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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 Apr 19. 2022

소설 '파친코'의 이런 점은 영 별로..

  현재 ‘파친코’ 2부의 중반부까지 읽었다.     


  작가가 오랜 기간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 소설로 만들어냈다는 ‘파친코’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자이니치의 삶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태 막연하게만 추측했을 뿐이었지 한국인인 나조차도 일본이라는 타지에서 생존해 온 우리 민족의 삶이 그렇게까지 비참하고 서러웠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 점에서 파친코는 훌륭하다. 긴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서둘러 넘기고 싶을 만큼 서사와 플롯 또한 탄탄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읽는 중에 몰입도를 떨어트리거나 독자로서 당혹스러웠던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오늘은 여기에 대한 얘기를 해 보고 싶다.     

 

 나는 작가의 빈약한 문장력에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원어가 우리 말이 아닌 영어라 어떤 이는 번역의 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했지만 솔직히 나는 번역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의 수많은 고전이,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는 이유로 읽는데 크게 지장이 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파친코는 놀랍게도 종종 몰입을 떨어트릴 정도로 문장력이 빈약했다. 내가 문학 평론가도 아니고 전업 작가 또한 아니지만 가벼운 웹 소설도 아닌, 전미 도서상 최종 후보에까지 오를 정도의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문장력이 형편없다고 느낄 줄은 몰랐다. 특히 1부는 작가의 습작을 퇴고 없이 그냥 실은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소설엔 불필요한 사족이 너무 많이 껴 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 해도 문학은 자세한 설명 없이도 독자가 스스로 유추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여지도 남겨놔야 한다. 여백의 미라고 해야 하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황과 감정까지도 구구절절하게 곁들인 설명은 오히려 스토리를 읽는데 방해가 되었다. 여백의 미, 파친코에는 이게 없는 느낌이다. 작가가 모든 걸 너무 친절하게 설명해 주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소설의 재미와 매력이 반감되었다.      

 

 시든, 소설이든 문학이란 그 안에 적절한 비유와 상징, 은유를 무기처럼 잘 휘둘러야(?) 훌륭한 작품이라고 배웠다. 그것이야말로 문학성이고 작품성이라는 것도. 파친코에는 또한 이런 요소들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오히려 영화에서 소설 속 ‘조선의 쌀’을 하나의 중요한 상징으로 만들어 내는 데에 성공했다. 작품 속 ‘우리의 쌀’은 어머니의 사랑이면서 동시에 아득한 고향에 대한 향수이자 민족의 설움과 한이라는 그 중요한 상징성을 오히려 영화감독이 만들어 내었다.  

 영화에서는 또한 민족의 한과 일본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써 '우리 민요'를 중요한 상징으로 잘 사용하고 있다. 이는 소설에서는 없는 내용을 새로 각색하여 넣은 장면으로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면서 불렀던 어부의 '뱃노래'와 오사카로 건너가는 여객선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들려주었던 어느 가수의 '춘향가'를 통해 시청자로 하여금 비통하고 무거운 울림을 온 마음으로 느끼기에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 하나, 소설 속 여성 캐릭터들이 대부분 ‘가슴’과 ‘엉덩이’로 묘사되는 부분 또한 충격적이었다. 그들의 기질과 더불어 가슴과 엉덩이의 볼륨감은 캐릭터의 존재감 여부를 결정짓는 데에 마치 필수적인 역할이라도 하는 마냥, 그에 대한 묘사를 빠짐 없이 해 주는데에 그저 놀랄 뿐이다. 선자를 비롯하여 유미, 지아키, 아키코 등 그들 모두가 마치 작가와 소설 속 남성들의 시선으로부터 젖가슴과 엉덩이에 대한 심사를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소설을 여성작가가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잘못 알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재차 확인해야 했다.


 소설 속 한수가 술집 매춘부를 차 안에서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장면은 더욱 쇼킹했다. 여자의 피범벅이 된 얼굴과 옷섶에 흥건하게 배인 선혈의 이미지와 함께 그 과정과 장면이 머릿속에서 훤히 그려질 정도로 매우 구체적이고 적나라했다. 한수의 이중적인 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으나 폭행 장면의 자세한 서술 부분에서 심한 거부감과 함께 역겨운 기분마저 들었다. 불필요한 장면은 아니라 해도 불필요한 서술이었다. 휴머니즘을 얘기한다는 소설이 마치 술집 여자에게 가하는 폭력에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만 같은 불편함, 작가의 마초적인 시각에 적잖게 놀란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미 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점은 이 모든 결점들을 능가하는 작가만의 뛰어난 기량과 파친코만의 매력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고 싶지만 만약 이민진 작가가 이 소설을 처음부터 한국에서 출판하고자 희망했다면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 그만큼 국내 문학은 작품에 대한 심사가 까다롭고 작가 등단의 문턱 또한 높다.


 세계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작가 등용문인 등단 제도는 신춘문예나 유명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공모전에서 뽑혀야지만 비로소 작가로 인정받게 되는 혹독하고 빡센(?) 제도이다. 마치 작가 입시와도 같은 이 제도는 공모전에서 각 분야별로 단 한명의 당선인만을 선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백 명이 지원하든, 천 명이 지원하든 등단하는 사람은 오로지 한명, 그야말로 ‘바늘구멍에 낙타 들어가기’ 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심사위원들은 한 공모전에 아무리 우수한 작품이 여럿 있더라도 이  한명만을 뽑기 위해서 세상 엄격하고 까다로운 심사조건을 들이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고상(?)하고 수준 높은 작가는 이후의 작품 활동 역시 동일한 맥락으로써 저 세상 수준의 문학성을 펼치고자 애쓰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탄생한 국내 순문학작품들은 결국 대중에게 외면을 받는다. 때로는 ‘이 책, 진짜 평론가와 작가들만 읽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손을 탈 만한 작품성(?) 때문이다. 한국에서 유독 순문학의 인기가 바닥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게 치열하게 순문학 작가를 만들면 뭐하나? 대중이 읽어주질 않는데. 순문학이 지루한 대중은 차라리 웹소설을 읽는다.      

 

 이에 반해 유럽을 비롯한 미국에서는 장르소설의 시장이 꽤 두텁다고 한다. 흥미진진하고 강렬한 서사를 중심으로 하는 장르문학은 순문학보다 좀 더 읽기 쉽고 무엇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웹소설처럼 지극히 통속적이거나 유치하지도 않다.) 파친코를 장르소설로 분류하기는 애매하지만 확실히 문학성과 작품성을 철두철미하게 따라가야 하는 순문학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고전과 같은 문학성과 작품성을 지니지 않았다 하더라도 재미있고 가치 있는 스토리와 재능 있는 작가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 같다. 작가를 발굴해 내는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관대하고 덜 폐쇄적이라는 얘기, 난 그렇게 생각한다.     

 

 파친코를 읽다가 얘기가 여기까지 왔다. 결론은 국내에도 파친코와 같은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얘기이다. 그런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하는 희망사항. 소설의 남은 분량을 빨리 읽고 애플TV에 남아있는 드라마 시리즈를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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