 루이 12세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다빈치는 너무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 전달하지는 못했다고.
앞서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인물 배치- 이른바 'Leonadesque'로 칭함-는 후세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 작품을 인수한 사람은 프랑수아 1세로 추정하고 있다.
루브르에는 위에 언급한 작품들 외에 모나리자 등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총 5점의 그림이 전시돼 있다.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그가 죽기 전 프랑스로 왔기 때문. (프랑스는 횡재한 셈)
모성애 팍팍 느껴지는 그림 하나 또 보시죠.
Andrea Solario - 이 화가는 여기서 처음 알게 됨 -의 [녹색 쿠션의 마리아]로 역시 마리아와 예수를 묘사하고 있다.
나무 위에 템페라, Oil로 그린 것으로 프랑스의 어느 수도원에서 발견되었고 Solario 가 프랑스에 잠시 머문 기간에 그린 것으로 추정.
여기서 마리아의 모성은 위 다빈치의 [성 안나와 성모자]에서의 마리아에서 motif를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대리석 받침대 위에 녹색 쿠션으로 인해 (그리고 빨간색의 혼합으로) 따듯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러한 디테일은 성스러운 분위기와 완벽하게 통합되어 쿠션의 부드러움처럼 가족의 tenderness 가 느껴지는 참 좋은 그림이다. 예수가 손으로 발가락을 잡고 있는 것도 참 귀엽다.
그때는 휙 지나쳤는데 포스팅하면서 자세히 보니 이 그림 정말 맘에 든다.
한편, 산후조리원에게 걸어두면 정말 수유가 잘 될 것 같다. ^^
르네상스 회화는 종교화가 많아 천주교 혹은 기독교 신자가 아닌 경우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질 것 같다. 그러나 어쩌랴.
그 옆의 Solario의 다른 작품 하나 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안고 비탄에 빠진 인물을 묘사한 작품. 이전 작품에 없던 인물들의 얼굴 표정의 디테일이 생겨나고 있다.
이 그림에서도 원색 위주의 터치로 그림 분위기가 산뜻하다.
갈바리 언덕을 대기원근법으로 묘사한 부분 또한 놓치지 말자.
드디어 라파엘로(Raphael)의 다빈치에의 오마주 작품이 등장합니다. 명화의 향연(饗宴)으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예의 삼각형 구도가 눈에 확 들어오죠?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에서처럼 대기 원근법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
정면 왼쪽에 후광을 두르고 마리아의 손을 잡고 있는 포동포동 아기 예수와 그 옆에는 가죽옷을 입고 십자가 지팡이를 든 침례 요한.
위의 다빈치의 '암굴의 성묘'와 비교해보라. 다빈치의 마리아보다는 자애로운 모습은 아닌 것 같다. ㅎ
하지만 르네상스의 절정을 이룬 화가 라파엘로답게 명암 대비에 의한 입체적인 대상 묘사는 그를 왜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르네상스 3대 화가의 반열에 올린 것인지 알 수 있다. -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며 라파엘로가 얼마나 감격했을까. 한편 미켈란젤로는 이런 풋내기와 나를 같이 비교하는 것인가 하며 불쾌해했겠지.ㅎ
이 작품도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에 (조금 다른 포즈로, 그러나 피라미드 구조는 동일) 있다.
다빈치에의 오마주 또 한편이 걸려 있네요!
이 그림을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확인한 후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라파엘로 같은 위대한 화가도 선배 화가의 그림을 끊임없이 연구하며 끄적이고, 새롭게 바꿔보고, 더하고 빼면서 자신만의 화법을 창조한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는 빈말이 아닌 것임을.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 하지 않던가!
이 작품은 미카엘 천사장이 사탄을 쓰러트린 후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직전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피렌체 메디치(Medici) 가문의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의 요청으로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주문했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을 레오 10세는 (그림 수집이 취미였던) 프랑수아 1세에게 선물로 주었다.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피렌체의 오랜 숙적이었던) 밀라노를 점령하자, 레오 10세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선물한 것이다.
파리 시테섬 남쪽으로 생 미셸 광장(Place Saint-Michel)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 대천사 미카엘이 악마를 밟고 선 멋진 선 조각상이 있는 분수대가 있으니 가보시길.(필자는 시간상 가보진 못했다.)
한편, 레오 10세는 아래 그림 속의 인물이다. 이 역시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붉은색 융의 굴곡과 은빛 옷의 광택이 정말 사실적이다. 어쩜 이리도 잘 그릴 수 있는 것인지.
마지막으로 그의 작품 하나 더.
역시나 아기 예수를 자애롭게 앉는 마리아의 모습. 옆에 그의 절친 요한도 함께.
성모 마리아가 입고 있는 휘장의 주름 명암 묘사가 정말 탁월하다. 바닥의 다채로운 대리석 문양도 참 잘 그렸다.
다음 전시실은 드농관 1층의 마니에리스모 화파와 바로크 시기의 작품들이 전시된 곳.
고대 로마인들은 봄은 꽃으로 여름은 밀 이삭으로 가을은 포도송이로 겨울은 사냥한 고기로 각 계절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를 모티프 삼아 인물을 과일과 식물 등으로 묘사한 것이다. 재미있는 작품이다.
좌측 그림이 여름 청년의 모습을, 우측은 겨울 노인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인데, 좌측 [여름] 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목 주변에 화가의 이름인 'Giuseppe Arcimboldo' 가 새겨져있고, 어깨에는 그림 제작연도인 1573년도가 묘사돼 있다.
우측 그림 [겨울]도 재미있는 데, 그림의 주인공은 보헤미아의 왕 루돌프 2세(1552-1612)를 나타낸다고. 옷깃에 칼 두 자루가 교차하는 것으로 루돌프 가문을 표시하였다.
루돌프 2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서 통치력은 없었지만 문화적인 관심은 많아 예술가와 과학자들을 많이 후원했다고 한다.
봄과 가을은 이곳에 없다. (어디 갔는지는 필자도 모르겠다. 아는 사람 손!)
빈 미술사 박물관에도 아르침볼도의 '여름'과 '겨울'이 전시돼 있다.
그곳의 작품과 다른 부분은 그림 가장자리에 나뭇잎으로 장식을 한 부분이다. 아마도 17세기경에 작가가 추가한 것으로 추정한다.
Antonio Campi의 작품으로 예수의 수난(Passion, 중앙 위), 예수의 부활(Resurrection, 중앙), 이후 승천(Ascension, 우측 위)의 모습을 하나의 그림에 담아냈다.
추기경 로메오와 그 추종자들은 대중에게 종교적 신념을 설파하고 믿음을 강화하는데 종교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시 글자를 읽을 줄 아는 것은 귀족을 제외하고 흔치 않았기 때문에 그림이 그 도구 역할을 했다.
드농관 1층 716호실에 상당히 큰 대작들이 연달아 걸려있다.
위 작품은 귀도 레니(Guido Reni)의 대형 작품으로 인물들이 하나같이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높이 2.6m, 폭 1.92m)
이곳의 그림 4개는 만투아 공작의 villa를 장식하기 위해 의뢰된 작품이며 4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이 그림들은 이전에 영국의 Charles 1세가 보유하던 것을 1662년 루이 14세가 사서 들여온 작품이다.
위 그림은 일곱 개의 뱀 머리를 한 히드라(Hydra)를 때려잡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그렸다.
그 옆의 그림은 헤라클레스의 처인 Deianeira (이름이 어렵네.)를 납치하는 켄타우르스의 모습이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반인반마 켄타우르스 족 네서스(Nessus)에게 자신의 처를 강가로 대신 인도해주길 부탁했는데, 왠걸 네서스가 그녀를 겁탈하려 하자 히드라를 죽이는 데 썼던 피 묻은 화살로 그에게 상처를 남긴다.
또 다른 작품을 보자. 아마도 이 작품이 이곳에서 제일 인기 있는 작품인 듯하다. 오디오 서비스를 해주니까.
항구를 배경으로 한 장군이 여성을 친절히 안내하는 듯한 그림인데 많은 알레고리가 담겨 있다.
그림의 배경은 트로이의 전쟁과 관련이 있는데, 스파르타를 방문한 파리스가 왕비 헬레네를 납치하는 장면이다. 이로 인해 오디세우스의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침공하여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림 속 장면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인은 파리스에게 손을 내어 맡긴 채 우아하게 시녀들을 대동하고 파리스를 따라가고 있다.
