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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 Apr 16. 2022

 '파친코' 가 왜 난리지?

소설과 드라마 '파친코'에 대한 이야기 1.

 세계적인 ‘파친코’ 신드롬, K 드라마의 또 다른 성공에 전국이 떠들썩한 모양새다. 그 동안 변방의 소국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한국인으로써 지금 겪고 있는 이 현상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K팝, K 드라마의 인기와 더불어 이제 한국은 세계적으로 대중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는 생각이 든다.     

 

 궁금증과 기대감에 ‘파친코’의 소설원작 1편과 애플TV에 지금까지 올라온 6화까지의 드라마를 모두 봤는데 놀라웠던 점이 있었다. 여태 봐 왔던 한국 역사 드라마나 일제압제를 배경으로 했던 여느 소설, 혹은 드라마에 비해 파친코가 결코 월등하게 뛰어나거나 재미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소설 파친코를 읽기 전에 나는 펄벅의 ‘대지’나 박경리의 ‘토지’,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대장정의 서사와 함께 퓰리처상, 노벨상과 같은 세계 문학상을 받을 정도의 뛰어난 작품성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것을 기대하고 이 작품을 대한다면 아마도 많이 실망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더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만 우선은 파친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왜 이렇게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는지에 대해 의아해서 나름 생각하고 찾아냈던 점을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파친코에서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정서는 ‘정’과 ‘한’이다. 우리말을 다른 국가의 언어로 가장 설명하기 힘든 단어가 바로 이 둘의 의미라고 하는데 그만큼 서방의 사람들에게는 없는 이 두 가지의 정서가 그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던 것 같다. 양진이 선자를 시집보낼 때 지어준 흰 쌀밥에서 느껴지는 엄마의 딸에 대한 정, 선자의 주변 인물들이 없는 형편에서도 선자에게 내어 준 결혼 선물에 담긴 정은 단순히 ‘사랑’과 ‘우정’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우리 민족만의 깊은 정서가 들어 있다. 특히 일본 압제 하에 받았던 고통과 그 비운 속에서도 살아가야 했던 우리 민족의 깊은 ‘한’은 보통의 서양인들은 결코 접해 본 적도 그래서 설명만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는 정서였을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 때 다른 국가를 정복하고 통치했던 그들이 ‘한’이라는 단어를 어찌 이해할까. 그것을 하나의 잘 만들어진 소설과 드라마로 보여주고 이해시킨다는 것, 예술작품은 백번의 말과 설명보다도 대중에게 더 쉽고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것이 문학이 가진 힘이자 예술의 위대함이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정부가 힘 써 왔던 일본의 ‘역사 왜곡’ 실태에 대한 항거와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아예 무지하거나 관심조차 없었던 세계 각 국의 사람들이 ‘파친코’라는 작품 하나로 여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심히 고무적이면서도 놀라운 사실이다. 심지어 나탈리 포트만과 같은 할리우드 배우들까지 나서서 ‘일본은 부끄러운 알라’는 일침까지 가했다고 하니 더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 또한 덩달아 일본을 비판하고 한국배우를 기용한,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까지 제작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고 한다. 국가가 나서도 지지부진, 할 수 없던 일을 두 명의 재미교포 작가와 영화감독이 해 냈다니 그 둘을 일등 국가 유공자로 지정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에 신이 난 한국의 유튜버들은 앞 다투어 파친코를 극찬하는 내용의 영상을 만들어 올리고 있다.     


  파친코가 대중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또 다른 점은 여느 장편 소설이나 대 서사시와 같은 영화들에 비해 훨씬 더 간결해서 어찌 보면 단순하기까지 한,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로 풀어갔다는 점이다. 4대에 걸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파친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특이한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리 또한 그리 복잡하게 얽히지 않고 단순하게 만들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인물 선자를 중심으로 선자의 가족과 그녀의 나쁜(?) 연인 한수에 한해서 서사를 풀어갔다는 점이 스토리를 한층 더 간결하게 만들 수 있었던 요인으로 보인다. 머리 아프게 복잡다단하지 않은 인물과 사건 구성은 소설의 독자와 드라마의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을 떨어트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스럽게 극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또 하나, 파친코의 독특한 점은 4대에 걸친 이야기 치고는 어떠한 크고 복잡한 사건을 중심으로 풀어가기 보다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더 중점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작품은 선자가 한수와 사랑에 빠졌을 때의 그 설레임과 격정, 그와 갈등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의 절망, 고국과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의 슬픔, 딸 선자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엄마 양진의 절망과 한, 한 때 조국을 잃어버리고 독립을 얻어낸 이후에도 계속 차별받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설움과 절절한 한 등에 집중하고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는 서사로 만들어 진다. 이 점은 어떤 다층적인 사건을 전개하는 스토리보다 오히려 더 깊은 몰입도와 울림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시종일관 내가 마치 선자에게 빨려 들어가 그녀가 되어 같이 울고 웃었다는 점이 그렇다.     

 여기에 더해 소설을 영상으로 옮겨온 드라마는 그 뛰어난 영상미와 더불어 사운드와 아름다운 OST 또한 탁월했다는 점도 얘기하고 싶다. 특히 한수가 선자를 바라볼 때 흐르는 OST는 머리 끝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말 아름답다.     

 

 파친코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다. 오늘은 파친코의 긍정적이고 훌륭한 점들만 얘기했으니 다음에는 앞서 얘기했던 실망스러웠던 점과 이 밖의 다른 얘기들을 더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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