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퐁피두 센터는 파리 4구의 마레-보부르 지역에 위치한 복합 문화 시설로 국립 현대 미술관(4층~6층)을 비롯해 공연장, 극장, 도서관, 서점, 카페 등이 들어선 문화 공간이다.
파리 국립 현대 미술관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20세기 창작된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팝아트, 설치 예술 등 약 10만 점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20세기와 21세기 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들과 핵심 예술 사조를 조명하는 기획전이 열려 늘 새로운 분위기로 단장하고 관객을 초대한다. (그때-2018년 10월-도 일본인 현대 건축가의 거장 '안도 다다오'의 예술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파블로 피카소, 몬드리안, 앙리 마티스, 페르낭 레제, 샤갈, 칸딘스키와 잭슨 폴록, 마르셀 뒤샹 등 세계적인 현대 미술 작가들의 작품들을 편안한 공간에서 관람할 수 있다.
1818년에 개관한 뤽상부르 미술관(Musée du Luxembourg)의 컬렉션을 이관하고 프랑스 정부가 구매한 현존하는 프랑스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립된 국립현대미술관 – 산업디자인센터는 유럽에서 가장 방대한 모던 및 컨템퍼러리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또한 1905년부터 오늘날까지 100,000점 이상의 작품을 수집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미술관 두 곳 중 하나입니다.
- 퐁피두 센터 홈피
아마 또 다른 미술관은 뉴욕의 MoMA (Museum of Modern Art)가 아닐까.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에 의해 계획된 이 복합 문화 공간은 빈민가였던 - 그래서 스트라빈스키 광장 분수 분위기가 좀 섬찟했던가 - 보부르 지역을 쭉 밀어버리고 근대 미술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1만 8천 평방미터 공간을 확보하였다.
당시 파리 건축물의 주 재료는 철근 콘크리트였는데 '이거슨' 거대한 철골 구조 그 자체였다.
그것도 내부에 있어야 할 프레임들이 외부에 노출된 구조로 전기, 수도관, 공조관, 철근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특히 에스컬레이터가 투명한 유리관 속에 설치돼 있어 바깥에서 보면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보인다.
이탈리아의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와 영국의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가 설계를 맡았는데, 당시에 흉물스러운 외관으로 인해 파리 최악의 건물로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 정유소, 비행기 격납고, 고철더미 등 비난을 넘어 이내 법정 소송까지 당하였다. - 지금은 연 인원 800만 명의 관람객을 끌어모으는, 불란서 외화벌이에 일조하는 미술관이다! 에펠탑이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철제 구조물은 영국의 건축가 그룹인 '아키그램(Archigram)' 의 작품들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공상과학 theme에서 아이디어를 따와 철골 등 금속재료를 유연하고, 변형하기 쉽고,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을 즐겨했던 그룹이다.
외관을 보면 아직도 뭔가 건축 중인, 트랜스포메이션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건설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
사진을 찍지 않아 이해를 돕지 못하지만, 퐁피두 센터의 전면 광장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사람들이 자연스레 미술관을 향하게끔 인도한다. 이 완만한 경사에 파리지앵들이 편안하게 앉아 또는 누워서 쉬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퐁피두센터는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떻게 그처럼 거대한 것을 디자인하면서 기념비적이지 않게 할 수 있겠나? 하지만 우리는 항상 광장을 건물과 같은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다. 도시는 파리만큼 붐볐으며 대지를 모두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 렌조 피아노
렌조 피아노는 건축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플리츠커상'을 1998년에 수상하였다. 퐁피두 센터 외에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 스위스 바젤의 베일러 재단 미술관 등이 그의 주요 작품.
파리 중심부에 위치한 까닭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층부에 오르면 에펠탑, 노트르담 대성당(ㅠㅠ), 라데팡스 지구, 몽마르트 언덕, Opera Garnier 등이 눈앞에 펼쳐진다.
위 사진처럼 미술관은 4층~6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4층이 포스트모던, 5층이 모더니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P.M. 6시. 퐁피두 센터 5층부터 관람을 시작한다. (평일 21시까지 개장.)
자 첫 번째 보게 되는 작품은 마티스의 것. 고요하고 조용하고 관능적인 작품?
그가 점묘 화법에 잠시 눈을 돌려 여럿을 남기게 되는데 그 가운데 몇 점을 볼 수 있다.
