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걸어서 미술관 속으로
1.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명실공히 최고의 미술관이다.

본래 기차역이었던 곳인데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하여 1986년 개관. 루브르 박물관에 있던 작품들 중 1848년 이후의 작품들을 이관해왔다.


* 본 포스팅을 찬찬히 읽는데 30分은 족히 소요되니 이를 염두하시길.

인상주의 미술의 보고, 오르세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은 회화의 경우 13세기 이탈리아 회화부터 19세기 프랑스 회화까지 보관하고 있으며, 오르세 미술관은 1848년부터 1914년까지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그리고 자연주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반면에 파리 국립 현대미술관, 즉 퐁피두 센터의 경우 1905년부터 1960년대 이후의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 작품들을 연대기 순으로 구분, 미술관을 달리하여 전시해 놓았다.  


1900년 만국 박람회를 계기로 지어진 이 기차역 덕분에  프랑스 남동부 지역의 여행객들이 기차를 타고 파리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리셉션 홀과 화려한 호텔까지 마련돼 있었던 이 역은 철도 근대화와 함께 서서히 제 기능을 잃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1977년 이 건물을 미술관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했고 1986년 드디어 오르세 미술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 미술관 안내 팸플릿


원래는 기차역이었어요.

그래서인지 여느 박물관과는 실내 분위기가 다르다.


기차를 품고 있었기에 가운데가 시원스레 뚫려 있고 천정과 양측 창을 통해 햇볕이 투과되어 채광이 좋아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전시실마다 좁은 문을 통과해서 입실하고 다시 좁은 문으로 퇴실하는 형국이 아니라 삼면이 개방된 공간에 작품을 걸어놓아 다른 공간에서 크로스 오버가 용이하다.


오르세 미술관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미술 작품이 한가득이다.

개인적으로 밀레의 '만종'이 제일 보고 싶었고, 미술계의 Disruptive Innovator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인상주의의 선구자 모네의 작품, '생 라자르 역', 사실주의의 선구자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 빈센트 반 고흐의 '정오의 휴식' 과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등도 보고 싶은 작품이었다. - 일부 작품은 해외여행 중인 듯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Floor Information]

오르세 미술관은 지하 2층과 지상 6층의 규모이나 실제 주요 작품은 0층, 2층, 5층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다.

0층의 제일 처음 만나는 4번 홀 밀레(Millet) 작품부터 관람하며 0층의 작품의 한편을 관람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2 층 → 0층의 나머지 전시홀 순서로 관람하면 편하다.


개관 시간은 오전 9시 30분. (월요일은 정기 휴관일)

우리는 파리 뮤지엄 패스 (Paris Museum Pass) 4일권 (62€) 을 구매하였다.


오르세 미술관 입구


뮤지엄 패스 소지자 경우 C 라인에서 줄을 섰고, 확실히 입장이 일반 라인에 비해 수월했다.

유럽을 투어 중인 우리나라 대학생을 만났는데 유스호스텔에 묵으며 비용을 아껴가며 여행을 한다는 모습에 참 대견하기도 했고, 젊을 때 이렇게 여행을 못 해본 나로서는 한편 부럽기도 하였다. 우리가 가보았던 유럽 몇 나라 - 그래봤자 몇 안 됨 - 꼭 가보라고 얘기를 해주기도 했다.


가방 등은 보관 서비스에 맡기고 몸은 최대한 가볍게. 카메라 하나만 챙기고 이내 본격 관람 모드로!

0층의 첫 번째 갤러리에 도착하자마자 뙇!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밀레의 작품이 바로 걸려있는 게 아닌가!

밀레의 만종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만종.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자연주의 최고의 걸작이다.


바르비종 화파 : 인상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이전 파리 동남쪽 퐁텐블로 숲 바르비종에서 카미유 코로, 장 프랑수아 밀레, 샤를 도비니 등 일단의 화가들이 모여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찬미하였는데 이들을 일명 '바르비종 화파'라 일컫는다. -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1


실은 이 작품은 2007년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오르세 미술관 展'을 열었을 때 필자도 직관하고 블로그에 기록까지 한 바 있다. 그런데 마치 처음 본 것 같은 느낌인 것은 왜 인가.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만 떠오르는데. ㅎ


밀레는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화보다는 대지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지평선으로 저무는 태양을 배경으로 수확의 기쁨에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모습. 이보다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디 있겠는가. 노동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


빈센트 반 고흐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 그래서 '씨 뿌리는 사람' 같은 밀레의 작품을 많이 오마주 했었지 - 화가였고, 그는 '밀레야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존경을 표할 만큼 그의 작품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화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대지가 안정적이고 고요한 느낌을 준다.

부부의 뒤에 보이는 교회를 둘러싸고 어느 지역이 맞네 하고 서로 다툰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오우 바로 옆에 또 그의 또 다른 걸작이 걸려있다. 초입부터 명작의 향연에 정신을 못 가눌 정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이 그림은 진정 처음 보는 것인가. 아니야. 어릴 적 이발소에 가면 이 그림이 벽에 걸려있곤 했더랬지. ㅋ

그렇다. 우리는 서양 미술에 대해서 70년대부터 일찍이 눈을 떴던 것이다. 아마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주어진 일에 묵묵히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찬양하며 이를 정치 목적에 활용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모습이 투박하기 그지없어 한 평론가는 '공포 정치 시대의 처형대' - 윤운중 책에서-를 연상시킨다고까지 혹평하였다고.  경제적 불평등을 상기시킨다는 것이었는데 우리네 농민들의 삶은 아직도 어렵고 힘들다.


이 그림의 모티브는 구약 성경의 '룻기'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가운데 붉은 토시와 모자를 쓴 여인이 룻이고 그 오른쪽에 구부정하게 서 있는 이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상징한다.


그 옆에 인상적인 그림이 있었는데, 물동이를 이고 계단을 내려오는 아낙과 여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화면에서 나올 것 같은 이름 모를 아낙이여


연인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나중에 또 한 번 보고 그랬었다. (가가 기억이 나지 않음.)


