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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미술관 속으로
5. 로댕 미술관

프랑스


로댕 미술관(Musée Rodin)은 현대 조각 미술의 시조인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조각 작품을 전시해놓은 공간으로, 로댕의 아뜰리에이자 그의 말년에 거처로 사용된 장소이기도 하다.

앵발리드 군사 박물관과 인접해 있으며, 18세기에 지어진 이 로코코 양식의 건축물 - 오텔 비롱 (Hôtel Biron) -은  극작가 장 콕토, 앙리 마티스, (예쁘지만 두뇌는 영 아니었다는)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 시인 마리아 라이너 릴케 등이 잠시 머물다 간 장소이기도 했다. 


1905년 프랑스 정부의 소유가 된 이후 이 건물에 관심 많았던 로댕은 그의 작품 모두를 국가에 기증하는 대신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내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자 작업 공간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의 집은 그의 사망 2년 후인 1919년 국립 로댕 미술관이 되었다.


* 퐁트누아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장수인 비롱이 루이 14세의 며느리로부터 사들이게 되는데 여기서 저택의 이름이 유래한다. 


로댕 미술관 전경


15시 30분. 햇볕은 여전히 강렬하고 가을 하늘은 공활하다.


만약 누군가 파리에서 가장 갖고 싶은 정원이 무엇인지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로댕 정원을 꼽을 것이다.
한 위대한 예술가의 걸작들이 정원 곳곳에 전시되어 있으니, 어디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정원을 찾을 수 있겠는가. 
-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1


비롱 장군은 이 집을 사들이고 난 후 조각 작품, 정자, 분수 및 식재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Sculpture Garden)을 꾸몄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정원은 1993년에 새롭게 조경한 것으로 분수대와 보리수나무는 그대로 유지하고, 미술관의 남쪽 부분은 꽃과 식재를 심어 현대적 느낌의 정원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로댕 정원]

공원은 3헥타르에 걸쳐 형성돼 있으며, 지대는 장미 정원, 북쪽의 비롱 저택 그리고 남쪽의 넓은 장식 정원으로 분할돼 있다.정원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테라스와 비롱 저택 facade (전면부)에 난 세 개의 창문과 같이 세 개의 입구가 나 있는 격자 모양 울타리가 고요한 휴식 공간을 만들어 낸다. 
동쪽의 '오르페우스 정원'과 서쪽의 '봄의 정원' 두 개의 테마 산책로가 있다.


故 윤운중 씨의 제안대로 미술관 앞뒤 편의 정원을 거닐며 조각 작품을 감상하다 갤러리에 입장하여 로댕의 예술 세계를 조망하는 순서로 관람한다. 


생각하는 사람 (The Thinker)


로댕 미술관 입구를 지나면 바로 로댕의 대표작인 '생각하는 사람' 이 떡 하니 서 있다. 

영화에서도 두목은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게 일반적이건만. '어벤저스 엔드게임' 시작하자마자 타노스 목이 댕강 날아가 어안이 벙벙해진 것처럼 그의 역작을 예상 못 한 시점에 조우하니 사뭇 놀라게 된다. (사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정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어슴푸레 알았지만.)


필자도 인증샷


필자도 저 자세로 인증샷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나름 포즈를 따라 했지만 여간 불편한 자세가 아니다. 이런 자세로 무슨 생각을 잘 할 수 있단 말이더냐. 

오른 손목을 안쪽으로 굽혔어야 하는데. ㅎㅎ 


THE THINKER - Auguste Rodin, 1903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1880년 원래 지옥문- 아래 언급된다. - 을 위한 장식의 하나로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지옥문에 대한 영감을 주었던 신곡(神曲, The Divine Comedy)의 작가 단테(Dante)를 표상하기도 하고, 그리스 신화 지하의 신 하데스 (Hades)가 그의 창조물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을 표상하기도 한다.

지옥문의 입구에서 울부 짓는 영혼들을 보며 고뇌에 빠져 있는 단테의 모습을 형상화함과 동시에, 인간 내면의 고요와 솟구치는 힘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인간이 맘속에 품고 있는 진실에의 희망과 믿음을 상징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로소이다.


