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살 문제인가? 1.

by 이라IRA

지영은 재배치된 디자인실 자리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종일 쉬지 않고 소음과 서류를 뱉어내는 레이저복사기 옆에 자신의 책상이 나란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디자인실 공간이 그 정도로 비좁지도 않은데 굳이 그렇게 짜 놓은 신 팀장에게 지영은 아무 불만의 내색도 비치지 않았다. 맞은편에 볕이 적당히 드는, 가장 좋은 자리를 나란히 받은 보라와 수현은 지영 쪽을 흘끔거리며 아까부터 누설되면 안 될 기밀이라도 있는 양 귓속말을 쉴새 없이 주고 받는다.


- 빨리들 자리 정리하고 다섯 시부터 디자인 맵 회의할 테니 준비하도록 해요.


기획 영업 팀과 월례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희정이 바뀐 디자인실 내부를 훑어보다가 복사기 옆에 어색하게 짝을 지어 있는 지영의 자리를 쳐다본다.


- 스템플러 뜯은 건 쓰레기통에 넣어야지 누가 복사기 위에 두 개씩이나 올려 놨니?


그녀는 복사기의 종이 트레이에 누군가가 떨어트린 스템플러 심 두개를 지영의 책상 쪽으로 털어냈다.


- 회의 끝나셨어요 팀장님?


그녀를 못 본 척 하는 지영과 달리, 지영의 책상 밑에서 전선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던 동진이 희정을 올려다 보며 특유의 서글서글한 눈매를 하며 웃어 보였다.


- 어머 동진씨 있는지 몰랐네. 거기 왜 그러고 있어? 이 선들은 주변에 앉은 사람이 정리해야지, 자기는 가서 자기 일 해.

자리 정리를 마치고 팀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희정이 디자인 맵 회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엔 전체 회식 얘길 꺼냈다.


- 이번주 원래 할 일이 산더미여서 당분간 야근을 해야 하지만 오늘은 월 매출 300% 달성한 기념으로 배꼽집에서 회식 있으니까 일곱 시까지 업무 정리하고 출발하는 걸로 하자. 다른 부서들은 여섯 시 정시에 나가고 디자인실은 조금 늦게 출발한다고 말씀 드렸어.


‘인센이나 주지, 또 웬 회식?’ 보라가 자신의 다이어리에 갈겨쓴 메모를 수현에게 보여주고 얼른 지운다.

‘ㅋㅋㅋ 내말..’


- 우리 고기파 시은이 한우 먹으러 간다니 좋은가 보다. 얼굴에 화색이 도네?

- 그럼요. 고기도 먹고 술도 먹잖아요. 그것도 무료로요!

- 뭐야, 얜 왜 맨날 이렇게 해맑아.


웬만하면 찡그리는 법이 없는 막내 시은이 때문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 그동안 많이들 힘들었지? 신규브랜드 하나 성공시키는 일이 망한 브랜드 다시 살려내는 일보다 열 배는 더 힘든 일이라는 사실 너무 잘 알아. 하는 일도 옆의 두 집 다니는 디자이너들보다 우리 팀원들이 항상 몇 배는 더 많은데 연봉은 그만큼 챙겨주지 못해서 그동안 나도 많이 미안했어. 근데 이번에 우리 디자인실과 영업, 기획팀에게만 대표님이 특별히 100% 인센티브 챙겨 주시기로 했지 뭐야! 그러니 좀 더 힘내서 일해보자.

솔린뮤트 디자인실의 환호성이 다른 부서의 사무실까지 들려왔다.


- 오늘도 건호가 입은 스웨이드 유틸 언박싱하는 유튜버들 세 명이나 봤어요 팀장님

동진이 상기된 얼굴을 본 희정은 도리어 웃음기가 사라졌다. 일명 ‘건호 스웨이드’의 담당디자이너인 지영은 경직된 얼굴로 동진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자신의 노트애 시선을 고정시켰다.


- 그 아우터는 근데, 디자인실이 잘했다기 보다는 코르티스를 싼 값에 섭외 잘 하신 대표님 덕이 크죠, 그렇지 않나요 팀장님?

팀장의 옆에 팔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은 보라가 턱을 받친 채 희정에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허대표가 옆의 제이블렘에 똑 같은 급의 아이돌그룹을 홍보모델로 붙여줬어도 솔린뮤트 매출, 영업이익, 모두 반밖에 따라오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 솔린뮤트의 매출을 견인하는 아이템중에는 코르티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건호가 즐겨 입는 아우터 두 스타일이 있었는데 그 아이템들은 모두 지영이 맡고 있었다.


- 아 그래, 그 T 리오더 스케줄은 신경 써서 챙기고 있는 거지 지영씨는? 생산팀에게만 떠넘기지 말고 중요 건은 디자인실이 직접 챙겨서 문제 있으면 보고해. 문제가 터질 때까지 가만히 있지 말고.. 그런데 우리 막내가 이번에 처음 만든 티도 그 멤버들이 너무 좋아하던걸? 특히 마틴이 STO103을 입고 계속 인스타에 올려주고 있어. 너무도 고맙게.