카미유 코로 작품


또 다른 자연주의 화가 카미유 코로의 작품도 걸려 있다. 그의 작품은 뭔가 詩的 느낌이 난다. 환상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위대한 자연의 풍경 속에서 조화된 인간의 모습을 서정적인 느낌으로 담아내고 있다.

카미유 코로의 작품을 특히 미국인이 좋아하여 그의 작품이라고 우기는 작품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오르세의 명물인 대형 시계


지금은 10시 19분! 오르세 미술관의 대형 시계 바늘이 현재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로사 보뇌르의 '니베르네의 쟁기질'


또 다른 자연 주의 작품이 이어진다. 처음엔 컨스터블의 작품인 줄 알았지만 여류 화가 로사 보뇌르의 작품이었다.

그림에서 보듯 소들의 쟁기질에 의해 흙이 파진 곳의 명암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가까이서 살펴보고 또 살펴보았다. 맨 앞의 누렁이의 입에서 떨어지는 침하며.. 정말 디테일이 살아 있는 작품이다.


Thomas Couture 의 'Les Romains de la Decadence'


바르비종파 갤러리를 둘러보고 이동하는 통로에 있던 대형 그림. 데카당스(Decadence) 가 쓰여있는 것을 보니 로마인들의 향락주의, 퇴폐주의 문화를 그림으로 그린 듯하다. 남녀들이 술에 취해 비틀대고 있는 모습. 때마침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발레를 했는데 그게 'Decadence'였다.


15-16 홀에서는 오리엔탈리즘, 즉 동양의 신비로운 주제에 대해 그린 그림들이 - 주로 대작이었다 - 걸려 있다. 왜 갑자기 이러한 작품들이 이 사이에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Orientalism 1


힘 있는 남성에 비해 연약한 여성의 모습을 강조한 그림이 특징이다. 검은 남자 피부와 대비된 흰 여체의 모습이 더욱 눈에 도드라진다.


Orientalism 2


이 그림은 무슨 장면인가. 두건을 쓴 이를 포함해 가냘픈 여성을 납치하는 장면인가.

여성의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묘사가 너무 사실적 이어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했던 그림이다.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젖가슴의 표현이 정말 사실적이다.


이웃한 19번 홀로 건너가면 구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의 작품이 보인다. 우왕 여행 오기 전 샀던 책에서 언급한 그림.

구스타프 쿠르베의 '천둥 친 후의 에트르타 절벽' (1870)


프랑스 북부 해안 절벽에 위치한 에트르타를 배경으로 - 고전 영화 '남과 여'의 촬영지 - 구스타브 쿠르베가 그린 작품이다.

'난 오직 내가 본 것만을 그린다'라고 하던 쿠르베의 작품이니 그의 작품 속 현장의 모습이 아마 저것과 똑같았을 터.

천사를 그려달라고 했더니 '당신들이 원한다면 그려줄 테니 내게 먼저 천사를 보여주시오'라고 말했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처음으로 일상생활을 그림의 소재로 삼은 화가로서,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미술에 한 획을 긋게 된다.


지금은 사유지가 되어 저 풍광은 일반인이 보기는 힘들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에트르타를 두고 잠시 고민하기도 했었는데.- 에트르타, 모네의 지베르니, 루앙 대성당을 묶어서 현지 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 다음번에 가보는 것으로 했다.


또 다른 쿠르베의 작품


모네의 작품과 함께 장 프레데릭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의 작품이 걸려 있다.

프레데릭 바지유의 재결합한 가족(Réunion de famille)


바지유는 마네, 모네, 르누아르, 시슬리 등과 교제하였고, 부유한 집에서 자라 어려운 동료 화가들의 재정적인 후원을 해준 화가이다.


그는 생전에 가난에 허덕이던 동료 화가들에게 물품과 화실을 제공하고 그들의 작품을 사주는 등 개신교로서의 베푸는 삶을 행하였고, 친구들과 식사를 하면 항상 그가 식사비를 냈다.

부모님은 의사가 되기를 바랬으나 낙방한 다음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화실은 파리 인근에 있었는데 꽤 넓어 피사로, 세잔, 쿠르베를 비롯해 그의 동료들의 아지트였다. 마음씨 좋은 바지유는 친구들에게 화실을 마음껏 제공하였다.

착하디 착한 그는 1870년 조국을 위해 프로이센과의 전투에 참전하여 두 발의 총탄을 맞아 전사하게 된다. 그의 나이 29세. 더 오래 생존했다면 그의 인상주의 그림도 꽃을 피웠을 텐데...   


관람객이 사진사인 양 그의 가족들이 보는 이들을 응시하고 있다. 왼쪽에 착석한 부부 - 파란 옷을 입은 어머니와 그 옆의 아버지- 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냉랭하다. 의사를 포기하고 화가의 길로 접어든 그가 못 마땅했을 터.

제일 왼쪽 구석에 바지유 자신을 (보일듯 말듯)소심하게 그려넣었다.


나무 그늘 아래 가족들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우측 하단에 나뭇잎 사이로 투과된 빛이 보이고, 빈 공간을 모자와 꽃다발 등으로 채워넣어 균형감을 주었다.

1869년에 살롱전에 출품해 당선된 작품으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힌다. 하지만 바지유는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친한 친구였던 모네가 낙선하였기 때문. 바지유는 심사위원들이 실수로 자신의 작품을 추천했다고 하며 모네를 위로했다고 한다.

오르세 미술관은 그의 애국심을 기리는 뜻에서 이 작품을 좋은 위치에 영구 전시하고 있다. ...


클로드 모네의 '정원의 여인'


18전시실에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초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그의 부인이었던 카미유를 모델로 해 그린 작품으로 위 사진에 보이는 모델이 모두 카미유가 포즈로 취한 것.


높이가 255센티미터에 달하는 대작으로 인상주의 시조답게 오직 바깥 야외에서만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여 실제 웅덩이를 깊게 파 캔버스를 고정해두고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절친이었던 에밀 졸라는 이 그림을 보고 '인상 주의자들은 순간의 아름다움을 잡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1에서 인용.