생각하는 사람의 포즈는 여러 고전 작품에서 따왔는데, 로댕은 자신만의 개성으로 재창조하였다.

우락부락한 얼굴, 잘 발달된 상부 신체와 근육질 장딴지, 투박한 발의 모습 등에서 강인한 남성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지옥문 상부 패널 장식 - 뒤에 언급됨 -으로 제작됐는데 이 작업이 지체되면서 이것만 좀 더 크게 제작하였고, 1904년 살롱에 출품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파리 시가 이 작품을 사들여 1906년도에 파리 판테온 앞에 세웠는데, 로댕 미술관이 개관하게 되면서 1922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그 남자의 뒤태


대상의 가장 중요한 부분만 집중해서 조각했기 때문에 뒷모습은 대충 조각한 듯한 느낌이다.

로댕은 모네와 동년배로 당시 유행했던 인상주의에도 관심이 있었고, 대상의 모든 면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보다 자신의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상상을 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을 선호했다.

심지어 그는 때때로 형상이 막 나타나 모양이 갖추어지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거친 돌의 일부를 그대로 놔두기까지 했다.


새들의 배변물이 쌓일 법도 한데 어찌나 관리를 잘 하는지 새똥 하나 안 보이고 윤이 날 정도. 단지 비바람에 씻긴 흔적만 남아있을 뿐.


만물의 창조를 주관하는 신의 섭리에 대한 그의 비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로댕은 이러한 쓸 데 없는 인습들을 무시함으로써 작품의 완성은 '미술가가 그의 목적을 달성한 때'라고 주장했던 렘브란트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했다. 
-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로댕이 자신의 무덤 곁에 놓아달라고 했던 만큼 그가 아끼던 대표작이자 현대 조각 미술의 대표작이 아닐 수 없다.


오노레 발자크 - 오귀스트 로댕 [1891-1898]


야외 정원에 우두커니 서 있는 또 다른 그의 작품. 발자크 상.


에피소드 하나. 

발자크의 문학 작품을 높게 평가한 프랑스 문인 협회의 요청으로 그의 동상을 조각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로댕은 발자크가 사망한 지 꽤 시간이 흘렀기에 그의 작품을 읽으며 그의 생전의 모습을 찾아 나가게 되는데. 어렵사리 찾아낸 발자크의 수선복 재단사에 따르면 발자크는 160센티도 안되는 단신에 얼굴도 호감이 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 정통한 우리 로댕 아저씨는 이를 '고대로' 형상화 한 것이다.


그러나 문인 협회는 흉측한 외모에다 짝달막한 키로 묘사한 발자크 동상을 도저히 전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수령하기를 거부하게 되고 로댕은 비평가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게 된다.

로댕은 결국 문인협회로부터 이 작품을 되사서 자신의 전시실에 설치해 놓게 되었고 이렇게 로댕 미술관 안뜰에 자리 잡게 되었다.

주의의 비평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실적인 표현에 방점을 두고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지켜나간 이러한 로댕의 모습에는 박수를! 


예쁘게 재단한 나무 사이에 그의 작품이 위치하고 있다.


위 사진에서 보듯 로댕 미술관 인근에 빌라가 있는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다.


친구가 묻는다. '너네 집 어디야?' 빌라에 사는 친구는 이렇게 답한다.'응. 로댕 미술관 근처인데 '생각하는 사람'을 맨날 내려다볼 수 있어~'

뜨아. 정말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유명한 작품을 늘 곁에서 보고 느끼고 자란 파리 시민들의 문화적 감수성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미술관, 박물관 그리고 각종 공연장 등 예술 작품을 직접 접하게 하여 내재돼 있던 포텐샬을 발산할 수 있도록 부모들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적으로 문화 시설이 부족하니만큼 더욱.


로댕의 정원


로댕 미술관 전경을 소개할 때 자주 등장하는 사진.

예전 이미지와 비교해보면 둥그런 못 가운데 좌대에 (아마도) 웅크린 형상의 '우골리노' 조각상이 있던 것 같은데, 정원 안뜰로 옮겨진 듯. 