위 그림은 폴 시냐크로부터 신인상주의(Neo-Impressionism)를 배우고 1904년 여름에 그린 것으로 붓 터치를 끊어 표현해서 색의 밝기와 대조에 의한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에겐 익숙한 방식이 아닌 듯하다. 야수파(Fauvism)의 기수답게 그는 uniform color를 칠하는 것을 더 선호했으니까.
타이틀과는 달리 고요하고 조용한 분위기, 관능적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더라.
야수파 (Fauvism) - 위키백과
야수파(野獸派) 또는 포비즘(fauvism)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예술에서 잠시 나타났던 미술 사조이다. 곧, 20세기 미술은 번 자연주의를 기조로 하는 혁신적 유파(流派)와 사조가 어지럽게 뒤바뀌게 되지만 그 발단이 되는 것은 야수파의 운동이다.
야수파의 흐름 자체는 1900년 경에 시작되어 1910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는 했으나, 실제 야수파 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약 3년 동안 세 차례의 전시회를 갖는 데 그쳤으며 결속력도 약했다. 이 운동의 기수로는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레인이 있었다.
기법 상의 특징은 강한 붓질과 과감한 원색 처리,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도의 간략화와 추상화이다.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밝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지적인 큐비즘과는 달리 감정을 중시한다.
포비즘을 시작으로 화가들의 주관적인 색채 해석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파란색은 하늘, 초록색은 숲이라는 색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화가 특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색채에 투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비평가들은 야수주의 화가들의 성의 없어 보이는 표현, 생략된 묘사 그리고 임의로 색채를 왜곡하는 것 등을 비꼬아 '야수들'이라 조롱하는 의미로 지칭한 것이 그렇게 불리게 됐다고.
부유한 산업자본가로 세잔과 마네 작품을 수집하기도 했던 Pellerin 이 마티스에 의뢰한 초상화.
인물의 개성을 엄격하게 묘사하기 위해 수직성을 강조했으며 이는 인물의 위엄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타이트한 프레이밍으로 불필요한 낭비 없이 오로지 대상에게만 집중하도록 세심하게 구획하였고, 얼굴의 도식화 - 마스크를 쓴 것 같은 몰개성 - 어깨, 팔의 좌우 대칭 등 인물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였다.
마티스의 대표작 중 하나로 디테일한 묘사보다 자신의 생각대로 대상을 간략화한 포비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작품의 의뢰자가 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만족했을지는 의문이다.
위 작품은 마티스가 화가로서의 원숙기를 맞이한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1907년경, 마티스는 포비즘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다시 화실로 돌아와 선과 색을 사용해 대상의 본래 형태와 추상적 형태 사이의 보이지 않는 tension을 반영하는 기법에 대해 탐구한다. 예를 들어 검정 혹은 빨강과 같은 강한 색의 영역은 평면을 모호하게 만들고 볼륨감을 단순하게 도식화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 등.
그는 이런 식으로 평면성(flatness)을 강조하였다. 위 그림에서 보듯 인물 역시 매우 단순화하여 묘사해 부피감이란 것을 느낄 수 없고, 단지 선으로 윤곽(contour)을 구획했을 뿐이다. 이것이 마티스가 본질에 접근했던 방식이었다.
초상화는 가장 호기심을 느끼는 그림 형태다. 그것은 화가에게 특별한 자질을 요구하고, 모델과는 거의 가족 같은 친밀감을 요구한다. 화가는 모델에 대해 어떠한 선입견을 갖지 말아야 하며 공기 중에 떠다니는 모든 냄새를 마시듯 활짝 열린 마음과 무엇이든 느낄 수 있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 Henry Matisse
조르주 브라크 역시 위 작품에서 (마티스처럼) 색의 밝기를 묘사하는 과정 속에서 기쁨을 느끼고 포비즘을 발견하게 된다.
1906년 남부 프랑스 - 아마도 엑상 프로방스 (Aix-en-province) -에서 현대 미술의 아버지 Cezanne의 발자취를 쫓다 1870년대 묘사된 장면을 다시금 캔버스에 옮긴다. 선과 평면의 배치 등에 있어 옛 선배의 작품을 소환해낸 것.