정말 찢어지게들 가난했던 인상주의 화가들. 위에서 언급한 프레데릭 바지유가 이 그림을 사주겠다고 했는데 일시불로 요구를 했다가 무반응이자 절교까지 고려했다는. 모네는 작품이 팔지 못해 굶는 처자식을 보며 한때 자살하려고 센 강에 투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역시 가난했던 르누아르가 남은 음식을 가져와 건네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곤경에 처하면서 이들은 기필코 세상에 독보적인 작품을 만들겠다는 투지를 불사르게 되지 않았나 싶기도.


들라크루아(Delacroix)의 작품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화폭에 담긴 군상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건대 들라크루아의 작품으로 기억한다. 그의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더 진가를 발휘한다. 왠지 오르세 미술관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2층으로 올라간다.


2층에서 바라본 미술관 실내 전경


로댕(Rodin)의 청동 시대


2층 테라스에 조각 작품이 진열돼 있다.

이 작품은 후일 로댕 미술관(4일차)에서도 보게 된다. 그의 초기 작품 중 가장 걸작으로 인정받는다. 조각 작품은 주물틀이 있어 여럿 복제를 할 수 있어 장점이라면 장점인 듯.


 오르세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라는 5층에 오르세!


Henri Fantin-Latour의 들라크루아를 기리며


위 그림은 기존 아카데미 학풍에 반기를 들고 색채의 자유를 내세운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앞 열 가운데 검은 슈트를 입은 사내는 휘슬러, 우측 서있는 인물 중 이마가 벗어지고 바지춤에 왼손을 집어넣고 서 있는 이가 마네이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제일 먼저 맞이하는 29 전시실에서 마네의 걸작을 만나게 된다. 하하. 드디어 이 작품을 보게 되는구나!


살롱전 출품이 거절된 이들을 위해 별도로 마련한 1863년 낙선전에 출품된 이 작품은 평론가들의 혹독한 비판으로 되레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다. 마네는 당시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부르주아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었는데 이것이 그들을 불편하게 했던 것.


진실은 언제나 거짓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법.

희멀건 여성이 더구나 이 여성은 관람객을 빤히 쳐다보며 당신도 이런 것을 원하는 것 아니었어?라는 듯한 야릇한 미소를 던지니 당황해했을 터. 이 당돌한 여성은 태연한 얼굴로 남자의 가랑이 사이에 발을 집어넣고 있다.

배경이 된 볼로뉴 숲은 그 시절 매춘으로 만연한 지역이었다. - 지금도 볼로뉴 숲은 밤늦게 가지 말라는 얘기가 있으니 유의하시라.


더구나 위 그림 속 주인공들은 실제 존재하는 인물이어서 더 파장이 컸다.

가운데 옷을 벗고 관람객을 응시하는 여인은 마네 '올랭피아'의 모델이 되는 빅토린 뫼랑이고 가운데 남자는 마네의 매제 페르디낭 렌 호프, 그리고 우측에 기대어 앉아 있는 남자는 바로 마네의 동생이었던 것.  

또 전통적인 역사화도 아니고 평범한 인물들인데 화폭은 또 어마어마하게 커서 평단에 던지는 충격은 엄청났다고 한다.ㅎ


이 그림을 통해 마네는 기존 화단과는 다른 전통적인 화풍을 거부하는 인상주의 시대를 출발을 알리게 된다.

실제로 이런 대작을 목도했는데, 미술사에서 보던 작품을 보게 되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분간이 가지를 않는다. 눈앞에 작품이 진품 맞지?


관람객을 빤히 쳐다본다. 관람객도 감히 자세히 들여다볼 용기는 없다.


마네의 '제비꽃 장식을 한 베르트 모리조'


이 작품도 참 인상적이다. 모네를 한때 열렬히 사모했던 여류 화가였던 모리조.

작품에서처럼 그의 또랑또랑한 눈매가 참 매혹적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마네는 또한 모리조는 무슨 생각을 주고받았을까?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남자 그리고 여자... 곁에 두고 싶어서 였을까. 마네는 자신의 동생 외젠 마네를 그녀에게 소개해주고 둘은 이윽고 결혼을 한다.


카유보트의 '대패질 하는 사람들'


이어지는 카유보트의 작품.


지난번 시카고 AIC(Art Insitute of Chicago)에서 보았던 그의 작품 -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 (아래 그림)-  과 마찬가지로 윤기나는 저 마룻바닥을 보라. 정말 사실적이지 않은가? 대패질하는 세 아저씨들의 자세도 참 자연스럽고 벗겨진 대패 가루하며 마치 사진을 찍은 것 같다.


그의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 작품에서도 바닥에 흥건히 고인 빗물의 모습이 굉장이 사실적이라고 느껴 감탄해마지 않았는데, 이 작품에서도 대패질로 맨들맨들한 마룻 바닥의 묘사가 정말 사실적이다.


Paris Street, Rainy Day - 출처 : Wikimedia

- 카유보트의 파리의 거리는 이후 실제 현장을 다녀오게 된다. 작품 속에 나오는 장면을 실제 맞이하는 기쁨이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명작의 향연이 줄줄이 이어진다.


드가의 압생트


드가 특유의 구도를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중앙이 비어 있고 외곽에 인물들을 배치했으며, 가운데 탁자는 여인의 모습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없앴다. 이로써 압생트에 취해 멍하니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 더욱 극대화된다. 당시 이러한 구도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일본 판화의 구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압생트는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이 즐겨 마시던 독한 술로 환각 작용이 있어 한때 생산이 중단되기도 했던 술이다.)

화폭의 남자는 드가의 친구이고 여자는 배우 엘렌 앙드레.


드가의 무용 교실(La classe de danse)


드가는 특히 여성 무희들의 그림을 아름답게 묘사하였는데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괴팍한 성격으로 인해 동료들과 불화를 일으켜 르누아르, 모네가 인상주의 공동 전시회에 참여하지 않기로 해 다시는 모두가 참여하는 전시회를 열지 못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러한 때, 뒤랑뤼엘이라는 화상이 인상주의 전을 주도하여 1880년대 초에 파리의 화단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 여세를 몰아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가 1886년 인상주의 작품 3백 점을 전시하여 대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비로소 전 세계에 인상주의를 알리게 된다. - 윤운중의 유럽 미술관 순례 1에서 인용


에드가르 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희'


드가의 무희를 형상화한 조각 작품이 함께 있다. 실제 무희가 서 있는 것 같이 사실적이다. 실제 발레 옷과 슈즈를 신고 있다.