메넬리오스와 결혼한 사이였음에도 神들도 울렸던 파리스의 용모를 보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큐피드가 한 짓일까.
흑인 어린이가 데리고 있는 원숭이는 부도덕, 음탕을 의미한다. 앞의 강아지도 무슨 메타포였는데 기억이 잘..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이 제각각인 점, 파리스가 다른 곳을 응시하는 부분은 이들의 사랑이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임을 내포하는 게 아닐까.
그랑갤러리의 마지막에 스페인 회화(1400~1850)관으로 이동한다.
스페인 회화를 대표하는 엘 그레코의 작품과 호세 데 리베라 및 에스테반 무리요의 작품들이 주요 볼거리이다.
에스테반 무리요(Esteban Murillo)의 '이 잡는 소년'으로도 불리는 이 그림을 기대했는데 온데간데없다. 마치 타노스의 손가락 튕김으로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ㅎ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전시되지 않는다. 어디 출타를 나간 것일 수도.
길거리 부랑아들을 상당히 실제적이고 애달픈 모습으로 묘사하여 인기를 얻은 화가이다.
상기 사진의 좌측 작품이 무리요의 것이다.
천상의 하나님과 천사들이 보우하는 이 성스러운 가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리아의 가족으로 마리아에 기대서 있는 아기 예수, 왼쪽으로 그녀의 사촌 누이 엘리자베스 그리고 십자가 지팡이를 쥐고 털 옷을 입고 있는 아이가 침례 요한이다. 이제 여러분도 학습이 되어 누가 누군지 구분되시죠?
붓 터치가 상당히 부드럽고 인물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색칠하여 전체적으로 포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루이 14세에 의해 1786년에 루브르에 오게 된 작품.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는 스페인의 낭만주의 회화를 이끈 화가이자 궁정화가이기도 했다.
그림 속 여성은 18세기 말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했던 여인으로 알바 공작의 고모라고 전해진다.
여기서 잠깐. 그의 대표작 [옷을 입은 마하], [옷을 벗은 마하](아래)는 2013년 스페인 프라도(Prado Museum)에서 직접 보기도 했다. - 하나의 방에 나란히 걸려 있어 비교하며 볼 수 있는 묘미가 있다. 우리 집에는 냉장고 마그넷으로 나란히 붙어있다.
프라도 미술관 입구 야외에 그의 두상이 걸려 있을 정도로 그의 컬렉션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당시 프라도 미술관은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아 사진에 담지 못했다.
길게 늘어진 얼굴과 팔 다리의 형상을 한 작품을 보니 엘 그레코의 작품이다!
엘 그레코는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으로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Domenicos Theotocopoulos)인데 간략히 '그리스인'의 의미로 엘 그레코(El Greco)로 불렸다. -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나네.
그는 스페인의 Toledo - 한때 스페인 수도이기도 했던 -에 머물며 종교화 위주의 그림을 그렸다.
예수의 몸이 길쭉하게 늘어져 있다. 이러한 화법을 '매너리즘'이라 칭하며 기존 방식인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무시하고 감동적이고 극적인 환상을 강조하기 위해 신체를 비정상적으로 늘려 묘사하는 화법이다.
세부적인 묘사는 생략하고 본질적인 것에만 집중하여 통상적인 그림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어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Tintoretto) 화법에 영향을 받았다.
위 그림에서도 배경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에 흐릿하게 색칠해놓았다.
이 그림은 톨레도의 Queen's Hieronymite 수도원을 위해 제작한 것으로 그림 속 하단의 두 인물이 기증자(Donor)로 생각된다. 기증자는 어떤 이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왼쪽 기증자의 흰 미사복의 묘사가 너무 사실적 이어 가까이서 찍어보았다. 얇은 면사포 같은 소재를 이렇게 기막히게 그려 넣다니.
우리는 전체적으로 그림이 '잘 그린 그림' 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화가의 역량을 의심하곤 하는데, 기본적으로 화가는 소묘와 데생이 기본이기 때문에 기본기는 당연히 갖춰져있고 전통적인 화법을 변용해 새로운 화법을 구사한 그림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젊은 시절 초상화를 보면 그가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는지 놀라게 된다. 입체 3D 그림만 보다가.
이어지는 작품들은 Paolo Panini의 작품들이다. 이 화가는 고대 건축물을 담은 풍경화에 천착한 화가이다.
그림 속에 세스티우스(Cestius) 피라미드가 맨 뒤 배경으로 보이고, 미네르바의 신전, Tivoli의 시빌 사원과 베스타 사원을 결합한 원형 건물, 아우구스투스의 오벨리스크(Obelisk) 그리고 Nerva forum의 콜로너스(Colonnacce) 기둥이 보인다.
캔버스 속에 그가 그려놓고 싶은 것을 다 옮겨다 그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ㅎ
제목처럼 로마 폐허 속의 분위기를 즉흥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소품들(카프리치오,Capriccio)
이 대형 작품도 그의 작품인데, 한 술 더 떠 자신의 나라의 모든 명소를 작은 액자에 - 인물 크기로 봐서는 큰 캔버스임 - 모두 담아서 멋진 미술관에 전시한 것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만 보면 이탈리아 주요 건축물의 모습을 한 그림 속에서 다 볼 수 있다!
훗날 베르니니(Bernini)가 설계한 건축물의 전망도 몇몇 추가하였다. 이 분은 이런 데 소질이 있으신가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보이고, 트레비 분수, 가운데 모세 조각상 - 보통 턱수염이 길게 나 있는 형상으로 묘사- 등이 보인다.
스페인 회화관을 지나면 18세기 말~19세기 초 영국·미국 회화관이 펼쳐진다.
신화, 종교화, 역사화는 화가가 그 소재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자신이 이해하는 바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기에 왕실, 교회, 귀족 등 소위 주문자 생산 방식에 의한 명망 있는 화가들만이 간택되는 진입장벽이 높은 분야였던데 비하여, 초상화 및 풍경화 화가는 작품 소재가 주변에 널려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분야였으므로 화가는 대중의 존경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낭만주의 화법을 거치며 다소 누그러지게 되었고 18세기 말에 풍경화 화가들은 전통을 혁파하며 대중에게 풍경화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중심에 두 명의 영국의 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과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가 있었다. 그러나 자연을 대하는 둘의 화법은 판이하게 달랐으니...
터너에게 있어서 자연은 항상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다.
컨스터블의 생각은 터너와는 매우 달랐다. 터너가 경쟁하고 능가하기를 원했던 전통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단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클로드 로랭의 눈이 아니라 그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그리려고 했다.
'꾸밈없는 화가가 자리할 곳은 충분해. 오늘날의 가장 큰 악덕은 허세야. 그것은 진실을 넘으려고 하지.'
이렇듯 컨스터블은 이러한 모든 틀에 박힌 수법들을 경멸했다.
-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윌리엄 터너는 그의 작품이 영국 왕립 아카데미에서 회자될 정도로 유명세를 치른 화가였다.
그래서 풍경화의 대가인 클로드 로랭과 비교하며 그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을 나란히 걸어놓을 것을 주문하며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란히 걸리진 못했다.)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의 그림은 로마 평원, 즉 아름다운 색조 속에 위대한 과거를 연상시키는 장엄한 유적들이 있는 로마 주변의 평원과 언덕들을 주요 소재로 그림을 그렸으며, 위 좌측 사진과 같이 목가적인 풍경으로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대중에게 알려준 최초의 풍경 화가였다. 그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자신만의 정원 가꾸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를 흠모했던 윌리엄 터너였지만 클로드 로랭의 그림이 단순함과 고요함 그리고 어떠한 요란한 색채도 구사하지 않았다는 점에 반해 터너의 작품은 정적인 세상이 아닌 동적인 세상이었고, 단순한 조화의 세계가 아닌 현란한 색채의 세계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보다 눈에 띄게 만들기 위해 그림 속에 모든 효과를 잔뜩 집어넣었다.
위 우측 사진에서 정면에 태양이 강렬히 비치고 강물이 금빛으로 물드는 효과를 보라.
이런 점에 있어 존 컨스터블이 클로드 로랭의 풍경화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윌리엄 터너는 자연의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고 관객들로 하여금 자연의 위대함에 경외감이 들게끔 의도하였다.