마티스의 그것에 비해 보다 굵고 힘찬 붓 터치가 느껴지며 대각선으로 치켜올려져 공간을 구획하고 관찰자의 시선을 모은다.
필자가 좋아하는 페르낭 레제의 작품도 걸려 있다.
이 아저씨도 마티스와 세잔의 영향을 받아 - 진정 Cezanne 은 현대 미술의 God Father! - 입체파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현대 미술에 접하게 되면 이전 클래시컬한 화풍과 색다른 화법을 목도하게 된다.
화가들의 개성 있고 진취적이고 파격적인 기법이 관객들을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미술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낯설고 때로는 혼란스러운 표현 방법을 접하고는 감탄하기보다는 실망하고 '이 정도 그림은 나도 그리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가의 생명은 '창조'에 있고 누군가의 것을 베껴 그린 것이 아닌 각고의 실험을 통해 - 쇠라의 점묘법을 떠올려보라. 광학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는가. - 새로운 화법을 찾아낸 것이기에 그 가치를 후대가 인정하는 것이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자신만의 화풍. 오늘날의 특허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다소 낯설 게 다가오더라도 이해하도록 노력할 필요는 있다. 왜 그런 방식으로 표현을 했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이다.
레제 역시 대상을 단순화하여 표현했고,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림을 그린 화가로 후기에는 곡선에 집착하여 인물을 동글동글한 형태로 간결하게 묘사하였다.
헌데 내가 기대했던 작품은 어디 간 거냐. 이 작품도 해외 순방길에 올랐더냐?
2008년도 서울 시립 미술관 '퐁피두센터 특별展'에서 보고 느낌이 좋아 엽서를 사서 필자의 책상 간유리 사이에 껴놓고 보던 그림이다. 다시 조우하게 될 것을 기대했는데. 다 운이 맞아떨어져야 하더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공원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이 보기 좋았더랬다. 밝은 톤의.
자크 루이 다비드 탄생 200주기를 맞아 그를 오마주 - 작품의 제목도 'Les Loisirs - Hommage à Louis David'이다. - 하여 그린 것으로 앉은 여인의 포즈는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떠올리게 끔 그린 것이다. 그녀가 쥐고 있는 종이에 그렇게 쓰여 있다!
여튼 위 작품은 퐁피두 센터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데 없어서 아쉬움이 컸다.
위 그림은 야수파의 기수 중 한 명인 앙드레 드레인의 작품이다.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옮겨온 그의 세 작품 중 하나로, 그가 한때 천착했던 포비즘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다.
'세잔의 사과'가 어렴풋이 교차된다. (아래에 기술함.)
앙드레 드레인은 그의 삶 내내 고대 폼페이 미술에서부터 시작해 네덜란드의 화가들과 카라바조를 답습하고, 쿠르베의 사실주의와 세잔에 이르기까지 천 년 동안의 미술 사조를 응축하고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1938년 11월, 폴 로젠베르크 갤러리에서 이 작품을 포함해 조르주 브라크의 최신 작품을 전시했는데 뤽상부르의 큐레이터가 이 작품을 사기로 결정하고 - 당시 뤽상부르에는 브라크의 작은 정물화 2점밖에 없었다. - 흥정을 하는데, 로젠베르크 갤러리는 20만 프랑을 요구하였다.
흥정 끝에 10만 프랑으로 깎긴 했지만 여전히 큰 비용이었다.
결국 이 작품은 이듬해 7만 5천 프랑의 가격에 주 정부에 넘어가게 되고, 몇 년 후 파리 Palais de Tokyo 지역의 파리 시립 근 현대 미술관(Musee National d'Art Moderne)의 개관 작품으로 모셔지게 된다는 재미난 히스토리가 소개 자료에.ㅎ
- 파리 시립 근 현대 미술관에는 야수파와 입체파의 작품들이 많이 소장돼 있다고 하니 방문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티스의 벽화 '춤'이 유명.
가장 유명한 현대 미술가인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이 빠질 수 없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 왕립 미술관'에 그의 대표작 '게르니카' - 해외 반출 금지 & 사진 촬영 금지 -를 보았다.
1937년, 스페인 내전 기간에 독일 아돌프 히틀러의 지지를 받은 프랑코가 속한 왕당파의 요청으로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의 게르니카라는 마을에 독일군이 (전무후무한) 비행기 폭격을 가해 1,500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들이 무참히 목숨을 잃게 되었다.