실제 사실적인 느낌이 나도록 설정한 것이다. 열네 살 소녀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지 않은가? 유리벽만 없다면.


제34전시실에 이르면 모네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루앙 대성당이 대표적이고 다섯 점이 걸려 있다.

모네 - 루앙 대성당 연작
인상주의(impressionism, 印象主義) 또는 인상파(印象派)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색채·색조·질감 자체에 관심을 두는 미술 사조이다. 인상주의를 추구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하였다. 1860년대 파리의 미술가들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클로드 모네의 유화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에서 비롯되었는데, 비평가 루이 르로이의 비판에서 처음으로 쓰였다.  - 위키피디아


그림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의 영향으로 그때그때 색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이러한 찰나의 순간을 화폭에 담고자 했던 이가 바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였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다. 그는 중간색을 표현할 때 물감을 섞지 않고 원색을 나란히 병치하여 표현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혼합한 듯한 느낌을 준다.

쇠라의 점묘파 역시 원색을 점으로 찍어 - 한 땀 한 땀 장인 정신에 빛나는 화가 - 빛의 효과를 표현한 것 아닌가.


'루앙 대성당 연작'은 1892년부터 1894년에 걸쳐 서른 점이나 그렸다고 한다. 날마다 대상이 또 달리 보이게 되니 그럴 수밖에.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늘 기대하고 그것을 캐치해낼 줄 알았던 사람.


모네의 '임종을 맞는 카미유 모네'


위 그림에 얽힌 슬픈 사연.

그의 첫 번째 아내 카이뮤가 숨을 거두는 모습을 그의 인상주의 화폭에 녹여 넣은 작품인데, 그녀의 얼굴에 임종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모습을 보고 본능적으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참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그의 삶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특히 여성들이 뜨아~ 하는 그림이 등장한다.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 (1886)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꽃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여인이 바람을 등지고 언덕에 서 있는 풍경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여자 주인공 같은 느낌. 모델은 그의 둘째 부인인 오슈데의 딸 수잔.

그녀의 하얀 드레스에 하늘의 푸른빛과 붉은 풀잎들이 반사된 모습이 물들어 있다. 자세히 보기 바란다.


목에 두른 숄의 펄럭이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다. 하늘은 빛에 화사하게 물든 뭉게구름으로 가득 차 있다.

참 잔잔한 느낌이 드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아 정말 눈 호강하는구나.


모네 '점심 식사, 아르장퇴유 모네의 정원과 왼쪽에 있는 그의 아들 장'


아 바로 다음에 이 작품이!

르누아르의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


피아노 학원에 가면 항상 걸려있던 그림. 책에서만 보던 그림을 실제 보게 되니 얼마나 반갑던지요.

참 정겹고 따스한 색감으로 소녀들을 아름답게 묘사한 그림이다. 오리지널 맞겠지요? ㅎㅎ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시골 무도회', '도시 무도회'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연작으로 같은 해에 그려졌다. 왼편 그림의 여인이 르누아르의 실제 부인이라고 한다.

우측의 도시 무도회의 아름다운 뒤태를 드러낸 여인은 바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뮤즈였던 수잔 발라동 - 툴루즈 로트랙의 모델로도 알려져 있고, 화가 위트릴로의 친모이다. -이다.

시골과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왠지 시골 무도회에서의 여성의 밝은 표정으로 인해 더 자연스럽게 보인다. 오른 편은 정적인 느낌.


자 또 여러분들이 좋아할 그림 또 등장이요~

르누아르의 '물랑 르 갈라트'


두둥! 르누아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 등장 했으요!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 가장 먼저 평론단의 호평을 받은 사람이 바로 르누아르로 그만큼 덜 인상주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마도 그의 그림에서 묻어 나오는 따뜻한 색감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그림은 한 마디로 '기쁨'을 표현한 그림이라 칭하기 때문.

그의 작품에는 늘 언제나 환하게 웃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위 작품에서도 무도회인 물랑 드 라 갈레트에서 흥겨운 분위기를 화사한 햇빛과 사람들의 얼굴 표정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햇빛이 인물의 옷에 점점이 투영된 모습을 보라.


르누아르 '습작, 토르소 빛의 효과'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여인의 피부에 얼룩진 한낮의 햇볕과 나뭇잎에 투과되어 그녀의 몸에 퍼져나는 초록빛의 모습을 보라.

이 작품은 발표 당시에 '완전히 부패한 상태의 초록과 보라색의 살덩어리'라는 비난을 받았다지만 정말 빛의 표현을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이 또 있을까 싶었다.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의 빛이 결국은 사람을 향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인물화로 방향을 틀어 인상주의와는 다른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세잔의 사과


아 이젠 현대 미술의 場을 연, 후대 피카소의 입체주의에도 영향을 미친 세잔 형님의 작품 등장합니다!

'사과 하나로 세상을 정복하겠어'라는 세잔의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그림이다.


여러 각도에서 본 것 같은 사과의 형상을 하나의 화폭에 담았다. 이 부분에서 힌트를 얻어 입체파가 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

- 그의 아틀리에는 남프랑스 엑상 프로방스(Aix-en-Provence)에 있고 엑상 프로방스 마을 전체가 그를 오마주하고 있었다.


세잔의 작품에 열중하는 이들


관람 투어 1시간 정도 소요. 아직 볼 것이 많다. 인제 절 반 정도 본 거거든요. 여러분들 아직 지친 것 아니죠?


시슬리의 작품


5층에서 내려다보면 미술관이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5층에서 내려다본 오르세 미술관 내부


2층 테라스엔 보이는 것처럼 조각상들이 전시돼 있다. 천정으로 투과되는 자연 채광으로 실내가 밝아짐을 느낀다.

자 다시 작품을 이어간다.