위 작품도 강과 만의 풍경을 그린 작품인데 희뿌옇게 묘사하여 그 가운에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 그의 풍경화 [눈보라 속의 증기선]이 있다. 그의 과감한 소용돌이 구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 나는 이 그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레이번(Sir Henry Raeburn) 경의 작품으로 액자 속 어여쁜 소녀가 나를 쳐다보며 미소 짓고 있다.
'꽃을 들고 있는 어린 소녀. 또한 순수를 말한다'라고 씌어 있다.
어린 소녀의 이름은 Nancy Graham.
하얀색 드레스에 빨간 꽃 구두를 신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소녀에게서 때묻지 않은 순수(Innocence)를 느낄 수 있다.
뒤 배경을 어둡게 마무리하여 화면 속의 흰옷을 입은 소녀가 더욱 도드라져 보이며, 마치 하늘에서 사뿐히 내려온 어린 천사 같다!
어쩜 이리도 예쁠 수가 있단 말인가.
집에 두고 온 아들 녀석의 얼굴이 소녀의 얼굴에 투영되어서일까. 앞으로는 꼭 같이 갈게요.
미술관에서 뜻하지 않던 우연한 그림에 놀라고 반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도 내겐 이 작품이 그런 것 같다.
마침내 루브르의 3대 여신 중 마지막 차례인 '그녀'를 보러 간다. 그녀를 만나기 10m 전.
바글바글 와글와글 북적북적..
저 인파를 헤집고 가야 한단 말이더냐. 톱 탤런트 수준의 팬들을 몰고 다닌다.
일단 한숨 돌릴 겸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세상에서 가장 큰 미술작품을 먼저 보기로 한다.
이 그림은 전 세계 미술관에서 가장 큰 그림으로 꼽힌다.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거장인 파올로 베로네세가 수도원의 식당을 장식할 그림으로 주문받은 것으로,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의 기적 - 포도주의 기적 -을 담고 있다. 하지만 실제 배경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이고 (사람들의 식욕을 돋워야 할 테니) 화려한 연회 모습을 그려냈다. 그것도 이 어마어마한 캔버스에.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당시에 베네치아에 살던 왕족들과 귀족들을 묘사했고, 터번을 쓴 이, 아라비아 상인 등 해양 문물 교류로 성장한 베네치아의 국제적인 모습을 깨알같이 그려내었다.
식탁 앞 4중주 악단 멤버들은 베네치아 출신의 색채주의 화가들로 분했다.
센터에 흰옷에 비올라를 켜는 이가 화가 자신이고, 그 옆에 초록색 옷을 입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이가 틴토레토, 그 옆이 바사노, 맨 우측에 더블베이스를 연주하는 이가 티치아노이다.
자신도 이들처럼 후대에 추앙받는 화가가 되고 싶었던 게야. 최소한 그는 작품의 size로 주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 성공한 화가? ㅎ
예수가 식사하는 장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구도와 엇비슷하다. 그의 그림을 참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이 베네치아 원정길에서 뺏어온 작품이다. 작품이 워낙 거대해서 반으로 쪼개어 가져왔다.
그래서 위 세부 사진에서 보듯 테이블 선에 맞춰 주름이 잡힌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항아리의 포도주를 따르는 하인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 부분이 없었으면 가나의 혼인 잔치라는 주제가 무색할 만큼 화려한 배경과 북적이는 - 지금 711번 방처럼 말이다 - 연회객들로 인해 예수의 기적을 다룬 작품이라고 설득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인파를 뚫고 가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 다른 작품을 둘러본다. 이 방의 다른 작품들도 정말 훌륭한 작품들이다.
단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한 방에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는 것일 뿐!
가나의 혼인잔치에 연주자로 등장했던 화가들의 작품들이 이 방에 같이 있다.
틴토레토(Tintoretto)의 '마리아의 대관식'. 지상과 천상의 천사가 바라보는 가운데 마리아가 왕관을 쓰는 장면을 묘사한 종교화. 예의 그 역동성을 볼 수 있다.
위 작품은 티치아노 - 바로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그린 화가 -의 작품으로 생동감 있는 인물들의 묘사가 탁월하다.
위 작품을 보면 어떤 작품이 연상되지 않는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연상된다면 당신은 그림 좀 본 사람입니다. ㅎㅎ
우측의 뒤태를 보여주는 여인이 얼굴만 관람객 쪽으로 돌리고 있다면 정말 비슷할 것 같다. 배경 속의 숲도 볼로냐 숲?
마네가 혹시 이 그림에서 모티프를 따서 그린 게 아닐까 싶다. 올랭피아도 티치아노의 작품을 보고 그린 것 아닌가. 맞을 것 같다.
마네와 같은 혁신가도 이렇듯 legacy와의 교류를 통해 새 시대를 선도하는 기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이렇게 그림을 관심 있게 보다 보면 그림 보는 재미를 알게 된다.
자 드디어 루브르 박물관의 안방마님을 보러 가시죠.
위 사진을 찍으려 인파를 얼마나 헤집고 들어갔는지... 아 작품 감상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이 작품을 보러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이 루브르 박물관에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진정한 루브르의 안방마님이시다. 모나리자의 루브르인가.
우리는 그림엽서나 심지어 광고에서조차도 모나리자를 보아왔으므로 그것을 실제 화가가 살과 피를 가진 실존 인물을 그린 그림으로 참신한 눈을 가지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이 그림에 관해서 안다고 믿었던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우리를 먼저 감탄하게 하는 것은 리자라는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실제로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의 마음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우리의 눈앞에서 변하여 볼 때마다 달라 보이는 것 같다.
-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할아버지 말씀처럼 '참신한 눈'으로 이 작품을 새롭게 바라본다.
프랑스식 작품명은 라 조콘다(Le Joconda)이고 영미식 이름이 모나리자(Mona Lisa)이다.
모델은 피렌체 출신 상인 프란시스코 델 조콘다의 두 번째 부인인 리자 게라르디니(Lisa Gherardini)라는 것이 통설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그림을 그릴 때 기존에 없던 혁신적인 방법을 도입한다.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으로 대상의 윤곽을 흐릿하고 부드럽게 표현하여 배경과 조화되도록 그리는 방식인데, 이를 통해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상상하게 만들 여지를 제공한다.
윤곽을 명확하지 않게 그리고 희미하게 그리면 딱딱한 인상을 피할 수 있다. 이 기법이 모나리자의 눈가와 입술에 적용이 되어 (사람의 표정은 눈가와 입 매무새로 결정된다.) 모나리자의 '심연(深淵)의 미소'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모델의 시선과 화가의 시선을 동일선상에 맞추고 그리면 어느 위치에서 보더라도 작품 속 주인공이 관객을 쳐다보는 효과가 생긴다.
그래서 모나리자가 나를 응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림 속 뒤 배경도 그가 천착한 대기원근법을 심도 있게 '구현'하였다.
대기의 밀도에 따라 대상이 가깝게 혹은 멀게 묘사되도록 그린 것이다. 배경은 실제 존재하지는 않는 유토피아라고 한다.
훗날 x-ray 조사에 의해 이 그림은 달걀노른자와 흰자에 기름을 섞어서 색을 칠한 후 마르기를 기다려 위에 얇게 덧입히고 또 덧입히고 하는 방식을 여러 번 반복해서 그려졌음이 밝혀졌다.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 염료가 건조해져 말라서 그림 속에 잔금이 생기게 되었는데 위작은 이런 것까지는 복제할 수 없으니 스스로 복제 방지 기법을 만들어 낸 셈. 세월은 역시 복제가 불가능 한 법.
1910년경 이탈리아의 페루자라는 도둑이 훔쳐 달아나는 사건이 있은 이후로 본 작품은 더 이상 해외 순방길에도 오를 수 없는, 보호된 통유리 안에서 답답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앞에는 펜스까지 쳐 있어 그의 대기원근법이라던가 스푸마토 기법 등을 가까이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참 안타까웠다. 특히 그녀 얼굴의 세월의 흐름인 '잔주름'을 좀 보고자 했건만..
그러나 유리통 안에서 기품을 잃지 않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나리자의 모습은 분명 찾아볼 가치가 충분하다.
