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윤 Feb 22. 2020

인생의 전환점, 암 선고

 

 2월 14일, 자궁 내막 암 의증 진단. 무서웠다. 당황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순간 내 머릿속에는 회사를 이제 쉴 수 있겠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러니하게도 그 생각이 동시에 나에게 기쁨을 주었다. 사실 기쁨이 더 컸다.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암에 대한 공포심보다 회사를 나갈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는 사실에 내 마음은 더 환호하고 있었다. 아, 왜 진작에 이 곳을 떠나지 않았던 걸까. 이 지경까지 와서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더라면 나는 진작에 사표를 던졌을 것이다.

 

 사실 회사를 나오려는 시도는 나름 몇 번 했었다. 고용주에게 찾아가 퇴직 의사를 밝혔으나 번번이 그냥 재직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몇 주에서 한 달 가량 휴가를 다녀오는 ‘보상’으로 말이다. 한심했던 건, 퇴직을 얘기하면서도 회사 대표이사가 나를 잡아주기를 내심 바랬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내 사직서를 반려하고 휴가까지 줬던 고용주가 내심 반갑고 고맙기까지 했다. 무기력증이 찾아오고 결국엔 병이 생길 정도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이 일이 지긋지긋 했으면서도.

 

 나오면 뭘 해야 할지에 대한 계획 같은 건 없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나는 퇴직 이후의 막막한 삶을 생각하고 매 순간 불안에 떨었다. 월 급여로 겨우 생명을 연장하는 인생에 신물이 났지만 다달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은 마치 멀리 도망갔다가 사료를 얻기위해 제 발로 마장으로 돌아오는 승용마의 모습처럼 나를 만들었다. 노예, 나는 주인에게 사료를 제공받고 우리에 갇혀 사는 노예, 딱 그 모습이었다. 슬프게도 그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모르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 생활을 지속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방법 외에 살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다들 그렇게, 일하고 돈 벌고 주말엔 취미생활과 자신을 위한 약간의 사치로 스트레스를 풀면서, 그렇게 사는거라고. 그러나 내 인생은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점점 병들어 갔다. 내 인생에는 나의 영혼이 빠져 있었고 탈출할 수 있는 출구는 원래부터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기업을 일구는 CEO나 부동산, 그 외에 다른 방식으로 돈을 크게 벌고 굴리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원래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세계라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나에게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계유지방법 외에는 마땅한 다른 방법이 없었고 회사 문 밖을 나서는 인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한 무지는 두려움을 낳았다.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은 나를 서서히 병들게 하고 극단적으로는 좀비처럼 만들어 가고 있었다.    


  2월 20일, 조직검사를 통한 자궁 내막 암 확진, 이 날 만큼은 회사를 나올 수 있다는 기쁨보다 절망감이 압도적으로 컸던 나머지, 담당교수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나에게 암을 선고한 의사는 아직 전이가 없어 보이니 2기 이상은 아닌 것 같고 잘하면 항암치료도 안 받을지 모른다고 설명하며 나와 뒤에 서서 같이 울고 있는 엄마를 위로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나 어떤 위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막상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압도되어 숨쉬기조차 힘들었고 그런 상태는 이틀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그런 심리상태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평온을 찾은 상태다. 10년을 넘게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일어나기 싫은,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억지로 일어나 가기 싫은 일터에 갔던 지난날들을 떠올리고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건강을 되찾을 거고 건강해지면 내 힘으로 어떻게든 일어설 거다. 살 방법을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실패해서 굶더라도 다시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겠다. 다달이 나오는 알량한 월급을 얻기 위해 자신의 거의 모든 시간과 자유를 헌납하며 일하는 월급쟁이로 돌아가지는 않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