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발달하고 제아무리 비대면 시대로 흘러가고 있다지만 아직까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인맥과 백 좋은 자를 이겨낼 재간은 없는 법이다. 허무진은 한때 자신의 별명이 ‘돌아온 탕아’였다고 떠들어댄 적이 있었다. ‘자칭 쓰레기 같았던’ 세월을 보냈었지만 그때에도 인간관계 하나만은 탄탄하게 해 두었던 것이 지금 자산으로 돌아왔다는 얘길 자랑처럼 했다. 좀처럼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고 술이 세서 좀처럼 술에 취하는 법도 없었던 그는 그 날 만큼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해서, 희정과 직원들 앞에서 자신의 가족사까지 모두 털어놨다. 대구지검장 출신인 아버자와 유명한 첼로이스트인 어머니, 모두 명문대에 진학하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을 잘 찾아 가주고 있는 세명의 형제, 누이들과는 다르게 자신만 유일하게 미운 오리 새끼였다는 둥,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를 볼 때마다 자화상을 보는 듯한 서러움에 복받쳤다는 둥의, 희정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복에 겨운 투정 정도로만 들리지 않는 자기 푸념을 긴 시간 늘어 놓았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술만 들이키는 게 지루하지 않느냐며 2차는 가라오케가 어떻겠느냐는 말을 어김없이 뱉어냈다. 기분이 좋고 분위기가 한껏 오르면 종착역이 되었던 ‘가라오케’라는 단어에 디자이너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라와 수현은 재빠르게 카톡을 주고받았다.
- 아, 또 노래방이야?
- 존나 극혐. 한동안 안가나 싶더니.
디자인실과 노래방 같이 가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유독 좋아하는 영업부장의 기름진 얼굴을 흘겨보며 보라와 수현이 희정의 양쪽에서 팔짱을 꼈다.
- 팀장님, 이번에도 우리 좀 늦게 들어갈까요? 어디, 카페에서 차 좀 마시고 술 좀 깨다가 들어가요.
- 그냥 같이 들어가. 날마다 가는 것도 아니고, 잠깐 참으면 되잖아.
참아야 하는 인고의 시간이 당연히 막바지 회식의 늘어지는 피날레 정도겠거니, 생각했던 시은은 곧 자신의 상사가 허무진의 품에 아무렇지도 않게 안겨 있는 광경을 보고 식겁하고 만다. 허무진이 희정을 오랜 시간 부둥켜 안고 춤을 출 수 있도록 영업 팀의 직원들이 내리 발라드만 선곡하고 있는 모습과, 브루스를 추고 있는 옆에서 탬버린을 들고 갈대 춤을 추는 보라와 수현을 시은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지영은 그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에서 동진과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 이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는 모습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무진이 희정의 허리를 두 손으로 힘껏 감싸 안더니 위로 들어올리려 안간힘을 써대는 통에 희정이 입은 치마가 올라가며 그녀가 입은 속옷이 보이고 말았다. 시은이 소리를 지르자 수현이 황급히 희정의 치마를 끌어내리고 보라와 시은이 무진의 품에서 희정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이구, 하하 우리 대표님 많이 취하셨네.
무진이 손에 쥔 맥주잔의 표면에 조명들이 부서져 내렸다. 가라오케 천장에 매달린 미러볼이 쉼 없이 돌아가며, 반짝이는 조각들을 사람들의 얼굴 위에 흩뿌렸다. 술기운과 조명, 음악, 웃음소리가 뒤섞인 그 안에서 누군가는 정신없이 웃었고 누군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공포와 혼란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시은을 누군가가 자신의 무릎 위에 억지로 앉히려 들었다. 시은이 저항하려 해도 그는 막무가내다. 시은은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세게 치고 몸을 밀쳐내며 가까스로 노래방을 빠져나왔다. 눈물을 훔치며 거리를 뛰어가는 시은을 술에 취해 걷던 사람들이 쳐다봤다.
