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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 Mar 01. 2020

인생의 전환점, 암 선고

 제 2막

 20년 3월 1일,수술은 깨끗하게 끝났고 새 동이 텄다. 병실에서 맞는 아침. 일어나서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내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렸다. 자유의 몸,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다. 여성성과 관련된 장기들을 다 떼어내면 확 늙어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뭐, 거울 보니까 오히려 회춘했는데?

 

 새삼 삶의 소중함을 알아간다. 자연의 다채로운 아름다움, 인간이 만들어 낸 위대한 예술과 문화. 신나는 온갖 종류의 액티비티(?) 그리고 인간사이의 사랑과 믿음의 감정, 내가 값지게 여겼던 이 모든 것들을  등지고 이대로 가 버리게 될 까 두렵기도 했었다. 이쯤에서 끝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방사선 치료는 받더라도 항암치료는 받지 않으련다. 아직 림프조직추가검사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담당교수가 설령 항암이 필요하다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항암 치료는 남은 인생을 더 망가트릴 것이다. 항암 이후 건강한 몸과 마음을 찾는데 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들 테니까..  

 

 하고 싶은 게 엄청 많다. 위시리스트를 그동안 다이어리에 적어내리기만 했었다. 난 이것들을 이제 차례대로 하나씩 해 나가기로 했다.  다 어떻게 할 거냐고? 내 야심찬 계획을 듣는 사람이라면 분명 직장이 있고 벌이가 있어야 할 수 있지 않느냐고 걱정하거나 때로는 비아냥대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 말을 던지는 사람한테는 당장의 네 걱정이나 하라고 말해줄 거다. 굳이 직장을 갖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지금부터 시도하면 된다. 요즘 시대는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다양해졌다. 직장처럼 하루 종일 내 시간을 뺏기지 않고도 내 의지대로 시간 관리를 하면서 적게 일하고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는 일, 성공할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하지만 결코 다시 직장 안으로 기어들어가지는 않는다.     

 

 평일의 거의 모든 시간을 회사 안에서만 갇혀 있으면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몇 가지나 할 수 있을까. 난 건강이 좋지 않았던 터라 토 일 중 하루는 수면으로 모든 시간을 소진했었다. 토요일 하루 종일 침대에 붙어 있다가 일요일이 되어야 겨우 수영이나 승마를 다녀왔다. 승마는 월급쟁이가 누리기에는 비싼 취미였으나 스트레스를 날리기에는 이만한 놀이가 없었다. 정말 너무 재밌고 스릴 있는 취미생활, 나는 직장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그야말로 살기 위해 이걸 끊을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저축해야 할 많은 양의 돈을 이 비싼 취미생활에 쏟아 부은 나머지, 통장에 쌓이는 재산은 더디게만 늘었다. 결국 평일에는 월급의 노예, 주말에는 노예 활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잠깐의 취미생활, 다시 월급을 타러 나가는 일터의 삶이 반복되었다. 마치 내 평생 이 쳇바퀴 생활이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이 무한 반복되고 도망칠 구멍이 없는 거대한 지옥에 갇힌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천주교 신자였지만(지금은 무교다.) 전생에 내가 죄를 많이 지어 극락에서 환생하지 못하고 지옥에서 환생했다는 암울한 상상을 했고 나중에는 그 상상이 진짜 현실처럼 여겨졌다, 그래도 이 방법 외에 다른 삶을 알지 못했던 나는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아예 감조차 잡지 못했다. 나는 체념한 채 이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체념한 것이 나의 꿈만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암이라는 놈은 우연히 나에게 오지 않았다. 이 생활을 끊고 새 인생을 시작하라고 빠른 걸음으로 나를 찾아 왔다. 그렇게 생각한다. (내 자궁 속에 있던 종양은 일반 악성종양보다 자라나는 속도가 훨씬 빠른 무서운 성질의 종양이라 했다.) 

 

 태평양 한 가운데 작은 선박 하나를 타고 떠 있는 기분이다. 선박에는 일정량의 곡물과 물, 생활용품이 쌓여있다. 나는 작은 선박의 키를 쥐고 있다. 항해 도중 해적을 만나거나 최악의 경우 큰 해일을 만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여정은 나의 경제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통한 내 인생 전체의 자유를 위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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