지나가는 인파 속에 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묘령의 여인이 모나리자와 같은 포즈로 날 응시한다. 누구세요?
위 사진에서 보듯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 발 디딜 틈도 없으니 이를 감안하시기 바란다.
(일부 관람객의 경우 앞에서 가까이에서 볼 기회를 제공하던데 무슨 예외 케이스가 있나 보다. 아이 동반인 경우는 근접 관람을 제공하는 것인가?)
어느새 오후 1시 20분. 4시간이 순삭.
점심은 간단하게 실내 베이커리를 이용하였다. 이마저도 편히 앉아 먹을 데가 없어 사람들은 바닥에 앉아서 먹기도 한다.
우리뿐 아니라 다들 Battle mode. 하 작품이라도 더 봐야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얼굴에 내 비친다.
1시간 정도 에너지를 비축하고 다시 전투 모드로 돌입.
루브르박물관에서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대작들이 전시된 1층 19세기 프랑스 회화관으로 직진.
가는 길 복도에 전시된 전령사 헤르메스 조각상. - 네이버가 떠오르네.
날개 달린 모자와 날개 달린 신발을 쓰고, 뱀 두 마리가 꼬여있는 지팡이를 가진 신들의 정령.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어마어마한 대작들이 몰려 있는 19세기 프랑스 회화관으로 입성합니다. 너무 기대됩니다.
자연 채광이 들어오고 내부도 붉은색으로 화려함을 더한다.
첫 번째 작품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의 대작.
베르사유 프랑스 역사 박물관의 십자군 방에 걸어놓을 그림으로 루이 필립이 위촉한 그림이다.
들라크루아가 1204년 12월 4일 4차 십자군 원정에서 가장 알려진 사실인 십자군이 이슬람으로부터 그들의 성지를 되찾은 후 원래 목적에서 벗어나 (기독교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린 역사화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1885년에 전시됨.)
우측 하단에 쓰러져 죽은 여인을 안고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이 보이고, 그 뒤로 무슬림을 향해 칼부림하는 십자군의 모습이 보인다.
정면의 말탄 기사는 노인을 향해 말머리를 돌리고 있고, 노인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이다.
말의 눈을 보니 안쓰러운 표정이구나.
그림 속 인물들의 역동적인 묘사로 역사가 더욱 생생하게 전해진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 특유의 역동적인 인물 포즈는 이곳 다른 작품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방도 멋진 작품들로 넘쳐나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
Ary Scheffer는 네덜란드-프랑스 이중 국적을 가진 낭만주의 화가로 제리코와 친구지간이다.
위 그림 역시 역사적 사실을 상상하여 그린 그림으로 투르크 군대에 의해 남편들이 희생이 되고, 아이와 여인들만 남게 되는데 야만적인 그들의 포로가 되느니 바위에 떨어져 죽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인물들의 군집상은 삼각형 피라미드 형태를 하고 있으며 그들의 pathetic 광경은 제리코(Theodore Gericault)의 '메두사의 뗏목'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메두사의 뗏목에서처럼 좌측 하단에 죽은 아이를 껴안고 머리채를 쥐고 누워있는 여인의 절망적인 모습을, 우측 상단으로 갈수록 어딘가로 손을 흔들며 구원을 희망하는 자들의 모습을 배치하였다.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시선 이동.
가운데 멍하니 다른 곳을 응시하는 여자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 문제작 등장이요~ 외젠 들라크루아의 역작인 '사르다나팔루스왕의 죽음'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키오스 섬의 대학살 이후로 살롱(Salon)에서 대성공을 이룬 그가 827년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바이런이 쓴 동명의 시극을 읽고 감명을 받아 제작한 대작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아시리아의 사르다나팔루스왕은 이웃한 메디아군이 왕궁까지 침입해오자 적에게 항복하느니 종들에게 명하여 자신을 포함해 같이 향락을 누리던 애첩들과 보물들 그리고 애마까지 모두 불태워버리라고 명령한다.
종들은 왕의 애첩들을 살육하고 사르다나팔루스는 손에 머리를 괸 채 이 광경을 태연히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는 왕이 주문한 독배를 든 신하가 보인다.
여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침대 보가 핏물로 붉게 물들어 피바다가 되어 (콸콸) 흘러넘치는 듯한 느낌, 그리고 전면에 죽임을 당하는 여인의 뒤틀린 몸이 이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에로틱한 느낌을 자아낸다.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도 여인의 풍만한 몸매가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측면에서 낭만적(Romantic)이라는 것인가.
이러한 작품을 통해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 회화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전 세계를 강타한 낭만주의(Romanticism) 미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낭만주의
낭만주의 미술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전개된 미술사조로써 이성에 의한 비합리적인 정치체제를 타파하고자 한 계몽주의와 고대 그리스·로마시대 문화에 영감을 받아 대상의 정확한 묘사를 강조하던 신고전주의에 반대하고 화가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고 내면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보여주는 것만이 진실된 것이라고 주장한 화파이다.
18세기 중엽에 시작된 산업혁명을 통해 유럽에 중산 계급이 생기고 富가 축적이 되면서 이들은 개인 별장을 꾸미기 위한 그림을 필요로 했고 화가는 후원자들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화가의 작품 소재가 다양해지면서 사상 처음으로 미술은 화가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신고전주의의 대를 이은 앵그르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화가이기 이전에 혁명가라는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그는 기존의 고루한 방식을 거부하고 소묘보다는 색채를 이성에 의한 탐구에서 비롯된 지식보다는 화가 특유의 상상력을 중요시하였다.
들라크루아가 색채를 강조한 베네치아 화파와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루벤스를 흠모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미술(Art)'이라는 말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19세기 미술사는 결코 가장 성공하고 가장 돈을 잘 번 거장들만의 역사는 아니었다. 19세기 미술사는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탐구하여 기존의 인습을 비판적으로 대담하게 검토하고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창조해낸 외로운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하겠다.
-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위 작품이 화단에 던진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화면 전체를 덮고 있는 군상들의 휘몰아치는 역동성, 사건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진실된 표현이 보는 이들의 감정을 터치하였기 때문일 터.
이 작품이 앞서 언급된 '키오스 섬의 대학살'이라는 작품이다.
그리스와 오스만 투르크(Ottomans, 지금의 터키) 간의 전쟁에서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 중 하나로 키오스 섬에서 있었던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투르크군이 무참히 학살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비극적 사건임에도 붉은색, 푸른색 등 밝은 색을 사용했고, 시선의 중심이 느껴지지 않으며, 대담한 붓질과 표현의 모호함으로 인해 1824년 살롱전에 출품했을 당시 그 독창적인 기법으로 낭만주의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
오른쪽 아래에 죽은 여인의 젖을 빠는 아이의 모습이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역동성을 묘사하는 데 말(馬) 만한 소재가 없으므로 낭만주의 화가들이 그림 속에 많이 포함한 것 같다.
다음은 낭만주의 회화 시대를 연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떤 그림보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몰고 온 그림이다.
1816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3년 뒤 '사건의 재구성'을 한 것.
프랑스 정부 소속의 메두사 호가 이주민과 군인들을 싣고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세네갈로 항해를 하는 도중에 좌초가 되었다.
그런데 함장과 고급 장교들이 지들만 살겠다고 서둘러 보트로 탈출하고 - 세월호 사건의 원조란 말인가 - 배에 남겨진 150여 명의 하급 선원과 이주민들은 뗏목을 엮어 만들어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며 거친 바닷속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게 된다. 극심한 굶주림과 사투를 벌인 끝에 살아남아 구조된 생존자는 단 15명. 구조된 배에서는 핏자국과 인육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고 전해진다.
정부는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은폐하려고 했지만 살아남은 생존자인 한 외과의사가 이를 폭로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제리코는 전체적으로 죽음을 앞에 두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처절한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캔버스 좌측 상단에서 우 하단까지의 대각선을 그려보면 왼쪽 아래의 부류는 삶을 포기한 절망적인 군상들의 모습을 오른쪽 상단에는 옷을 흔들며 구원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려놓았다.
작품 소개 푯말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The work offes a vision of hell in which each individual's humanity is put to the test."
지옥의 나락을 경험할 때 비로소 인간성이 시험을 받게 된다는 것.