피카소는 스페인 공화국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 - 우리나라도 일제 치하의 설움을 알리고자 한 바로 그 장소 - 스페인관을 위한 벽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게 되고, 이 사실에 분개하고 있던 그가 전쟁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대형 캔버스에 옮긴 것이다.
입체파에서부터 대상에 대한 분할이 본격화된다. 완전 '추상화' 전 단계인 것이다.
이전 세대 화가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새로운 사조를 창출한 피카소. 대상의 한쪽 부분만을 관찰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짜깁기' - 정말이지 필자가 생각한 것이지만 이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함. - 해 하나로 결합해 보여준다. 일찍이 피카소는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의 대상을 관조하는 기법에서 힌트를 얻어 입체파를 창안해 낸다.
피카소의 작품들은 파리 국립 피카소 미술관에 가장 많이 전시가 돼 있으니 화려했던 그의 여성 편력과 함께 그의 작품의 서사시를 확인하고픈 분들은 그기에 가보시기 바란다. 필자는 피카소를 썩 달갑지 않게 보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예술에의 영감 운운하며 여자를 여섯 번 바꿨던 - 공인된 여인네만 7명이란 말이다. 그런 면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오귀스트 로댕과 함께 정말 쌍벽이다. - 그가 곱게 보이지 않으니까. 예술가라면 다 그런 거지라고 치부하기엔 정도가 심(각)했다. 아니 예술가라고 그래도 되냐?
자 이제 그럼 그 유명한 '세잔의 사과'를 보자.
세잔(Cezanne)의 친구였던 에밀 졸라 - 그는 소설가였고 그의 어느 작품에서 실패한 화가가 등장하는데, 세잔은 그 화가가 자신을 빗댄 것임을 알아채고 절교를 선언한다. -에게 '사과 하나로 세상을 놀라게 하겠어!'라고 일갈하며 내 민 작품이다.
위 작품에서 보면 사과를 담은 왼쪽 소반과 가운데 오렌지를 담은 기둥 모양의 도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가 다르다. 즉 내려다본 것, 같은 눈높이에서 본 것 등을 하나의 화면에 혼합해 그린 것이다.
그는 기존 전통 화단에서 강조한 대상 표현의 명암, 원근법을 철저히 무시하였고, 오직 대상의 기하학적 구성과 색채의 배합을 강조하였고 평생 동안 둥그스름한 타원형과 색감에 천착하였다.
이러한 세잔의 화풍에서 피카소는 큐비즘의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세잔을 우리가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가시죠?
(필자는 남프랑스 엑상 프로방스에서 세잔의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더듬으며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값진 경험을 했다. 도시 전체가 세잔을 오마주하고 있었다. 나도 세잔이 좋아졌다. - 후속 편, 세잔의 아틀리에 포스팅을 참고하시길.)
하늘 아래 새것은 없는 법, 모방에서 새로운 창조 행위가 태동하는 것임을 예술 세계는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자 드디어 추상미술의 선구자 격인 칸딘스키의 작품 나옵니다.
자 위의 그림이 무엇을 표상한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타이틀이 그레이이니 회색 바탕에 작가가 찰나적으로 느낀 것을 즉흥적으로 그린 것 같네요.
한 마디로 칸딘스키가 그리고 싶은 대로 '주관적으로' - 이것이 중요!- 그린 것이다.
추상회화는 회화의 주제나 대상의 객관적인 묘사가 아닌 자신이 느낀 인상대로 그린 것이니까.
자 위 그림은 먼젓번 그림보다는 쉬워 보입니다. 왼쪽의 노란 부분은 사람의 얼굴 같습니다. 가운데 붉은색 십자가를 통해 창문이 날아다니고 있고, 우측에 파란 것은 팔레트일까요.
모릅니다. 화가가 찰나적으로 느낀 것을 화폭에 옮긴 것이라 설명을 자세히 듣기까지는 모르죠. ㅎㅎ
위 작품은 칸딘스키가 곡선과 색조의 변화를 탐구하던 시기에 그린 그의 대표작이다.