못 주변에 의자에 앉아 사색하기에 정말 좋다. 하늘은 어찌나 맑고 푸르던지요.


앵발리드의 황금빛 돔 성당이 보인다.


소담스러운 정원을 산책하는 이들.

우리 커플도 잠시나마 여유를 만끽하기 위해 잔디에 누워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잠시 쉼을 얻는다.

(그러나 여기서 너무 여유를 부린 나머지 하마터면 바토 파리지앵 시간에 늦을 뻔했으니. 진땀을 흘렸다.)


정원에 배치된 그의 다른 작품들을 둘러본다.


숲속 미술관


거장의 작품들이 이렇게 숲길 사이사이에 전시가 돼 있다는 것. 산책하면서 마주치는 조각들이 로댕의 작품들인 것이다. 또 한 번 뜨아~


지옥문의 부조 가운데 하나인 '우골리노' 동상도 볼 수 있다.

모퉁이를 돌면 역시 지옥문의 맨 꼭대기에 장식된 형상인 '세 그림자 또는 망령들'을 크게 제작한 청동 상이 보인다.

세계적 그룹이 된 BTS의 멤버들이 저 마다의 팬덤을 형성하여 활동하는 것처럼 이들도 각자 로댕 미술관 곳곳에서 자리를 빛낸다.


세 그림자 또는 망령들 [1886년]


세 명의 남성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형상인데, 동일 인물을 각도만 달리하여 배치하였다.

그리스의 '삼미신'도 아니고 왜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인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세 가지 욕망을 상징한다고. 음란, 오만 그리고 탐욕이 그것이다. 


오귀스트 로댕 - 지옥문 [1880-1890]


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지옥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옥문이 열린다~ Hell Gate Open~ 은 아니다.)


이 디테일을 보라..


지옥문은 로댕이 무려 이십여 년간 천착한 필생의 역작이다.

그는 피렌체의 성 요한 세례당에 있는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di Bartolo)의 금빛 화려한 '천국의 문'(아래)처럼 여닫이문을 의도했으나 결국에는 이처럼 문이 붙어있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로렌초 기베르티 - 천국의 문,  2012년 @Firenze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서 고통받는 인간 영혼들을 다양한 형태의 부조로 조각하였다.

최상단의 '세 그림자 또는 망령들'을 비롯해 그 바로 아래에 '생각하는 사람', 그 아래에 '추락하는 남자', '우골리노' 그리고 우측 하단에 '키스'가 자리 잡고 있다.

따로 떨어져 있을 때보다 '생각하는 사람'의 고뇌하는 모습이 지옥문이라는 context에서 해석되니 보다 더 어울린다.

이 밖에 우골리노의 웅크린 모습도 지옥문에 조각된 모습에서 보는 이들에게 가슴 저민 느낌을 보다 잘 전달한다.


앵발리드와 에펠탑, 그 사이에 생각하는 사람


다음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상징인 '칼레의 시민들'

영국과의 백년전쟁을 치를 당시 항구도시인 칼레가 영국군과의 결사항전 끝에 항복을 하게 되는데 쪼그만 도시의 저항에 자존심이 상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이를 괘씸하게 여겨 도시에 입성할 때 칼레를 대표하는 여섯 명이 성문 열쇠를 들고 나올 것을 요구한다. 벌거벗은 채로.

그리고 그들은 (살아남는 이들을 위해) 교수형에 처해질 대상이기도 했다.   


칼레의 시민들 [1884-1889]


이때 도시에서 가장 부유했던 사람인 생 피에르가 자신이 제일 먼저 그 길을 가겠노라고 선언하자 나머지 다섯 명도 동참하게 된다.

여섯 인물들의 표정이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웅변이라도 하듯 처절하고 고뇌에 빠진 모습들이다. 

손으로 눈을 가린 사람, 머리를 쥐어짜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한 사람 등.

가운데 턱수염이 가득하고 결연한 자세로 서 있는 이가 생 피에르. 그 옆에 성문 열쇠를 양손으로 들고 의연하게 서 있는 이는 장 데르.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두고 어쩔 수 없이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데 있어 매우 사실적이고, 로댕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에드워드 3세의 왕비가 이들의 모습을 보고 풀어달라고 간청하여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오후 4시 30분. 로댕 미술관에 드디어 입장.