가운데 손을 들고 구조선이 온다고 팔을 뻗은 이가 바로 생존한 외과의사로 그는 이 사실을 책으로 출간하여 세상에 폭로하게 된다.
가운데 하단에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듯 왼팔을 내민 채 죽은 듯 누워있는 사람은 외젠 들라크루아라고 한다. 들라크루아의 7년 선배이기도 했던 제리코가 이 작품을 그린다는 것을 알고는 모델을 자청했다고 전해진다.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 속에서 절망과 희망의 이분법적 피라미드 대칭 구도에 인상을 받아 그의 그림 '키오스 섬의 대학살'에 차용하였다.
제리코는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실제 시체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생존자와 직접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이렇듯 낭만주의 화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역동적이고도 현실적인 장면을 보고 격앙된 감정을 느끼게 하려고 하였다.
제리코의 '돌격하는 샤쇠르'.
이 작품은 제리코가 스무 살 때 그린 작품으로 무명의 장교가 말 탄 모습을 통해 Military heroism 을 불러일으켰고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비로소 명성을 얻게 된다. 그의 에너제틱 한 화풍은 폴 루벤스에 영감을 받았고, 나폴레옹의 왕실 화가였던 앙투안 장 그로(Antoine Jean Gros)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그의 시도 즉 운동성과 구도의 예를 보여준다. 이는 프랑스 낭만주의(French romanticism) 회화의 효시가 된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아래)의 그것과 비슷한 심상을 준다.
위 그림은 신고전주의의 대부(God Father) 자크 루이 다비드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가 점령한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어릴 적 표준 전과의 표지에서 익히 봐왔던 그림. 호령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이 정말 멋지지 않은가!
위 그림은 2개 남아있는데 프랑스 말 메종 성과 오스트리아의 벨베데레 궁전이다.
(2019년 오스트리아 벨베데레궁전에서 드디어 마주하게 된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보다 이 그림이 더 좋았다.)
이어지는 그림은 프랑스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의 정치 선동에 헌신했던 화가 앙투안 장 그로(Antoine-Jean GROS)의 대작들.
보나파르트가 장교 시절에 자파라는 전장에서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현장을 방문하여 장병들을 위로했다는 내용을 그린 정치 선전화되겠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다는 사실. ㅎ
이집트에서의 승리 이후에 팔레스타인 지방으로의 진격을 꾀했으나 전염병이 창궐해 그의 군대도 타격을 받게 된다.
장 그로는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서 장군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 장병들을 향한 애정 어린 보살핌을 강조해 그렸다.
왼쪽에 실의에 빠져 죽어가는 장병들의 분위기는 shading 처리하고 나폴레옹이 서 있는 우측을 밝게 처리하여 contrast 효과를 주었다.
장 그로는 마치 나폴레옹이 예수가 된 마냥 옷을 벗은 나병환자를 고치는 것처럼 그를 신격화하였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이어지는 다음 그림은 그의 전작들보다 인정받은 작품이다.
장 그로의 '아일라우전투에서의 나폴레옹'으로 러시아-프로이센 동맹군과 등 프러시아 지역 아일라우에서의 전투 현장을 묘사한 그림으로, 극심한 추위를 이겨내고 나폴레옹은 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승리의 대가로 큰 희생을 치르게되었다.
다음날 전장을 방문한 나폴레옹이 의사에게 부상당한 적군 병사들을 치료하라 명하는 모습을 통해 그의 연민 어린 모습을 나타내려 하였다.
(왼쪽에 모자를 쓰고 나폴레옹을 향해 왼손을 뻗은 러시아 포로와 그를 부축하는 의사가 보인다.)
나폴레옹의 평정심이 전쟁의 참상을 다소 완화시키는 느낌을 주려고 하였다.
프로파간다는 마찬가지. 하지만 전작과는 달리 전쟁의 참혹함을 진실되게 마치 자신이 경험한 것인 양 그려내었고 관객의 감정을 동요시키고 이들에게 큰 페이소스를 던져주고 있다.
혹한에 얼어붙은 시체의 묘사가 장 그로의 그림답지 않게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이고 생생하다. 전쟁의 공포를 되새기게 하는 이 섬뜩한 시체더미의 묘사로 인해 이 작품은 기존에 그가 그린 나폴레옹의 역사화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
-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1
장 그로의 작품이 화가 개인의 감정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 정치 선전 도구로 활용됐다는 것으로 인해 그의 작품은 후대에 높이 평가를 받지 못한다. 신고전주의가 대체로 정권에 봉사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들라크루아가 선봉장이 된 낭만주의가 후대에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현실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전하려고 했던 데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자 다시 들라크루아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이보다 더 위대한 화가의 미래를 보여주는 작품은 없다."라는 호평을 받은 들라크루아가 청년 시절에 발표한 첫 살롱 작품.
Dante's Inferno를 화폭에 옮긴 것으로 지옥 8곡에서 이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의 도시인 Dis로 가는 도중 플레기아스 - 아폴로 신이 자신의 딸을 겁탈하자 델포이(Delphi) 신전을 불지른 장본인 - 가 만든 배, 이른바 단테의 범선(Barque)를 타고 Styx (스틱스) 강을 건너는 장면을 묘사했다.
한때 그의 적이었던, 이제는 亡者가 되어 지옥에서 떠도는 영혼이 된 필리포 아르젠티(Argenti)를 만나게 되는데.. 유난히 흰 몸에 두 손으로 배를 전복시키려 하는 남자가 아르젠티인 듯. - 아르젠티가 이탈리아어로 '은(Silver)'을 뜻하기 때문. 그는 사치스러웠던 권력자로 그려진다. 붉은 두건을 한 이가 단테.
들라크루아는 미켈란젤로와 루벤스의 작품을 참고하여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한 격동하는 감정을 묘사하는 낭만주의를 창조하게 된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대작들로 넘치는 19세기 프랑스 회화관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들라크루아의 역작, 어찌 보면 그의 혁명적 기질이 작품 속에 배어있는 대작.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필자가 루브르에서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다. 두 번째 재회.
자크 루이 다비드의 추종자로서 신고전주의의 기수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ye Ingres)와 반대편에 섰던 인물들의 구심점이 외젠 들라크루아였다.
그는 아카데미 화풍과 단절을 선언하고 1832년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아랍 세계의 눈부신 색채와 낭만적인 풍속을 연구하고 돌아와 낭만주의 회화를 완성시키게 된다.
"나는 비로소 현대적인 주제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만일 내가 나의 조국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면 나는 그림으로라도 그녀를 그릴 것이다"라고 들라크루아는 그의 형에게 편지를 썼다.(1830년)
혁명의 나라 프랑스의 화가답게 그의 몸에도 혁명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화폭 속의 여인*의 몸에 전이된 듯 자유를 향한 몸짓으로 化 한다.
* 그녀가 쓴 모자는 고대 로마의 노예들의 자유를 상징하는 프리기아 모자
샤를 10세의 몰락과 루이 필립의 권력의 상승을 야기한 1830년 7월 혁명을 그린 작품으로 매우 강력하고 독창적인 현대 알레고리 즉, 상상력의 집합체인 '삼색기를 흔드는 女神'으로 그려냈다.
바닥에 나뒹구는 정부군을 밟고 일어서서 정권의 전복을 외치는,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민중을 이끄는 이 당당한 여인은 그리스 여신을 모티브로 삼았다. 즉, 그녀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민중의 혁명을 이끄는 알레고리로 사용한 것.
그녀의 젖가슴은 프랑스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슴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주는 감성적이고 초인적인 심상은 민중의 마음에 혁명의 불꽃을 발화시켰을 테니까. 그 시대에 이 그림을 본 누군들 그러하지 않았으랴.
파리 7월 혁명
샤를 10세가 집권하게 되자 언론을 탄압하고 의회를 탄압하는 등 또 독재정치가 시작이 된다. 이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노동자에서부터 신흥 부르주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가담하여 1830년 7월 27일부터 3일간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게 되고, 마침내 정부군을 패퇴시키고 샤를 10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게 된다.
삼색기의 세 가지 색은 '자유-평등-박애'를 의미하며 프랑스의 국민의 정체성이다.
이렇듯 프랑스는 여러 번 황제 혹은 왕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이력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국민들을 가장 두려워한다.