화면 왼쪽의 선(Line)의 집합에 비해 오른편은 비교적 자유로운 곡선들로 이루어져 균형과 대조를 나타낸다. 오른 편의 곡선은 음악적 요소를 부여한 듯 춤추는 듯한 부호들이 눈길을 끈다.
그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냇가의 소리 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 등 자연의 소리가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것처럼 색채나 형태를 통해서도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다양한 감동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각각의 색채는 고유한 음악적 특성을 지닌다고 규정했다.
노란색은 음의 높이를 울리는 능력을 가졌고, 파란색은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대립적 능력, 붉은색은 북소리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 인용: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1
이렇게 힌트를 듣고 위 그림을 보면 그의 그림에서 음악적 요소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칸딘스키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그는 러시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 법학을 전공한 수재이다. 법학자로 자리를 잡으려던 무렵 모스크바에서 열린 인상주의 전시회를 관람했는데, 클로드 모네의 작품을 보고 갑자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의 작품을 보고는 이런 그림도 화단에 걸릴 수 있는 것이냐 하며, 화가라고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인가 - 다분히 법대생 다운 고뇌에 빠짐. - 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는 이 계기를 통해 회화가 반드시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대상을 잘 묘사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꽤나 알려진 두 번째 일화는 이렇다. 작업실에서 돌아와 집안에서 잠시 상념에 빠져있었는데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는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겠는가? 도대체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형태를 유추하기 위한 어떠한 오브제도 없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니 전날 이젤 옆에 비스듬히 세워둔 자신이 그렸던 그림이었다. 그림의 방향이 바뀌는 바람에 완전히 다른 그림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칸딘스키는 사물을 특별한 의미가 없는 단순한 형태와 색채로 자신의 직관대로 그리는 것에 천착한다. 소위 '완전 추상'에 다가간 것이다.
칸딘스키는 1911년에 출간한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책에 명징하게 정리하고 있다.
회화를 3요소로 규정하는데 외부 자연으로부터 받은 즉각적인 느낌을 의미하는 '인상', 무의식적이며 자연발생적인 특성을 표현하는 '즉흥', 그리고 장시간의 작업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는 느낌의 표현 방식인 '구성'이 그것이다.
-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1
다음은 칸딘스키와는 다른 추상을 제시하였던 네덜란드 태생의 화가, 피터르 몬드리안의 작품.
이 그림은 피터르 몬드리안이 나이 70세 때 그린 작품인데, 그는 현대적인 마천루가 들어선 뉴욕의 도시 분위기를 사랑했다고 한다.
칸딘스키의 추상화가 다소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라면, 몬드리안의 추상화는 입체주의에서 따온 만큼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다.
노랑, 빨강, 파란색의 원색을 사용해 수직선과 수평선을 직교하여 세련되고 말끔히 구획된 대도시의 모습을 추상화시켰다.
그는 어떠한 대상이건 선과 평면을 이용해 표현하였다. 대상의 형태보다는 그가 느낀 바대로 단순화해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을 마지막으로 몬드리안은 2년 후 그가 사랑한 도시 뉴욕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큐비즘 즉 입체파 화가들의 작품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
그런데 입체파 홀을 지나면 마티스의 또 하나의 걸작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마눌님이 미술관 안내인에게 이 그림 어딨냐고 물어봤던 그림.
야수파의 작품은 현장에서 봐야 그 원색의 강렬함을 맛볼 수 있다. 필자의 카메라도 카메라려니와 사진으로는 색채를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그래도 현장에서 못 보시는 방문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소개를.
1945년과 1950년 기간 동안 퐁피두에 마티스의 작품이 18점 정도 들어오게 되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작품 7점이 1945년에 구입하여 들어온다. 1949년 마티스는 Le Blouse roumaine 이란 기관으로부터 기존 작품 대신 이 작품을 대여하도록 하는데, 훗날 퐁피두센터에게 '선물'이 된다.
1940년 화가가 원숙기에 접어든 시기, 형태의 단순 표현에 있어 한 발짝 더 진보된 모습을 보여준다.
즉, 대상의 Depth와 색과 곡선으로 그렸던 3D 모델링과도 같은 전통적인 회화 방식을 벗어던지고. 그야말로 flat 하다.
작품은 루마니아풍 블라우스를 걸친 여인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빨간색 배경에 하얀색과 파란색 등 원색을 사용하여 눈에 '확' 들어온다.