- 아, 저 마틴 인스타에서 하루 종일 살고 있잖아요 팀장님. 처음 사진 보고는 너무 감동 먹어서 그날 막 울었어요.

다시 한번 시은이 때문에 디자인실 내부에서 웃음보가 터졌다.


- 잠깐, 지금 웃을 때가 사실 아니야. 리오더 건들도 밀렸지만 어프로벌 진행 건들도 그렇고 납기일에 비해 진행이 전반적으로 늦어지고 있다는 말이 많아. 디자인실 충원은 내가 최대한 빨리 할 테지만 그때까지는 야근을 해서라도 일이 밀리지는 않게 신경들 좀 써 줬으면 좋겠어. 물론 지금까지도 그래왔다는 걸 알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아참, 근데 오늘 회의시간에 재밌는 얘기가 나왔지 뭐니. 아무리 영업이익을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라지만 신규브랜드 런칭하느라 회사 재정상태가 지금까지는 사실상 적자야. 그래서 긴축재정을 해야 한다고.. 난 디자인실 충원 문제 보류한다고 하실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근데 기획팀 바로 앞에 있는 수족관 있잖아. 그 수족관 정기적으로 청소, 관리하는 비용이라도 아끼자고 하시는 거야. 수족관을 너희들이 오다 가다 유심히들 보니까 대표님이 디자인실 팀장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 보시더라고, 그거 꼭 있어야겠냐면서. 아무튼 그럴 때 우리 대표님 너무 귀엽다니까!


- 없애면 안되죠 팀장님! 우리 회사 상징 같은 거잖아요. 예쁜 구피들 보는 재미로 회사 다니는데요.


- 근데 자세히 보니 모서리 부분에 조그맣게 금이 가 있던데 정말 관리를 받는건지.. 요즘 관리 안하기 시작한 걸까요? 애들도 예전처럼 힘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깟 수족관이 뭐가 대수랴, 드디어 자신과 팀의 노력, 회사에 대한 공로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희정은 그 동안의 피로가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7시 반, 디자인실이 도착한 회식자리에서 이미 대표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취기를 숨기지 못했다. 술잔이 비기가 무섭게 대표의 잔에 서로 술을 따르려는 좌 기획 부장과 우 영업부장의 경쟁하는 모습이 여느 회식에나 있는 흔한 풍경이라지만 웬만한 사람이 대적하다가는 골로 가고 만다는 허대표의 주량을 같이 맞춰가며 마시는 것도 능력이라면 큰 능력이겠다. 희정은 늦게 오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허대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우리 신 팀장, 솔직히 말이야. 코르티스 걔들 모델로 쓰고 협찬 주면서도 반신반의 했었다고. 요즘 패션업계가 워낙 다들 손가락만 빨고 있다보니.. 근데 난 신팀장이랑 궁합이 잘 맞나봐. 뭘 할 때마다 이렇게 빵빵 터지니 신기하단 말이야. 요즘 밤 늦게까지 고생 많은 거 내가 다 알아. 우리 신 팀장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지. 난 신 팀장 아이 생기고 나서 그만 둘 줄 알았거든. 근데 출산 전보다 더 열심히 하는 거야. 이 인간이 아주, 근성이 있다니까. 나중에 세 브랜드 합쳐서 C.D해도 잘 할 거야. 누가 알아, 계속 그렇게 잘 하면 내가 곧 시켜줄지!

허대표의 말에 디자인실 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보라와 수현은 말끝에 ‘디렉터님’을 붙여가며 그녀의 기분을 돋워주는데 힘을 쏟는다. 특별한 보상 없이 공치사 하나만으로도 기꺼이 끌려가줬을 그녀였지만 이번엔 처음 받아보는 인센티브에, 빈 말이라도 옆 집 두 브랜드의 팀장을 놔두고 디자인실 전체 디렉터까지 시켜주겠다는 허 대표의 선의가 고마웠다. 세 살짜리 이안이의 깨어있는 얼굴을 본지가 언제인지, 아이가 말이 느린 게 엄마가 키우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닐까 죄책감에 시달렸던 날들과 이안을 키워주는 친정 어머니에게 미안했던 마음 등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 오늘은 중간에 이탈하는 애들 없이 대표가 가자는 대로 어디든 끝까지 가주겠다고 희정은 마음 먹는다.


- 근데 윤주 과장의 육아휴직은 얼마나 남았지? 한달 정도 있으면 돌아오나?

이미 얼큰해진 얼굴이 된 박부장의 물음에 화기애애한 디자인실 분위기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 아, 곧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임윤주 과장 낌새가 육아휴직 끝나고 돌아올 것 같지가 않아요.


- 뭐? 왜 무슨 일 있었어?


- 그냥, 원래 좀 자기 것만 챙기고 인간성이 좀 그랬어요. 예상은 했었는데 엊그제 톡으로 얘기 몇 마디 나눈 바로는 돌아올 의사가 없어 보이네요.