국민들 역시 그들의 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봉기하여 그들의 의사를 표출하는 것은 민중의 당연한 권리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러니 '18년 말 정부의 조세개혁 정책에 반대한 이른바 '노란 재킷' 시위가 일어나고 마크롱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니겠는가. 프랑스에서는 굉장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2000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국민의 목소리가 집단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는데,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의 선진 민주주의에 비해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 하겠다. 우리나라는 유교문화권에 군사 통치 시절을 겪어서인지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것에 익숙한 모난 돌이 정 맞는 문화가 아닌가. ㅎㅎ
또 하나의 위대한 화가의 작품을 소개하기 전에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로 몇 점을 소개한다.
프랑스 극작가 샤토브리앙의 소설 'Martyre'을 배경으로 한 폴 들라로슈의 그림. '젊은 Martyr'
기독교 박해 시기에 그들의 신념을 포기하기를 거부한 이들이 로마인들에 의해 결박된 채로 강에 던져져 죽음을 맞이하곤 했는데 들라로슈는 젊은 부인의 죽음을 통해 가슴 아픈 희생을 관객들에게 통렬히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처음에 소설 '햄릿(Hamlet)'의 여주인공 오필리어가 물에 빠져 죽게 되는데 이 작품이 그녀를 그린 것인 줄 알았는데... 여하튼 그 이미지가 중첩되는 것은 사실.
미술관 소개 책에서 봐왔던 많은 그림들을 실제 목도하게 되니 다리 아픈 줄 모른다. 작품이 주는 느낌, 심상을 잘 기억해야겠다는 생각뿐.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중간 벽에 앵그르의 그림이 걸려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가 16세기 서사시의 주인공인 Roger라는 기사(Knight)에 관한 일화를 소재로 그린 작품. 보는 바와 같이 바위에 묶여 바다 괴수의 제물이 될 처지에 있던 여인을 로저가 창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앵그르는 이 작품을 위해 여인의 똑같은 포즈의 여러 습작을 그렸다.
앵그르에 대한 설명은 뒤에서 이어진다.
2002년에 루브르에 걸리게 된 이 작품은 지로데(Girodet)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라고 알려진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그리스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상아- 그래서 그녀의 몸이 백옥같이 흰 것인지 -로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비너스에게 피조물인 조각상에게 생명을 줄 것을 간청하게 되고 비너스의 도움으로 그녀가 생명을 얻어 그와 결혼까지 하고,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하는 그리스 신화로 이 소재는 후대 여러 작품 속에서 인용된다.
갈라테이아를 보고 완전히 정신을 빼앗긴 피그말리온의 얼굴 표정이 재미있다.
둘 사이를 연결해 준 것이 바로 비너스라는 것을 암시하듯 귀여운 큐피드의 모습~
그림에서 보듯 어떠한 붓 터치도 발견하지 못할 만큼 작가의 탁월한 그림 솜씨를 볼 수 있다.
나폴레옹 시대의 신고전주의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기서 우리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라는 당대 최고의 화가를 만나게 된다.
위 작품은 '테모필레의 레오니다스'라는 작품으로 영화 300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스파르타의 장군 레오니다스를 영웅적인 이미지로 묘사한 것이다. 군대 영웅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다분히 선동적인 의미가 내포된 작품이라 하겠다.
인물의 정확한 비례와 균형을 강조하고, 고전적인 주제를 단순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자 한 신고전주의를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
신고전주의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전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 양식.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 등이 우선시된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강한 도덕적 합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또한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삶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 등이 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대표 화가로 꼽히는 화가이자 나폴레옹의 수석 화가이기도 했다.
황제의 수석 화가라는 말은 체제를 선전하고 정권을 미화하는 일에 헌신한 사람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클래스로 인정받던 로마 아카데미로 유학 - a.k.a 그랜드 투어(Grand Tour) - 을 떠나 미켈란젤로와 푸생 등의 화풍에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한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와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풍을 이끌게 된다.
로마에 비해 늘 변방이었던 프랑스의 미술 수준을 한 단계 올린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 화가로서의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재주가 너무 많아서였나. 늘 권력은 그를 필요로 했고 그 역시 권력을 쫓는 부나비 같은 존재였다.
나폴레옹의 영웅적인 면에 반해 그를 찬미하는 작품을 그렸고, 그의 몰락을 직접 곁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로베스피에르 편에 가담했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하기도 했다.
그의 화려한 정치 전력으로 인해 고국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죽어서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고
국 프랑스에서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가 프랑스 회화에 남긴 족적은 실로 대단하다. 하지만 권력의 시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그의 최고의 작품인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맞은편에 그의 자화상이 걸려 있는데, 그의 작품을 보러 몰려드는 인파를 무표정으로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이 자화상은 그가 대혁명 이후에 체포되어 감옥에 있을 때 그린 그림이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라는 작품이다. 살롱 작품(1808)
다비드의 그림을 보노라면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 생동감 있게 인물을 잘 묘사할 수 있는 것인가.
정말 그림 잘 그린다. 필자는 이렇게 그림 잘 그리는 화가들의 작품을 좋아한다. 물론 몇 년 전부터 인상주의 화파가 좋아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신고전주의 화풍대로 단순하고 명확한 주제를 그리고 있어 이해하는 데 어렵지는 않다. 사비니 여인이 양측의 싸움을 중재하고 있는 그림.^^
왼쪽이 사비니 부족의 왕인 타티우스이고 오른쪽 창을 든 이가 로마의 왕 로물루스이다.
가운데 비운의 여인은 로마 부족에 납치된 사비니족의 헤르실리아라는 여인으로 로물루스의 처가 되었고 아버지와 남편의 싸움을 뜯어말리고 있는 장면이다.
전사들은 그리스 운동선수처럼 heroic nudity로 묘사하였다. (한편, 로물루스의 Buttock 은 로마의 Buttock 인가. ㅋ)
이 전쟁통에 무고한 이 아이들의 모습을 보라. 천진난만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아이. 누워서 손가락을 빨고 있는 아이. 이들을 보호하려 (어미새가 아기새를 품듯) 팔을 벌리는 여인의 자세에서 모성애가 뿜뿜.
마나님은 (아들 녀석 생각이 났는지) 아이가 예뻐 사진 찍어달라고 했는데 필자는 저 여인의 가슴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는.ㅎ
비로소 자크 루이 다비드의 최고의 화제작 순서입니다.
"루벤스 작품처럼 아름다워!" 이 작품을 본 테오도르 제리코의 말이다.
실제로 이 작품의 모티프는 루벤스(Rubens)의 Marie de Medicis(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리슐리외관 3층)의 Marie의 대관식(Coronation) 이었는데, 이 작품에는 바로크식의 수직적 화면 구성을 적용해 형식적인 위엄(Grandeur) 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다비드는 새로운 기법을 적용하는데 등장인물들을 그룹핑해 빛을 달리 적용하여 contrasting 효과를 극대화하였고, 빛의 대비로 이 역사적인 사건을 눈에 생생하게 들어오도록 하였다. (1808 살롱 작품)
원제는 좀 길다. 'The Coronation of the Emperor Napoleon I and the Crowning of the Empress Joséphine in Notre-Dame Cathedral on December 2, 1804.'
나폴레옹이 황후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우려고 하는 장면을 포착한 것. 배경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실제 대관식에 참석한 인물들을 그린 것이고 모델이 된 이들은 대관식 때 입었던 옷을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191명에 해당하는 등장인물의 얼굴과 코스튬의 상세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이 그림을 본 나폴레옹이 엄청 맘에 들어 해 다비드에게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옹 도뇌르를 하사했다고.
(똑같은 작품이 베르사유 궁전에 걸려있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위해 다른 성당을 노트르담 대성당처럼 꾸며놓고 2년간 작업을 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캔버스 크기에 또 놀라게 되는데 어쩜 이렇게 큰 캔버스에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 것인지, 공중에 떠서 그리는 것도 아닐 테고 작품을 밟고 그리진 않을 텐데 하는 궁금증이 떠오른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 이 작품은 루이 16세의 주문으로 그린 작품이다.
로마와 이웃 도시국가 알바(Alba)사이의 전쟁의 에피소드를 그린 그림으로 알바에서 선택된 Curiatii 가문과 결투를 위해 선택된 로마 호라티(Horatii) 가문의 3형제가 아버지에게 승리할 것을 맹세하는 장면.