- 글쎄, 우리도 알아. 그게 부당하다는 거. 요즘 특히 그러면 안된다는 거. 근데 이놈의 회사는 계속 그러고 노는 걸 우린들 어떡하니. 신 팀장님도 좋아서, 아님 바보라서 참고 있겠니. 팀장님도 그냥 넘기는 일을 시은이 네가 이렇게 난리 칠 일은 아니지 않니?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영업부 김성남 과장에게 찾아가 어제 일을 사과하라고 목청껏 따지고 드는 시은을 보라와 수현은 곧장 소환하여 소 회의실 테이블에 앉혔다. 못난 놈들의 관행일 뿐이고 그 잠깐 동안 더러운 똥 밟은 셈 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라는 두 선배의 말에 시은은 말문이 막혔다. 시은은 그 날 이후로 팀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시은이 없는 점심자리에서는 아무도 가라오케에서 있었던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희정은 그 날 이후 시은을 마치 투명인간 취급했다. 막내에게 바로 지시할 일을 시은의 바로 위 직급인 수현에게 시키도록 지시했고 덕분에 수현은 챙겨야 할 일이 두 배가 되었다며 투덜댔다. 희정은 복사기 바로 옆에 있던 지영의 자리를 시은과 바꾸도록 하고 보통 다 같이 구내식당에서 먹었던 점심을 보라와 수현, 동진만 데리고 나가 따로 먹는 등 최대한 시은과 대면하지 않으려고 했다.
어느 날 시은은 퇴근길, 일주일 새 푹 꺼진 눈으로 회사 앞 카페에 한동안 앉아있었다. 오늘 역시 점심도 먹지 않았고 저녁 식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시장기가 없던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뉴스 앱을 열었다.
‘회식, 그리고 노래방에서 있었던 일.’
며칠 뒤, 인사팀 면담이 열렸다.
-시은씨, 대표님이 이 회사를 설립하고 단기간에 이만큼 키우는데 얼마나 전설적인 공헌을 하셨는지 잘 모를 거예요. 그런 일은 내부에서 서로 대화로 풀 일이지 이렇게까지 키우면 서로 힘듭니다. 대표님이 지금 많이 불쾌해 하시고 있어요. 제보를 해도 시은씨에게 일어났던 일만 얘기하면 되지 대표님은 왜 끌어들입니까? 그리고 모두 아니라고. 그런 일 없다고 하는데 시은씨 주장이 받아들여 지겠어요? 기자한테서 연락은 받았지만 뉴스에는 어차피 안 나갈 거예요.
하지만 인사 팀의 장담과는 다르게 그날 오후, 이 기사는 포털 뉴스에 올라왔다.
‘유명 아이돌 그룹이 모델로 활동하는 패션 중소기업, 회식 자리에서 여직원 성추행 의혹. 회사대표가 남직원에게 여직원의 속옷 보여줘..’
이대로 묻힌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매우 자극적인 기사 제목과 함깨 국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포털의 기사로 뜨자, 뉴스는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좁디 좁은 패션업계에서 제보자의 익명성은 익명으로 보호되지 않는 법이다. 곧 패션업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은을 알게 되었고 삼삼오오 모여있을 때 사라믈은 ‘케이 트렌드’의 허무진과 희정, 시은의 얘기를 했다.
- 내가 뭐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 기사 이후로 코르티스와 계약도 취소되고 우리 브랜드에 대한 불매운동도 퍼지고 있어.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오고 우리가 철야하고 밤샘했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다 무너진 꼴이란 말이야. 그 피해가 회사 전체에게 돌아오니 결과적으로 자승자박인거지.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면서 하는 동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지영은 평소에 가장 편하게 느껴졌던 동진이 오늘만큼은 낯설고 불편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 그럼 그 꼴을 우리가 계속 참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네 김대리 얘기는?
- 아니, 일을 이렇게까지 키울 건 아니라는 거지.
- 요즘시대에 그런걸 누가 참고 있어? 곪고 곪은게 지금 터진거락 봐.
언성이 높아진 지영의 얼굴을 동진은 흘끗 쳐다보고는 웃는다.
- 모든 일에 덤덤한 우리 지영 대리가 이번 일에 화가 많이 났나 보네. 그래. 그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야.