1층에는 로댕 초기 작품들이 주로 전시돼 있다 


입구 초입부터 사실적인 조각의 모습에 심히 놀랐다. 로댕의 바람둥이 생활을 묵묵히 인내하며 평생 그의 곁을 지키다 살다 간 로즈 뵈레를 모델로 한 '꽃 장식 모자를 쓴 여인'이 그것이다.


오귀스트 로댕 - 꽃 장식 모자를 쓴 여인, 1865년


테라코타 작품으로 마치 살아서 움직일 것 만 같다! 

저리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이 여자 저 여자 흠모하며 살다 뵈레가 죽기 2주 전에야 결혼을 했던 로댕이 참 싫다.

유명세를 얻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어렵게 작품 활동을 해 온 로댕을 곁에서 보필하던 이가 뵈레였다. 제자였던 카미유 클로델과의 치정까지 겪어가며 말이다.

양복점에서 일하던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자신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한 지 무려 53년여 만에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로댕이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그를 돌봐준 것도 그녀인 것을 알게 되자 그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뒤늦게 결혼을 하지만 2주 후에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슬픈 운명의 여인.


두상 세부


모자의 꽃 장식을 보라! 가까이에서 보면 로댕의 디테일은 정말 탁월함을 알 수 있다.

진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어 만들어낸 부분에 있어 로댕이 '의 손'이란 말을 들었던 것이 괜한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 한 켠에 왠지 모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은 필자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 같다.(위문장과 Rhyme을 맞춰.)


오귀스트 로댕 -코가 부러진 남자, 1874-1875년


위 작품은 세상에 그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 로댕의 첫 살롱 입상 작품이다.


원래는 주변의 허드렛일을 하는 어느 노인을 모델로 삼아서 제작한 석고 작품의 형태로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품위가 없다고 '짤렸는데' 십여 년 후에 로댕이 똑같은 것을 대리석으로 제작하여 살롱에 다시 출품해서 수상을 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이로써 조각계의 거두로 떠오르게 되고,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된다.


오귀스트 로댕 - 청동시대, 1916년


오후의 햇살을 받아 아 따뜻해~라는 얼굴 표정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의 초기 작품 중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로댕이 벨기에에 거주할 당시였는데, 평단에서는 이 작품을 두고 실제 사람에게 석고를 붓고 틀을 떠놓은 다음 청동으로 옮겨놓은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된다. 얼마나 사실적으로 사람의 신체를 묘사했으면 그런 의혹의 눈초리를 받겠는가 말이다.


파리로 돌아와 실제 작품 주형 틀과 사진을 첨부했건만 살롱전에서는 끝내 외면을 받게 된다. (훗날 어느 재단의 외뢰를 받아 청동으로 다시 제작하여 살롱에 출품했고 3등 상을 받게 된다는.) 


인간 신체의 해부학적인 특징에 입각해 조각한 작품으로 1876년 이탤리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

필자가 결혼 전 지금의 달링과 서울 용산 가족 공원을 거닐 때 산책로에 로댕의 청동시대와 유사한 작품이 전시돼 있었는데 그때 그 시절이 연상되더라. 


그리고 또 하나의 유명한 작품 '키스' 가 있었다. 

당시 카미유 클로델과 로댕이 사랑을 나누던 시기였기에 그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로댕은 지옥 편에 등장하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라는 남녀의 격정적인 키스를 묘사한 것이라고 얘기를 한다.



전시실 2층.

로댕의 섬세한 터치를 느낄 수 '다나이드'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신혼 첫날밤에 남편을 죽인 죄로 영원히 밑 빠진 물통에 물을 길어야 하는 형벌을 받는 여인이다.


하얀 대리석 조각에서 금방이라도 여인이 머리를 들어 올릴 것만 같다. 여인의 흘러넘치는 머리칼이 대리석과 하나가 된 듯하다.