전사들의 결의에 찬 모습과 오른쪽에 비탄에 빠진 딸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세 아들과 아버지가 형성하는 5각형의 기하학적인 구도는 표현의 엄격함과 드라마틱 한 긴장을 형성해 주제를 더욱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 작품 역시 조국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공화정의 프로파간다로써, 정치 선동에 사용되었음을.
암튼 유명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일명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으로 알려진 작품. 우아한 여성이 앉아서 관객을 응시한다.
이 여인은 줄리엣 레카미에(Juliette Récamier)라는 파리 은행가의 아내로서 동시대에 꽤 유명했던 여인이었다.
고전적인 드레스를 입고 폼페이아 스타일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자태는 패셔니스타 그 자체였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림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마무리됐고, 오히려 이것을 통해 화가의 생기 넘치는 붓 터치와 반투명한 컬러로 칠한 배경에 주목하게 한다.
사진보다 현장에서 직접 보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자크 루이 다비드 초상화와 이웃하고 있다.)
한편, 그녀가 앉은 의자를 레카미에 의자라고 후세에 불리게 된다.
이렇게 다비드의 대작을 숨 가쁘게 만나보았다. 역사의 질곡을 경험한 비운의 화가. 정치 전선에 뛰어든 이력으로 역사에 비판을 받지만 그의 작품들이 주는 강렬한 메시지는 뇌리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다비드의 후계자인 앵그르의 작품을 소개한다.
앵그르의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오달리스크(Odalisque)' 가 관객을 맞이한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의 1814년 작품으로 나폴리의 여왕 Caroline Murat 가 의뢰하였다.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과 더불어 앵그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 속 소품은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모델은 고대 님프부터 라파엘의 누드, 카노바에 이르기까지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빛이나 그림자에 대한 묘사가 없어 다소 어색한 느낌이고 그녀의 비정상적으로 길고 구부러진 허리는 과연 '사람의 허리가 아니므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매끄러운 허리는 리듬감을 형성하고 매혹적인 자태를 강조하는 효과를 준다.
한편, 오달리스크는 오스만 투르크 황제 술탄의 여종을 뜻한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인의 모습이 이런 것인가. 앵그르는 이렇게 여인의 뒤태를 보여주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나는 이 여인을 볼 때마다 생선뼈가 생각이 난다. 나만 그런가? ㅎ
앵그르는 다비드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 못지않게 일가를 이룬 화가로 신고전주의를 널리 전파했으며, 동시대의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화풍과 대결을 펼친 화가이기도 하다. 위 그림에서 보듯 전통적인 해부학에 기초하지 않고 다소 형태를 왜곡하더라도 곡선의 아름다움에 집중한 것처럼 화가의 개성을 표현한 것은 스승 다비드와는 다른 점.
(그의 작품은 프랑스 남부 엑상 프로방스의 그라네 미술관(Musée Granet)에서 대작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교과서에서나 봤을 작품들을 몸소 접하게 되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느덧 오후 4시쯤 되었고, 다음 일정을 위해 박물관을 나온다.
하루 만에 루브르를 둘러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임을 느끼며 수요일 야간 개장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린다. ㅠㅠ
오늘은 0층과 1층을 중심으로 관람하였고 야간 개장 시에는 2층을 둘러볼 것을 기약하며.. (그러나 끝내 다 보지 못했으니.)
지금부터는 수요일 저녁 루브르 박물관 야간 개장(수·금요일 21시 45분까지) 시 관람한 작품들에 대한 기록이다.
I'm back. 시간은 오후 6시.
미처 다 보지 못한 작품들 이번에는 기필코 다 봐주겠어! 다시 한 번 투지를 불살라본다.
루브르 박물관 안마당에 '태양왕' 루이 14세의 멋진 기마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기마상은 이탈리아의 바로크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의 작품.
나폴레옹. 그는 앙리 4세와 더불어 루브르 박물관의 컬렉션 구축에 큰 기여를 한 왕이다.
루이 14세 이전에 왕실 컬렉션이 백여 점에서 무려 3천여 점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예술 문화 사업에도 관심이 많아 궁정 화가들을 적극 양성하고 그랑 투어를 통해 해외 선진 기법들을 습득하게 하여 국내 후학 양성의 선순환 체계를 구축하였다.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하던 1981년 시작된 박물관 복원 공사는 1989년에 완공되었다.
이때부터 새로운 출입구로 이용되고 있는 투명한 유리 피라미드는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예오 밍 페이(Ieoh Ming Pei)의 작품이다.
처음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지금은 루브르를 빛내는 또 하나의 걸작이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야경을 멋지게 만들어준다.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쉴리관(Sully)으로 이동한다.
쉴리관 2층에는 1650~1850년의 프랑스 회화가 전시돼 있다.
19세기 프랑스 풍경화가 카미유 코로의 작품이 걸려있다. 말로만 듣던 그의 작품을 처음 보게 된다.
옛 프랑스의 어느 마을로 가는 풍경을 그린 것인데 한 편의 시(詩) 적 느낌이다.
그 옆에는 바르비종 화파를 이끈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작품들이 작은 액자에 걸려 있다.
그는 풍경화에 멈추지 않고 농부들이 이러한 풍경에서 일하는 모습을 그려내었다. 그의 작품들은 왠지 오르세 미술관이 더 어울리는 느낌. (오르세 미술관에서의 밀레 작품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인제 그림만 봐도 누구의 작품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들라크루아는 아랍에서 목도한 강렬한 색채와 낭만적인 풍속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야생 돼지를 잡는 사자의 역동적인 모습을 그린 그림. 제리코도 그렇고 들라크루아도 말, 사자 등 동물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자주 그렸다.
파리 생제르맹 데 프레 지구에 '들라크루아 미술관(Musée Eugene Delacroix)'이 있다.
그가 실제 살던 집이었고, 그의 작품들과 화구 등이 전시되어 있고, 무엇보다 작은 안뜰이 조용히 명상하기에 참 좋은 공간이라고 하는데 가보지 못한 것이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이렇듯 여러 번의 연습을 통해 대작을 그려 낸 것이다. 위 그림에서는 구조선으로 보이는 배가 또렷하다.
940호실에는 앵그르의 유명한 작품들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는 로마 아카데미 유학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증거로 실물 사람 크기의 누드화를 파리로 보낸다.
어떠한 설명도 없고, 해부학적 정확성이 일부 결여되어 있고 다소 시적인 느낌을 주는... 그러나 그는 이 주제에 매우 만족하고 이후 작업에서 여러 번 Re-use 하고 있다. (위 여인이 정말 여러 그림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아래 터키탕도 그렇고.)
19세기 전반기의 보수파 화가들의 지도자는 장 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였다.
그는 다비드의 제자이자 추종자였으며 다비드처럼 고전기의 영웅 미술을 숭배했다.
앵그르는 학생들에게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즉흥성과 무질서를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위 작품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을 보면 그림을 그린 것인지 사진을 찍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소묘와 데생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답게 여인의 몸에 붓 자국 하나 없이 부드러운 묘사가 압권.
우측 광원으로 인해 방금 목욕을 마친 여인의 몸이 우윳빛으로 빛난다.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왼쪽은 짙은 커튼을 배치하였다.
상체에 비해 다리가 좀 짧아 보인다. 그리고 등은 펑퍼짐한 느낌인데, 전에 소개한 '오달리스크'처럼 신체의 왜곡을 통해 그가 드러내려고 했던 가치(value)를 관람객에게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면 그에게는 분명 시도해볼 만한 것이었다.
작품 표면의 굴곡은 이 작품의 세월의 흔적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다.
신고전주의자의 기수였던 앵그르는 낭만주의의 대척점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낭만주의가 강조한 모호성, 역동성을 경계하였다.
당시 이들 두 부류 간의 대립을 보여주는 삽화. 들라크루아는 색채를, 앵그르는 선을 강조하였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화파는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방식은 정반대였지만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를 자극하면서 '동반 성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발팽송의 여인 또 왔에요~
위 1808년작의 축소 버전 되시겠다.^^
자 이번에는 등짝만 보여주는 것이 아닌 여인의 전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열쇠 구멍을 통해서 말이죠.~
앵그르의 또 다른 대표작, '터키탕'
이 작품은 앵그르의 조각과 누드의 에로틱한 영향에 대한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상상 속의 하렘(harem), 새로운 버전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이 근 50년 만에 다시 등장하였다. 이 번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으나 뒤태는 똑같아. 나이를 먹지 않는 듯.ㅎ
또한, 그의 작품 '샘'에서 본듯한 여인도 보인다.