조르주 쇠라의 '서커스'


점묘 화법의 일인자 조르주 쇠라(George Seurat)와 동조자 폴 시냐크(Paul Signac)의 작품들이 있다.

그들의 한 땀 한 땀 점찍는 화법으로 인해 새로운 화파를 탄생시키긴 했으나 오랜 기간 동안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이 흠.

(누가 그토록 계속 점을 찍는 화법을 이어가겠는가 말이다. 작품 하나 완성하는 데 몇 년 걸리는데.)


쇠라는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화면에 셀 수 없이 많은 점을 찍는 테크닉이 주는 육체적인 소모를 감당하기 어려웠을까. 그는 32세에 후두염으로 요절하고 만다. 이 마지막 역작 '서커스'를 그리다 너무 힘들어 미완성인 상태로 전시회에 출품한 상태에서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과학과 예술의 결합이라는 측면에 있어 후대 팝 아티스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5층에서 바라본 야외 풍경


5층 레스토랑. 겁나 화려한 분위기였음.


이름 모를 그림

저기 구름처럼 적군이 깃발을 세우고 진격해오는 것도 모르고 이들은 모포를 뒤집어쓰고 잠만 자고 있구나. 이를 어째?


2층 전시실로 이동.

오르세 미술관에서 가장 인파로 붐비는 고흐, 고갱 등 후기 인상파 화가 작품들이 70호실부터 72호실에 걸쳐 관람객을 맞이한다.

2층 테라스에서. 12시 32분.


Terrace에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문 석고 주물 원본을 비롯한 여러 조각 작품이 전시돼 있다.


Louis-Ernest Barias  作


다채로운 색으로 마치 옷을 차려입은 듯한 대리석 조각 작품. Marble이라고 씌어있으니 대리석은 맞고, 개별 컬러가 다른 대리석을 Assembling 해서 이러한 작품을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놀라울 따름.


피에르트 오귀스트 르누아르 作


Antoine Bourdelle 의 'Hercules the Archer', 1909


하늘을 향해 힘껏 활시위를 당기는 헤라클레스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브뤼셀은 로댕의 제자로 무려 15년간동안을 같이 작업했는데, 표면적으로는 로댕의 여성 편력으로 인해 하산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 근저에는 로댕 밑에서 영원히 조수의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나는 위기의식을 느껴서일 게다. 그만의 작품 세계를 펼치고 싶어서였을 터.


루마니아의 조각가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도 로댕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잠시 조수역할을 하다 이내 뛰쳐나왔는데 이런 말을 했다지 않는가. '큰 나무 아래에서는 다른 나무들이 자랄 수 없다.'



드디어 후기 인상주의의 시대를 연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의 작품.

고흐의 '예술가의 초상'


70호실에 이르면 고흐의 작품을 보게 된다.

괴팍한 성격의 고흐가 떠올라 성격은 참 탐탁지 않지만 그의 열정만큼은 높이 사는  화가가 아니겠는가?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스스로 모델이 되어야 했던 그의 슬픈 현실이 애달프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 나오듯 나선형으로 소용돌이치는 모습으로 장식한 배경에서 예술가로서의 삶을 진정 사랑했던 그의 인생이 아직도 살아 꿈틀대는 것 같다.


그녀는 휴대폰에 그를 담고 나는 그녀를 카메라에 담는다.


아 다음에 이어지는 작품은 우리 커플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림.

고흐의 '정오의 휴식'


고흐가 존경해 '마지않던' 장 프랑수아 밀레의 작품을 모티브로 그린 작품.

1889년 5월, 고흐는 주체할 수 없는 발작이 이어지자 스스로 생 레미 정신 병원에 입원한다.

동생 테오에게 그가 유일하게 존경하던 화가인 밀레의 사진을 몇 점 가져달라고 부탁하였고, 그 가운데 밀레의 '오수(午睡, 오후의 낮잠)'라는 작품을 모사하였다.(밀레의 작품은 보스톤 미술관에 소장돼 있고, 당시 판화가 유통되었는데 테오는 이 판화 그림을 가져다 준 것이니 실제 그림은 좌우가 대칭된 형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잠시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하는 부부의 평온한 모습이다. 가을걷이의 노오란 색이 그림에 따듯한 온기를 보급하는 듯.

하늘은 코발트 블루에 노랑 볏짚이 대비되고 멀리서 지푸라기를 먹는 소의 모습이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느끼게 한다.

(밀레가 주도한 바르비종파는 화폭에 농촌 풍경과 동물들, 그러한 자연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전하고자 했다.)

특히 아내의 남편에게 살포시 기대어 잠들어 있는 모습이 참 소박해 보이고 정겹다. 거리낌 없이 전해지는 부부의 사랑이 느껴진다.

그래서 필자는 이 그림이 좋다. 우리 마나님도 액자를 끼고 찰칵!


한편,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고 난 후 7개월이 지나 오베르 쉬와즈에서 권총 자살을 한다...


그리고 오베르 쉬와즈 성당.

고흐의 오베르 쉬와즈 성당


고흐가 생을 마감했던 오베르 쉬와즈에 있는 성당을 그린 그림으로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굴곡진 인생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이내 숙연해진다.

마치 흐물거리는 듯한 성당 건물의 지붕과 창문의 모습에서 불안한 그의 심리 상태를 예감하게 한다.

성당 앞 갈림길에서 그는 어느 길을 택한 것일까. 왼쪽 길이 의미하는 표상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오베르 쉬와즈 성당' 상세


두터운 물감 터치는 그림에 강렬한 힘을 준다.

분명한 색깔과 불타는 붓질.

불꽃같이 살다간 그의 생애가 떠올라 잠시 가슴 먹먹함을 느낀다.


웅성 웅성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이 작품이 틀림없다.

고흐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그가 사랑했던 아를 지방 - 남프랑스 여행지 선정 시 고민하게 했던, 그러나 끝내 선택받지는 못했다.-의 론강(Rone River)의 밤 하늘에 반짝이는 북두칠성과 론강에 반사된 가스등 조명의 불빛이 반짝이는 그림이다.