여인의 매끄러운 피부와 둔부의 아름다운 굴곡은 마치 신이 인간을 빚어낸 것 같은 느낌을 관객에게 던져주었으리라.


로댕은 물통에 물을 채우는 전통적인 도상 대신에 아무리 노력해도 끝이 없는 형벌에 지쳐 절망하는 다나이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흐느끼는 듯한 다나이드의 섬세하면서도 청초한 등의 굴곡과 맑은 빛깔의 대리석이 빚어내는 하모니는 관람자의 탄식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다나이드의 머리카락이 '마치 물처럼 흘러내려' 엎어진 물통에서 흘러나온 물과 하나가 되었다고 평했다.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1


다음은 로댕이 소장했던 회화 컬렉션이 이어진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과도 교류가 있었다고 하며, 특히 고흐의 작품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 - 탕기 영감, 1887년


탕기 영감은 고흐와 교류했던 물감 상인이었다. 그림 뒤에 우키요에 등 고흐가 수집했던 일본 판화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르누아르의 작품도


르누아르가 인상주의를 벗어던지고 자신만의 컬러를 되찾은 시기의 작품도 한 점 걸려 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봤던 것처럼 고전적인 방식으로 회귀하여 인물에 대한 묘사에 다시 집중해 그렸다. 


미술관에서 내다본 정원 풍경


창밖으로 정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사진 왼편의 큐빅 형태의 나무들 사이에 전술한 그의 조각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미술관 관람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다.

드디어 로댕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던 비운의 여인 '카미유 클로델'의 조각 작품을 보게 된다.


카미유 클로델 - 중년, 1897년


한 남자를 둘러싸고 두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남자의 손,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 몸을 던지는 여인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남자 곁에서 그를 감싸 안은 여인은 분명 로즈 뵈레였을 것이고.


18세에 스승과 제자로 만나 '지옥의 문', ' 칼레의 시민' 등 조각 작품에 같이 참여했고, 해를 거듭할수록 카미유의 성장에 탄복하며 로댕은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된다. 하지만 로댕에게 그녀는 그 이상은 아니었던 것. 어디까지나 그녀의 조각가로서의 '기교'에 관심이 있고 이를 이용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내를 끝까지 흠모하며 곁에서 바라만 보고 놓치지 않으려 몸부림쳤던 여인이 카미유 클로델이다.

(파리 생 루이 섬(St. Louis)에 갔을 때 그녀가 정신병 진단을 받고 30여 년 가까이 살았던 19번지 카미유 클로델의 아파트를 둘러볼 생각을 했었지만 실현하진 못한 아쉬움이 있다.)


필자는 예술적 영감 운운하며 여러 여인들을 거쳐갔던 예술가들을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다.

파블로 피카소야 로댕과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라 두말할 나위가 없고, 미성년자를 유괴해서 모델로 삼아서 처벌까지 받았던 이력이 있는 성 도착증 화가 '에곤 실레' 같은 화가들은 한 마디로 쓰레기! 오죽하면 퇴폐 미술이라 칭하겠나. 내겐 그저 포르노그래피일 뿐이다.

예술 한답시고 그러한 행태가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닐진대 예술가니까 남들과는 좀 다르게 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ㅎ


2층 전시실 최고의 명당자리에 전시된 '나쁜 남자' 로댕의 걸작 하나가 또 우리를 맞이한다.


오귀스트 로댕 - 걷는 남자, 1913년


뒤편의 창틀 사이로 비치는 빛을 조명 삼아 작품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남성 모델의 강인한 육체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역동적으로 힘차게 걷는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머리와 두 팔은 제거한 토르소 형태를 취했다.



기존의 전통적인 관념을 깨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생기를 불어넣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미켈란젤로의 작품 평에서 언급했듯이 마치 '대리석에서 뛰쳐나올 듯한' - 작품으로 조각 미술에 모더니즘(Modernism) 을 불러일으켰다.


미술관에서의 그의 작품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살아 숨 쉬는 조각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정원 산책이 참으로 좋은 시간이었다. 


* 소개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wItu0e07KNk


* 로댕 미술관 홈피

http://www.musee-rodin.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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