화가는 여기서 여인의 얼굴, 피부색이 다른 다인종을 그렸다.
동그란 형태의 캔버스- 이를 톤도(tondo) 라 한다. -에 그림을 그려 관객으로 하여금 여인들의 은밀한 장소를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난 그러고 싶지 않았어~
자 어느덧 루브르 박물관 작품 소개도 막바지로 향하고 있으니 힘내시길~ 이 긴 포스트를 작성하는 저도 참 보통은 아닌 듯.ㅋㅋ
예까지 페이지 안 돌리고 쭉 보신 분들은 진정 미술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인정합니다!
다음은 프랑수아 제라르(François GÉRARD)라는 화가의 작품들이다.
처음 들어본 이름의 화가인데 주로 초상화를 많이 그린 화가인 듯.
사진 속 여인이 필자를 빤히 쳐다보고 무언가 말을 건네려는 듯하다. '저 오늘 한가해요~'
얼굴의 명암 처리와 여인이 입고 있는 투명한 의상의 세부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여인의 '순결'을 부각시키기 위해 커튼을 어두운색으로 설정하여 우윳빛 피부가 도드라져 보인다.
그녀는 훗날 또 다른 초상화가 Jacques-Luc Barbier의 부인이 된다.
1800년대의 여인이지만 그림 속에서 마치 살아 있는 듯 자기를 보러 온 관람객들에게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 작품을 보고 서야 아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제라르였구나 무릎을 쳤다.
'프시케와 큐피드'. '큐피드의 첫 키스를 받는 프시케'로도 알려져 있다.
프시케는 나비로 형상화되는 정신의 인격체인데, 그녀는 느낄 수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큐피드의 손길에 자극을 받는 이미지를 표현했다.
화가는 안토니오 카노바(필자가 초반에 언급하였음.)의 대리석 조각 작품에 감명을 받아 부드러운 육체의 색조와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는 여인의 순결을 잘 그려냈다.
프시케의 머리 위로 나비 한 마리가 펄럭이며 날고 있고, (프시케는 그를 볼 수 없지만) 큐피드가 살포시 그녀를 껴안으며 키스를 하고 있다. 그녀는 이마의 감촉을 느끼고는 무언가 모를 느낌에 빠져든다.
프시케의 아름다운 젖가슴. 그리고 하복부에 두르고 있는 투명한 옷의 주름진 묘사가 인상적이다.
십수 년 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루브르전을 했을 때 이 작품이 전시회 홍보 포스터로 사용되었던 기억이 난다.
암튼 인기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특히 여성분들에게!
계속해서 쉴리관 2층 18세기 후반의 역사화들이 있는 장소로 이동한다. 934호 전시실. 정말 가도 가도 끝없이 전시실이 이어진다.
다음 작품은 비교적 큰 작품으로 Louis LAGRENÉE라는 화가의 작품.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군을 패퇴시키고 알렉산더 대왕은 감금했던 적장의 부인이 죽자 이를 위로하러 그녀의 침상으로 오는 장면을 그린 것.
재밌는 사실 하나. 그는 베르사유궁전에 있는 Charles Le Brun의 작품 'The tent of Darius'(1660년)을 모방해서 이 그림을 그렸기에 고소를 당했다고 한다.
다음에 소개할 작품. 이 작디작은 그림을 발견한 순간 너무 기쁘고 반갑기까지 하였다.
샤르댕(Chardin) 이 그린 작품으로 평온한 가정의 일상의 단면을 잔잔히 보여주는 작품.
식사를 앞두고 '기도하고 밥 먹어야지~' 말씀하는 어머니를 보고 어린 숙녀가 두 손을 모은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따뜻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광경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주로 묘사된 '은혜(grace)' theme는 이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광경으로 묘사된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
이 화가를 두고 곰브리치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극찬하신다.
화가는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들 중에 제일 위대한 화가는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이었다.
샤르댕은 이러한 서민 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詩情)을 느껴 화폭에 담은 면에서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와 유사하다.
...
우리는 이 작품에서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와 꾸밈없어 보이는 화면 구성의 솜씨를 발견하게 된다.
-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다음은 루브르 팸플릿에도 찾아볼 수 있는 작품으로 로코코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 바토(Watteau)의 작품이다.
바토의 '피에로 질'. 이 화가는 프랑스 로코코 회화의 막을 연 화가이지만 본 作에서는 예의 장식적인 느낌이 없다.
그림 속 피에로는 화폭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부각돼 있으며, 피에로의 본분(?)에 어울리지 않게 삶의 무게에 짓눌린 피곤한 기색이다.
벨로니라는 전직 배우가 소유한 카페의 간판으로 사용됐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필자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작품. 화려한 로코코 풍이면 또 모를까.
912 전시실을 가면 예전에 책에서 봤던 작품이 등장한다.
자기가 쥔 패를 허리 뒤로 관객에게 슬쩍 보여주는 남자와 시중드는 여인과 함께 무언의 눈빛을 교환하는 여인의 눈매가 재미있다.
등장인물의 시선처리가 다 달라 뭔가 cheating 하는 분위기. 오른쪽의 naive 한 청년을 속이기 위해 이들은 짜고 치는 고스톱을 시전하는 중인 것.
시간은 어느덧 8시. 이쯤 되니 이곳의 모든 작품을 둘러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고.. 어차피 다 못 볼 거, 필자와 마눌님은 1층으로 내려가 전에 봤던 작품 중 인상 깊었던 프랑스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회화를 다시 보기로 한다.
가는 길목에 아폴론 갤러리를 만나게 된다.
루이 15세의 다이아몬드 왕관이다.
3대 여신 중 필자의 가슴을 흔들었던 '사모트라케의 니케' 조각상을 다시 찾았다.
지난번에는 바글바글 대는 인파로 어수선하고 무슨 만남의 장소에 와 있는 분위기였는데 야간 개장은 사람이 없어 감상하기에 참 편하다.
루르브 야간 개장도 적극 활용하면 보다 쾌적한 분위기에서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 잊지 마시길.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앞에서 커플 사진도 함께 찍고. 남은 시간 이리저리 둘러본다.
다시 봐도 그 감동은 여전하다. 그러니 명작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루브르 야간 개장도 마치고 발걸음을 돌린다.
시간은 밤 9시.
밖에 나서니 피라미드가 조명을 밝히고 있다. 밤하늘의 달빛도 비쳐주고.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Claude-Achille Debussy)의 달빛?
이렇게 파리 루브르 박물관 관람기를 마친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 중인 작품들을 모두 다루지는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2층 루벤스의 대작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연작이 전시된 '메디시 갤러리'를 돌아보지 못한 점, 베르메르를 위시한 북유럽, 플랑드르 회화관, 그리고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0층의 고대 근동,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조각들.
이틀에 걸쳐 열심히 발품 팔았지만 다 보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다음을 기약하며..
다음은 이 엄청난 포스팅을 마친 소회.
한마디로 홀가분하다. 장장 보름에 걸쳐 수많은 자료를 다시 뒤적여 가며 밤을 지새우던 나날들. 마치 사장님 보고자료를 완성한 느낌? 아니 그보다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이런 역작을 완성한 스스로에게도 놀라며 박수를 보낸다.
미술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해 비평서를 참고해야만 하는 내 지식의 한계를 경험하며 더 많이 보고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도 되었다.
(아마도) 이렇게 긴 호흡의 포스팅- 스압의 진수 -은 익숙지 않아 readable 하지 않았을 터인데 잘 따라와 주신 여러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모쪼록 파리 루브르 박물관 관람을 기대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사전 지식을 제공하고, 미술 사조의 흐름을 짚고, 주의 깊게 봐야 할 작품을 선별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마음이다.
* 본 포스팅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윤운중의 유럽미술관 순례1]등을 참고하였고, 일부 내용을 발췌하였음을 밝힌다. 또한 위키백과는 물론, 루브르 박물관 홈페이지의 작품 해설도 (일일이) 체크하며 참고하였다.
다음 4편은 '퐁피두 센터' 입니다. 많은 기대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