때마침 그해 달력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매달 등장했는데 여행 가는 시점에 이 그림이 딱 나와서 기대감을 증폭시켰었다.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상세


이 그림 역시 그의 상징과도 같은 두터운 물감 터치를 확인할 수 있다. (물감 살 돈도 없었을 텐데.ㅎ)


그림 작품은 생각보다 작다. 하지만 그림이 뿜어내는 포스는 엄청나게 크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또 다른 명작.

고흐의 '아를의 침실'


이 그림은 시카고 미술관에서도 본 적 있다.


자신의 침실을 그린 것으로 그가 그린 동일한 세 점의 작품 - 하나는 암스테르담 미술관에 -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그린 작품으로 제일 사이즈가 작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테오에게 쓴 편지에 이 작품에 대한 제작 동기가 나온다.


단순히 내 침실을 그리기로 했다. 오로지 색채만으로 모든 것을 그리고, 색을 단순화시켜 방안의 모든 물건에 장엄한 양식을 부여하려고 한다. 여기서 색채로 휴식 또는 수면을 암시할 수 있을 거야. 한마디로 말해 이 그림을 보고 두뇌와 상상력이 쉴 수 있도록 말이야.  ... 가구를 굵은 선으로 그려서 다시 한 번 완전한 휴식을 표현해야 해. 벽에는 초상화가 걸려 있고, 거울 하나와 수건, 그리고 옷 몇 벌이 있지. 그림 틀은 흰색이어야 할 테지. 왜냐하면 그림 속에는 흰색이 하나도 없거든... 일본 판화처럼 자유롭고 평평하게 색을 칠하려고 해...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고흐 개인의 방인데 대부분의 물건들이 두 개가 놓여 있다는 것은 그가 외로움에 사 묻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고갱을 기다리며 아를에서의 공동생활을 기대했던 그의 기대감을 투영하고 있다.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


그의 정신 병원 주치의이기도 했던 가셰 박사의 초상도 걸려있다. 이 작품은 가셰 박사의 맘에 들지 않아 다시 그린 것이라고.


고흐의 '아를의 무도회장'


위 작품은 사뭇 다른 화풍의 작품이다. 고갱의 종합주의를 의식하여 뚜렷한 윤곽선을 강조하고 있다.

자 여기까지가 고흐의 (실로) 대단한 작품 컬렉션이었다.


이제는 고갱의 작품을 들여다보자.

고갱의 '타이티의 해변의 여인들'(上) 등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서 열대 지방의 원시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타이티 섬으로 건너가 이국적인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그러나 이곳도 문명의 파도를 거스를 수 없었다. 위 그림에서 왼쪽의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인이 이를 대변해준다.


고흐만큼이나 고갱도 불행한 삶의 연속이었다. 대중이 그의 작품을 외면하고 수입이 끊기자 힘든 생활의 연속에서 다시 타이티로 건너가게 되고 자살을 시도하는 등 생사를 넘나들다 결국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후대에 와서야 그들의 작품이 화단의 인정을 받아 대중에게 소개되고 회자되어 뒤늦은 유명세를 치르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불운한 삶이 주는 역경 속에서 피워내는 열정의 장미꽃 같은 것 때문일까.


고흐의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예전 서울 세종 문화회관에서 열렸던 고갱전에서 보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타히티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자화상이다. 그는 종종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 투영하곤 했다.

그의 자화상(매부리코)에서 고집스러운 그의 예술관이 읽히는 듯하다.


고갱의 풍경화


붐비는 고흐, 고갱 갤러리 홀에서 나온다.



그리고 툴루즈 로트렉의 작품 몇 점이 걸려 있다.

평생 아웃사이더와 같았던 그의 삶만큼 그의 작품도 모퉁이 벽에 걸려 있다.

툴루즈 로트렉 '춤추는 라 굴뤼'

물랭 루주 댄서들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인 것 같은데, 그의 그림을 필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캔버스에 대충 선으로 그리고 색을 여기저기 칠한 것 같은.

그림은 역시 '잘 그려야 한다'라는.  잘 그린다는 것은 누구나 보았을 때 공통적으로 느끼는 미학적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내게 그의 작품은 영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일 지도.


12사도의 누드화? 왜 예수님도 벗기지 그랬니?


일부 회화 작품의 경우 'LUX'라고 씐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뤽상부르 궁전에 전시됐다가 이쪽으로 이관해온 작품을 의미한다.


2층에서 조망한 미술관 풍경



오후 1시 15분. 이내 시장기가 느껴져 점심을 먹기로 한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이곳 2층 'Le Restaurant'라는 식당이 매우 근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식당인가 궁전인가


화려한 샹들리에 와  천장화까지 .. 무슨 궁전에서 식사를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다소 사람이 많아서 정신이 없었지만 장소가 주는 분위기가 너무나 좋았다.


분위기 너무 괜찮은데?
화려한 천장의 데코레이션


가격도 그렇게 비싸지 않았다. (2인 52€)

스타터와 메인 요리, 그리고 디저트가 나오는 점심 세트!


점심 세트 메뉴에요~

웬만하면 이 레스토랑에서 그냥 드시길.. 5층 레스토랑보다 나은 선택이 될 것임.




0층으로 이동하여 관람을 시작한다. 뭐든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

앵그르의 '샘'


프랑스를  아니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앵그르의(Jean-Auguste-Dominique Ingres)의 작품이 걸려 있다.

풍만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선으로 묘사하였다. - 들라크루아의 색채와 대조되는.

그의 작품은 역시 루브르가 더 어울린다.


테오도르 제리코 作


루브르 박물관의 '메두사의 뗏목' 작품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의 작품도 눈에 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역동적인 인물 배치에도 영향을 준 화가로 낭만주의 화가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천재적인 화가로 불렸지만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바람둥이 기질이 있어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자코메티의 작품도 보이네요~


Alexandre Cabanel의 '비너스의 탄생'


아름다운 여체의 묘사가 탁월하며, 아기 천사들의 구여운 모습도 참 인상적이다.