근데 그게 회사 내 전체를 흔들 만큼 죽고 살 문제냐는 거지. 밖에 기획부와 영업부 사이에서 허대표님은 거의 레전드로 통하는데, 직원들을 잘 챙겨주기도 하고.. 이제 갓 입사한 신입 아이 하나 때문에 이 사단이 날 일이냐고 다들 그렇게 얘기하고 있어.
한동안 회사 내부 전체에 미묘하게 정적이 흘렀다. 희정 뿐만 아니라 디자인실 팀원의 대부분이 시은을 피해 다녔다. 그러나 그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도 시은을 불러서 협박을 하지도 않았고 회유와 화해 같은 시도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시은이 마치 다른 시 공간에 홀로 떠다니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존재인 것처럼 굴었다. 지영은 그녀가 앞으로 이 회사 뿐 아니라 이 업계 전체에 남아있을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지영의 예상대로 시은은 몇 주 지나지 않아 사표를 내고 도망치듯 회사를 떠났다.
-기사 내용은 알지만, 형사사건으로 정식 수사가 진행되려면 피해자의 고소 또는 신고가 필요합니다.
지영이 알아본 바로는 사건이 이 정도로 공론화가 되었고 피해 내용이 구체적이라면, 인지수사를 개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통화 상으로 경찰은 그럴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지영은 곧 알아차렸다. 이상하리만치 기사 보도 이후 진척되는 상황이 없었다. 항간에는 허 대표가 자신의 아버지 쪽 인맥을 동원하여 뉴스의 재 유포와 수사 개시를 차단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시은이 떠난 자리는 금방 다른 사람들로 채워졌다. 회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금방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품평회를 일주일 앞 둔 디자인실은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예전만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지영은 밤 늦게까지 남아 전체 소등을 하고 퇴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해도해도 끝이 없는 지긋지긋한 이놈의 일, 오늘은 밤이라도 새야 하나.’ 지영은 하던 일을 놓아버리고 사무실 밖을 빠져나오다 문득 어둠 속 홀로 환하게 켜져 있는 사무실 안 수족관 앞에 멈춰 섰다.
희뿌연 물 속 안에서 형형색색의 작은 물고기들이 느릿느릿 헤엄치고 있다. 형광빛 비늘이 천장의 조명에 반사되어 벽에 물결무늬를 만들어 내는 것이 홀로 다른 시공간에 떠 있는 물성 같다. 노란색 꼬리를 가진 구피가 다섯마리 였는데 지금은 세 마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짝을 지어 같이 다니던 엔젤 피쉬 중 한 마리가 지영 앞에 멈춰 서더니 같은 자리를 맴돈다. ‘내가 밥을 주는 줄 아는 걸까, 예들은 이 안에서 평화로울까?’ 수족관 구석에 가 있는 미세한 금은 아직까지 보수받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예전보다 좀 더 커진 것도 같다. 지영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언젠가부터 방치 되어 있던 그 금을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 그렇게 한동안 물고기들을 바라본 채 서 있다.
지영은 집에 와서 씻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아홉시 넘어서는 절대 먹지 않는다는 규칙을 깨고 밥 한그릇을 갖가지 나물반찬과 함께 깨끗하게 비웠다. 그리고는 휴대폰에서 시은의 번호를 찾아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 시은씨, 변호사 사서 정식 고소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회사 내에서는 아마 아무도 증언해주지 않을 거예요. 근데 그 증언 내가 할게요.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줄 테니 포기하지 말고 해봐요.
수화기 너머 시은은 아무 말도 없다.
- 시은씨 듣고 있는건가요?
- 대리님, 대리님은 회사 계속 다니셔야 하잖아요. 부모님이랑 지금 사시는 집 대출금 갚고 있으시다고, 지난번 그 회사에서 힘들어도 몇 년은 버티고 더 큰 회사로 이직하는게 목표라고 하셨잖아요.
지영은 작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 글쎄, 버티더라도 나도 이런 식은 아닌 것 같아서요. 나 또한 본 것도 많지만 시은씨처럼 당한 적도 있거든요. 이 참에 같이 보따리 다 풀어보죠 뭐. 참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 말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러라 하고,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구요. 그러니 기운 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