이 정도의 그림은 나도.. 내게는 그리 와 닿지는 않았으나 책에서 봤던 그림을 직관하니 뭔가 큰 소득은 얻은 것 같다.
필자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회화, 들라크루아의 휘몰아치는 역동적인 낭만주의풍 회화, 밀레의 화면 가득히 고요한 자연주의풍, 그리고 인상주의 회화가 주는 편안한 느낌이 기실 더 좋은 것을 어떡하겠는가!
미국이 낳은 화가 아니 미국이 만들어준 화가. 잭슨 폴록의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의 구세주로 등장한 미국은 예술가들에게도 신세계 -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 -로 인정받으며, 세계 인종의 용광로와 같은 역할을 하며 각 영역이 빠르게 융합/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는 이탈리아, 프랑스와 같은 유럽이었고, 그리스 헬레니즘 예술부터 시작하여 이탈리아 회화, 프랑스의 인상주의 등 200년도 안된 짧은 역사를 갖고 있는 U.S.A 가 따라잡기에는 넘사벽.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던 나라지만 자본만큼은 충분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미술품을 돈으로 사들여 세계 최고의 규모&컬렉션을 갖춘 뉴욕 현대 미술관(MoMA)을 짓기는 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늘 'Made in USA' 라 자랑할 만한 화가가 없었다. 그것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던 미국의 유일한 콤플렉스였다. 그 큰 미술관에 미국인 작품이 한 개도 없었으니까.
그러던 차에 1930년부터 표현주의에서 초현실주의로 넘어가 LA, 뉴욕 등지에서 실험적인 기법을 연구하던 잭슨 폴록이라는 화가에 주목하게 되고, 당시에는 없던 - 미치광이라 불릴만했으니 - 페인트를 커다란 캔버스에 흩뿌리는 'Drip Painting' 기법이라는 것을 들고 나와 화단에 충격을 주자 이 양반을 언플하며 띄워주기 시작하더니 스타로 메이킹한다.
이른바 Action Painting으로 불리는 기법인데, 폴록 역시 통과의례로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것도 그림이냐!"
무작위로 페인트를 뿌린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떠한 Pattern 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그도 이 액션을 오래 하다 보니 캔버스에 페인트를 언제 흩뿌리고 멈춰야 할지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것. 뭐든지 오래 하면 는다는 엄연한 진리.
한때 전 세계를 뒤흔든 화풍이지만 내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작품으로 남고 만다.
왜냐고요? 패턴을 알아볼 수가 없다. 패턴은 무슨 패턴!
다음은 빌럼 데 쿠닝이라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의 추상표현주의 작품. (처음 들어봄.)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화가로 구상도, 추상도 할 수 없는 표현과 격렬한 필촉이 특색이다. (출처: 위키백과)
앞서 잭슨 폴록과 같은 액션 페인팅의 대표주자로 그보다 한술 더 떠 패턴도 없이 그저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린 것 같다. 그러니까 '무제'이지.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가 다시 그 위에 덧 그리고, 덧 그리고., 그림은 불협화음을 발산하고 혼돈스러운 기운을 내뿜는다.
그는 선배 화가 몬드리안에게서 영향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와 상업 미술 작품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추상 표현주의에 호기심을 갖게 되면서 액션 페인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추상주의 회화는 너무 어렵다. 그림도 결국 화가의 생각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미디어(Media, 매개체)인데, 아무리 봐도 화가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그림들 아닌가.
미술은 Art의 범주이고 아름다움(美), 더 나아가 미덕(Virtue)을 느끼기 위해 작품을 보러 가는 것일 진대, 극도의 추상화, 다다이즘과 같은 미술 사조는 나 같은 범인(凡人)의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하기야 이해하려고 하기 전에 직관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작품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해 뵌다.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하니까 어려운 거다.
또 하나의 Made in U.S.A 화가인 앤디 워홀의 작품도 이곳의 한 켠을 장식하고 있다.
현대 소비사회의 메커니즘을 간파하고 이를 잘 활용할 줄 알았던, 미술 작품도 유일한 것이 아니라 Ford 자동차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찍어내듯이 확대, 재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견지했던 다분히 전위적인 화가이다.
