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성적욕망이 사랑일까?
방식이 다른 사랑에 상대적인 깊이를 잴 수 있을까. 처음엔 깊이가 아닌, 방식의 차이라 항변했지만 굳이 잰다고 덤빈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간의 사랑,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친구 사이의 우정은 서로 사랑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각자의 사랑에 절대평가를 주자는 게 나의 생각이었지만, 이것을 상대평가하려는 누군가의 원망 섞인 비난, 그게 마음 속에서 떠나지가 않아서, 며칠동안 ‘사랑’이라는 흔하디 흔하고 진부하다면 진부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은 그 모든 사랑을 초월하는 우위라고들 하니, 이건 논외로 친다면, 우정에 성적 욕망이 개입되어 이것이 이성간의 사랑으로 ‘변질’된다면, 이것은 나의 표현대로 ‘변질’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발전이라고 하는게 맞는걸까?
‘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했다.’고들 표현한다. 생각해보니 이를 더 일반적으로들 쓰고 있었다. 그럼 사랑의 깊이에 있어 ‘성적욕망’이라는 것이 그 척도가 되는 건가. 어떤 책에서 언뜻 보았듯 사랑의 모든 건 그저 성적욕망일 뿐이라고 했던 쇼펜하우어의 얘기가 떠올랐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심오하고 복잡미묘한 감정을 모독하는 거라고. 하지만 그의 말이 맞는 거라면.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감정에 성적 욕망이 빠져있었다면 그 정도로 나에게 잘 해 줄 수 있었을까, 그 정도로 나에게 따뜻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심지가 굳고 심성 착한 사람이더라도, 자신에게 일관적으로 차갑고, 모질고 못되어 먹기만 했던 누군가를 한결같이 따뜻하게 대해주기란 쉽지 않닥. 그 아이가 성모마리아나 성인군자라고 생각했던걸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었나 보다.
거기에 우정이 아닌 사랑이라면 ‘사랑’인, 더 정확히 말해 성적 감정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참아낼 수 있었던 거라고, 그래서 오히려 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자, 모든 인간관계가 혼란스럽고 이상해지고, 심지어는 가벼워진다. 사람의 감정이란게, 단순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철학자 마크 롤렌즈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들, 그 눈부신 예술과 문명의 발전의 가장 강력한 동력은 ‘성욕’이라고. 웃기는 소리라고 그저 웃어넘겼던, 쇼펜하우어와 더불어 세트로 이상하게 군다고 생각했던 이 철학자들의 주장이 어쩌면 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이 생각과 감정들이 나중에라도 이 글을 다시 읽어본다면 희미하게라도 선명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