- 임과장 일도 잘 하고 착실해 보였는데, 의외네..

윤주와 가장 가까이 지냈던 지영은 모든 부서가 모인 회식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윤주 얘기를 꺼내는 희정의 의도를 너무 잘 알지만 자신이 나서서 윤주를 감싸 봤자, 그녀에게 하등 유리할 게없을 거라는 사실 또한 잘 안다. 무엇보다 희정의 미움만 더 살 거라는 사실이 자명해 잠자코 있기로 했다.


- 임 과장 같은 여성 직원 때문에 여자 전체가 욕을 먹는 거야. 육아휴직 쓰고 안 나올게 빤히 예상 되는데 휴직 쓰러 들어가는 것 좀 봐. 난 아무리 뻔뻔해도 그렇게는 못한다 진짜.


- 그러게요, 얼마 전 다른 회사 면접 봤다는 사실도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요.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데 그렇게 처신하는지.

얼마 전 점심을 먹으며 보라와 수현이 지영이 들으라는 듯 윤주의 험담을 해댔다. 회사 내에서지영은 최대한 말을 아끼고 대응을 하지 않는 편이다. 가치 없는 사람들하고 쓸데 없는 에너지 소모를 하는 시간에 밀린 일을 처리하고 쌓인 스트레스는 주말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풀면 그만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어차피 이 곳은 기껏해야 2,3년 경력이나 쌓고 이직할, 스쳐가는 곳일 뿐이지 않는가. 가장 친한 친구와 테니스를 치고 저녁을 먹으며 서로 직장 내 빌런들의 생김새, 그들의 비루한 생존방식을 비웃고 조롱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 편이 훨씬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 회사에서는 야근 수당도 없이 밤낮으로 일을 시켜, 팀장은 다른 과장들처럼 자신의 비위를 못 맞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 잘하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갈궈. 너 같으면 곱게 나가주고 싶겠니? 그동안 못 받았던 야근 수당, 정신적 스트레스를 그렇게라도 보상받고 나가려는 거, 난 비교적 착한 저항이라고 봐. 너 같으면 안 그러겠어?

그러나 지영이 가장 친한 친구 미경에게서 조차 들은 답은 의외였다


- 근데 솔직히, 그건 옆의 동료들에게 피해주는 일이잖아. 고용주 입장에서는 휴직기간 동안 나가는 급여는 같으니 충원을 하려 하지는 않을 거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옆자리 동료들에게 돌아가는 거야. 우리 회사에도 그런 여직원들 가끔 있는데 옆에서 보기에도 얄밉고 짜증나. 걔가 하던 일 떠맡아서 하고 있는데 육아휴직 끝나고 바로 퇴사해버리는 거 누가 좋아하겠냐고. 경력직이든 신입이든 채용할 때 남자 선호하는 걸 나도 이젠 이해하고 싶은 정도라니까?


- 야, 남자 직원들이 똑같이 육아휴직 쓰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하는 거지, 넌 어떻게 같은 여자끼리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할 수가 있냐.

팀 내에서 팀장이 자신을 얼마나 끔찍이 괴롭히는지 미경이 알 리가 없었으나, 지영은 절친이 소름 끼치도록 싫은 자신의 적을 감싸고 도는 꼴에 서운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회식자리에서 윤주 과장의 육아휴직이 도마 위에 오르자 지영은 그 때 갑자기 어색해졌던 미경과의 저녁 자리가 떠올랐다.


- 그래? 상황이 그렇게 됐다면 디자인실 충원을 한 명 더 해야겠네. 걱정 마. 우리 신 팀장이 해달라는 대로 내가 다 채워줄 테니까. 올해 솔린뮤트 매출액 천 오백억으로 잡았는데 그 목표를 벌써 뛰어넘었으니, 디자인실이 그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쓰게 해서는 안되지. 매출 이천억 달성하면 연말 워크샵으로 하와이 한 번 간다!

이번엔 밖의 지나가는 행인들이 쳐다볼 정도로 환호성이 울렸다.


- 우리 시은씨가 제일 좋아하네? 하와이도 무료로 가니까 좋은 거야?

수현의 장난 섞인 공격에도 시은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 저 벌써 남친한테 톡으로 자랑중이잖아요.


- 엉뚱하고 재밌다던 디자이너가 저 친구던가?

허무진의 물음에 기획부 박부장이 희신을 대신해 시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 디자인실 분위기 메이커에다 일도 잘하고 아주 야무집니다. 시은씨 학교다닐 때 얼짱이었다지? 우리 회사 남자 직원들한테 은근 인기 많은 거 알아? 일도 잘해, 얼굴도 이뻐, 대체 저런 인재를 왜 이제야 데려온 거예요, 신 차장?

얼평이 아직도 고급 유머 코드인 줄 아는 박부장이 희정은 못마땅하지만 대충 받아준다.


- 예, 학교를 이제야 막 졸업해서요?.

어찌됐든, 연말의 하와이 워크샵이라는 당근이 회식 분위기를 한층 더 즐겁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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