그저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바넬은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작품을 공부하였고 정통 아카데미 화단의 인정을 받아 아카데미 원장까지 역임하게 된 사람인데, 이 작품은 살롱에서 찬사를 받아 금상을 수상하고 당시 최고 권력자인 나폴레옹 3세가 구매한 작품이기도 하다.


한편 비평가인 에밀 졸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신화 속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이 그림을 '젖의 강에 빠진 이 여신은 맛있어 보이는 고급 창녀와 닮았다. 그녀는 살과 뼈로 만들어지지 않고 주로 분홍색과 흰색으로 되어 있으며 케익 위에 부드러운 장식으로 사용되는 마지르팡 종류로 만들어진 듯 하다.'라고 혹평을 했다고 한다.


인상주의를 지지하는 그로써, 아카데미를 거부하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화단에 충격을 주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면 여성이 몸을 의도적으로 뒤틀며 나신을 보여주는 그림이 유독 많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그의 다른 작품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사랑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남녀 주인공의 몸이 뒤틀려 있으며 이러한 자세를 통해 그림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대신 전달해준다.


William Bouguereau의 '비너스의 탄생' (1879)


위 그림을 본 순간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S라인의 원조는 역시 비너스인가. - 루브르박물관의 밀로의 비너스에서도! -

현장에서 보면 여체가 더 희게 보인다. 눈을 정말 뗄 수가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니 믿어주시길) 아 현장의 경험을 전해야 하는데...

정말 몇 번이고 뒤돌아 보게 했던 그림이다.


William Bouguereau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지옥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다소 보는 이에게 부담스러운 작품.


필자만 넋 놓고 본 게 아니라고요.


정신 줄 놓게 했던 공간에서 빠져나온다.

오후 2시 20분. 3시까지 관람키로 했는데 시간이 얼마 없네.


0층의 오르세


8번 홀에서는 나비파(Nabis)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오르세에서는 이들 화파의 작품이 꽤 많이 전시돼 있다.


Denis 作


나비파(Nabis 派)는 폴 고갱에 영향을 받아 파리의 젊은 화가들이 모인 공동체. 인상주의에 염증을 느낀 젊은 화가들, 폴 세뤼지에, 피에르 보나르, 드니, 에두아르 뷔야르 등이 주축이었다.  인상주의가 자연의 미묘한 색채의 변화를 연구하고 묘사한다면 이들은 작가 자신의 내면을 분석하여 형태와 색채와 무관하게 작가 해석에 치우치는 경향이 강하다. 화가 개개인들의 개성만을 추구하다 보니 교류가 줄어들고 이윽고 해체된다. - 위키피디아 인용


1888년에서 1910년까지의 나비파들의 작품 세계를 진열하고 있다.

Emile Bernard 作


마치 고갱의 작품을 모사한 것 같다. 그의 종합주의를 오마주 했다고 하니.

개인적으로 그다지 관심이 가진 않는 장르이다.  이내 다른 방으로 이동한다.

구스타브 모로의 '선한 사마리아인'


성서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그린 그림. 척 보면 안다. (이 작품은 New Acquisition이다.)


구스타브 모로 '오르페우스'


이 작품도 어느 책에서 보았던 작품.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내용을 그린 것으로 그의 연주하던 악기(리라)가 되어버린 오르페우스를 슬프게 쳐다보는 님프 에우리디체의 모습을 잘 묘사하였다.



다음은 툴루즈 로트렉의 작품이 '제대로' 연출된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10번 전시실


몽마르트르에서 불운한 삶을 살다간 툴루즈 로트렉.

어릴 때부터 유전적인 요인으로 병약하게 자랐고, 사고로 인해 하반신의 성장이 중단되어 150센티 정도의 단신이었다.

몽마르트르의 화가 집단과 교제하며 또 물랭루주를 들나 들며 퇴폐적인 문화에 젖어들어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그가 주로 마주하는 무희들을 작품 소재로 채택하였다.


춤추는 잔 아브릴(좌), 화장하는 여인(우)


당시 물랭루주의 인기 있는 무희였던 잔 아브릴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몽마르트르에서 접했던 무희나 매춘부들의 삶에 지친 모습을 가감 없이 화폭에 옮겼다.

툴루즈 로트렉은 결국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뜬다. (고흐도 37세에 세상에 이별을 고했는데)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화풍이 좀 다르기에 각자 보고픈 작품들을 보며 중간중간에 연락을 취하며 눈 맞춤을 하곤 했다.

Jean Beraud 作


인물의 사실적인 묘사와 붉은색 커튼에 금박을 입혀 화려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 나의 눈길을 잠시 머무르게 했다.


다음은 오페라 가르니에 주변의 모습을 미니어처 형태로 구성하여 전시하고 있다. 좀 특이하다 싶었다. 이게 왜 여기에? 오페라 가르니에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파리 오페라 지구

과거 오페라 가르니에의 공연 무대도 하나의 작품이 되기 때문일까.

무대를 조그맣게 만들었더라.
오페라 가르니에 절단면


가운데 화려한 객석이 보인다. 그 우측으로 멋들어진 계단도 보이고.

이후에 오페라 가르니에 내부 투어를 하게 되는데 위 공간을 하나하나 밟아 보게 된다.


자 이제 오르세 미술관 투어도 막바지입니다. 조금만 더 따라오시길. (전 이것 정리하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0층에서 바라본 오르세
군데군데 아기자기한 조각상들을 전시


자 이제 마네의 작품 몇 점과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 아저씨의 작품을 보고 마무리합니다.


마네의 올랭피아


이 그림 한 번쯤은 다 보았을 것이다. 당시 뒤마의 소설 '춘희'가 인기를 끌었는데 거기서 올랭피아라는 매춘부가 나온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올랭피아이니 곧 매춘부를 연상케 한 것이다. 게다가 이 여인이 누워있는 자세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아래 그림)를 연상시켰기에 미화했던 비너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노출했기 때문에 화단이 받아들인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했다고.