당대 유명한 인물들,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비스 프레슬리, 모택동 등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판화로 제작해 반복/생산하여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다. (그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SPAM 그림을 본 때였다.)
자 어느덧 7시. 밖은 어둑어둑 해져 갑니다.
니키 드 생팔의 작품도 걸려 있네요!
프랑스 출신 조각가로 퐁피두 센터 앞 스트라빈스키 분수대의 조형물을 남편이었던 장 팅겔리와 함께 만들었던 바로 그 사람.
일명 '나나'라고 불리는 예의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풍만한 여성, 그녀의 자유분방한 모습은 인생의 기쁨을 표현한다.
위 작품은 십자가에 못 박힌 듯 벽에 걸려 있는 나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나나가 브래지어를 풀자 그녀의 가슴속에 있던 자연, 생명의 요소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묘사한 것 같다. - 꽃, 야자수, 아기, 포도 열매, 검은 말 등이 보인다.
그녀의 다른 작품 '신부'.
가만히 들여다보니 수많은 아이들이 신부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화초도 보이고 신발도 보이고, 어깨 위에 새가 앉아있고, 비행기와 뱀, 오토바이, 부채, 단검까지 붙여져 있다. 아니 이건 뭥미?
니키드 생팔은 1963년에 주목받는 화가가 될 무렵 평단의 많은 비판을 불러온 여성 - 신부, 임산부, 아이를 먹는 여인, 매춘부 그리고 마녀 등 - 을 묘사한 일련의 작품을 만든다.
슬픈 표정을 짓고 손에는 부케를 들고 혼례복을 입고 있는데 그녀의 얼굴은 슬프다. 절망의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신부라는 로맨틱하고 순수한 전통적인 이미지에 냉소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즐거운 신부가 아닌 슬픈 신부였던 것.
작품을 거의 다 구경하고 밖으로 연결된 공간으로 나오니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의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마눌님과 이곳 벤치에 앉아서 파리의 석양을 바라본다. 아름답다.
저 부부도 이곳에서의 풍경을 추억 속에 담아두겠지. 우리 커플처럼.^^
4층 포스트 모더니즘관을 관람한다. 5층보다 확실히 난해하다.
내심 비디오 아트 작품을 보며 백남준의 그것을 기대했는데 그의 작품은 한 개도 없더라. 아 조금 실망. 비디오 아트의 대명사인 줄 알았건만.
5층에 비해 4층은 임팩트 있는 작품들이 많이 없어서 - 기괴한 작품들은 많았다. - 금방 보고 나왔다. 20분 만에.
저녁 8시에 에펠탑에 조명이 들어오고 잠시 레이저를 쏘기 때문에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었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부럽다.
공부하다 잠시 머리 식힐 겸 에스컬레이터 타고 유명 작품들 보고 오고... 이런 게 가능하다는 것 아닌가?
저녁 8시 10분. 퐁피두 센터의 현대 미술 작품 관람을 마치고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마감한다.
조명을 밝힌 퐁피두 센터의 모습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철근 구조가 더 도드라져 보인다. 정말이지 석유 공장 단지에서 보던 공장 건물 같다. (그리 알흠다운 모습은 아니다.)
현대 미술작품의 거장들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아직은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이전 미술관에 비해 어렵게 다가왔다. 반면에 늦은 오후라 인파가 붐비지 않아 쾌적하였다.
퐁피두의 또 하나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다다이즘'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Fountain)'을 볼 수 없던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동네 화장실 남성 소변기를 가져와 소변기 제작자의 이름을 써놓고 눕혀놓고는 '샘'이라고 작품명을 발표하니 아연실색할밖에.
(전시를 하기도 전에 관람객이 망치로 깨부수는 바람에 전시하지도 못했다고.)
그는 기존의 모든 이성과 전통, 가치와 규범을 부정하고 오로지 무의미함을 내세우는 '다다이즘(Dadaism)'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자처했다.
현대 미술작품은 뭔가 더 이슈메이커가 되어야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파격의 파격을 거듭한다.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본 포스팅의 마지막 작품을 변기로 마무리하여 조금 칙칙하지만 맑은 샘물이 나오는 샘으로 생각하면 느낌이 달라질 것이다. ㅎㅎ
퐁피두센터의 건축 기법에 대한 내용 및 Collection에 대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기를.
https://www.centrepompidou.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