이 그림이 살롱전에 출품되는데 이슈가 될 것을 우려해 구석에 전시했는데 그게 더 이슈가 되어 사람들이 몰려들어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그림 속 모델은 빅토린 뫼랑으로 '풀밭 위의 점심 식사'의 모델이기도 했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 출처:Google Arts & Culture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는  이미 '풀밭 위의 점심 식사'로 기성 주류 화단에 이슈를 제기한 진정한 파괴자(Disruptive Innovator) 였으며 당시의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 제기를 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모네를 비롯한 추종자들이 그를 인상주의의 대부로 모시고자 했으나 그는 끝까지 인상주의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 화단의 주류가 되고자 했지 이단아로 남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리 숙소 근처에 동명의 'Olympia' 극장이 있어 늘 이 그림이 떠오르곤 했다.

시중드는 흑인을 부린 것을 보니 고급 매춘부인 '코르티잔'으로 해석이 되며, 그림 속 검은 공양이는 음탕한 도발을 상징한다.


마네 '에밀 졸라'


인상주의 편에 섰던 작가 이자 평론가인 '에밀 졸라'를 그린 그림이다.  

우측 상단에 '올랭피아' 그림과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일본 판화 우키요에도 보인다.


이 나라 사람들은 언제든지 시간만 있으면 이런 대가들의 작품을 늘 접할 수 있으니 얼마나 부러운지요.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여러 대가들의 예술 세계를 직접 가까이에서 보고 느낄 수 있으니 이들의 문화에 대한 인식과 그 수준이 얼마나 높을 것인가? 또한 파리 주요 국립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면 미술관/박물관을 거의 무료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학생들이 돈에 구애받지 말고 예술을 자주 접하게 하려는 정부의 시책 또한 본받을 만하다.


마네의 '발코니' (1968-9년)
옥외의 밝음과 형태를 집어삼키는 내부의 어두움 사이의 대조를 감행하게 자극한 것은 분명히 고야의 그림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마네는 60년 전에 고야가 행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이 같은 탐사를 수행했다.  -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마네가 그린 인물들의 얼굴을 보면 평면처럼 느껴지는데 이는 밝은 야외의 햇살을 받으면 얼굴의 굴곡이 묻히고 이내 평면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 결과 화폭의 인물들은 과거 어느 화가의 그림들보다 더욱 사실적인 것.

발코니 난간의 대담한 색상이 그림에 깊이감을 더해줘 평면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준다.

앞에 앉아있는 여인이 베르트 모리조.




7번 홀에는 대형 캔버스로 구스타브 쿠르베의 두 개의 대형 작품이 진열돼 있다.

구스타브 쿠르베의 '오르낭의 장례식'


대형 캔버스(315cmx668cm)에 그린 작품으로 그의 고향에서 있었던 장례식을 옮긴 것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인데 이들을 종교화처럼 대형 크기의 그림에 담았던 것 자체가 당시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모두 제각각이라 어느 중심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묘한 측면이 있다.

즉, 당시 널리 인정된 인습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했고 이를 통해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순수함을 선언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주의(The Realism) 는 미술에 있어 혁명을 뜻하는 것이었다. 쿠르베는 오직 자연의 제자이기를 원했다. 어떤 면에서 그의 개성과 방식은 카라바조와 유사했다. 즉 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을 원했다.
-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구스타브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


화가의 아틀리에가 이웃해있다. 이 작품 사이즈 역시 어마어마하다.

그림에 나오는 이들은 기층민들로 가난에 시달리는 이들, 죽음에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쿠르베는 설명하였다.가운데 그림을 그리는 이가 화가 자신이며 우측의 누드모델은 쿠르베가 누드 사진을 보고 그려 넣은 것이다.

이 누드의 여인은 '창조'를 의미하며, 그림을 응시하는 어린아이는 '순수'를 상징하는 알레고리.

중앙에 드리워진 메달에는 쿠르베의 정부(情婦)가 그려져있다고 '윤운중의 서양미술사' 책에 언급돼 있어 가까이서 봤더랬다. ㅎ

맨 우측에 책을 읽고 있는 이가 쿠르베를 적극 지지했던 시인 '보들레르' 였다.


이단아는 이단아를 알아보는 것인가.

보들레르는 역시 모든 예술이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나타내야한다고 믿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쿠르베의 작품들


거의 모든 홀을 둘러보았다. 5시간 정도 소요된 것 같았다.

대강 둘러보면 2시간이면 된다는데 찬찬히 보면 이 정도는 걸리니 참고들 하시기 바란다.


아 이 그림 너무 좋다니까요


수미쌍관으로 끝마치는 것이 좋으니 처음 들어간 4번 전시실 밀레 작품을 다시 올리며 '걸어서 미술관속으로' 의 첫번째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편을 정리하고자 한다.


현 시점(2018년 가을)에 오르세 미술관의 주요 작품들을 망라했다고 보면 된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물론 자연주의, 사실주의 작품들의 향연을 즐긴 매우 '인상적인' 시간이었으며, 그동안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봐왔던 명화들을 직접 보게 된 경험은 짜릿함 그 자체였다.


언제든 다시 찾아오라는 작품들의 부름에 다시금 응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전해준 밀레의 작품 세계


[이야기 하나 더]

오르세 미술관에서 꼭 보고 싶었던 모네의 '생 라자르 역'을 직접 보지 못해 아쉬웠다. 아마 어디 여행 중이었던 듯.


생 라자르 역 (1877) - 출처 Google


생 라자르 역은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작품에 많이 활용했던 대상으로 때마침 기차가 개발되어 파리 근교에 나가 야외의 쏟아지는 빛 속에서 그들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역장에게 기차가 정차해 있는 풍경을 그리고자 하니 협조해달라는 다소 당돌한 모네의 부탁에 역장은 다른 역을 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즉시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고 열차를 플랫폼에 정차시킨 후 실감 나는 증기를 뿜어내도록 하기 위해 일시에 석탄을 연소하도록 지시했고, 모네는 이를 생생하게 묘사해 낸다.


위 그림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며칠 후 실제 생 라자르 역을 구경하기 위해 가보았다. 지금은 현대적으로 변모했지만 그림 속의 풍경은 일부 남아 있어 잠시 서성이다 발길을 돌렸더랬다.


다음은 오랑주리 미술관 편이 이어집니다.

많은 애정 바랍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