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환상과 현실 사이 그 어딘가!

Art Feeller 감상

by 아트필러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가는 대화


A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관계란 어떤 걸까?’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 계기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해 보면 될 것 같아. 우리가 저번 봄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두 작품을 가지고 '허무하고 무의미한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질문을 했었잖아. 감상을 통해서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결국은 관계가 이런 허무함을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나름의 답을 얻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런 ‘관계’가 답이라면 '어떤’ 관계가 우리가 삶을 선택하고 계속해서 살아나가게 하는 걸까?'가 궁금해서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됐어. 너는 어때?


J

우리가 질문 자체를 고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잖아. 그만큼 우리 둘 다 다음에 어떻게 나아가야 될까에 대한 생각이 통일됐던 것 같아. 나 같은 경우에는 내 주변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이 많은 관계들이 내 삶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은 것 같아. 일상 속에서 주변 사람들의 작은 배려로 내가 처했던 상황들이 조금 나아지는 경험을 실제로 하기도 했고. 우리가 봄에 봤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에서는 시적인 삶의 방향성이나 인생 전체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은데, 그것보다 내가 지금 당장 개선할 수 있는 영역은 사람 간의 관계라고 생각을 했어. 그래서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서, 좋은 관계를 맺는 법이나 유지하는 법을 영화나 책 같은 것을 읽으면서 좀 다시 배워가고 싶어서 이 질문을 고르게 됐어.


A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고, 이번에는 실제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라는 걸 짚어줘서 되게 좋은 것 같아. 나도 그걸 의식하지 못했는데, 네가 방금 짚어주니까 그런 마음이 있어서 이 질문에 자연스럽게 끌리게 됐던 것 같고. 그럼 실제로 이번에 두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네가 초반에 이 질문을 던지면서 배우고 싶었던 점들에 대한 답을 좀 얻은 것 같아?


J

솔직히 말하면 아니야. 그래서 처음에 작품을 보고 나서 조금 당황했어. 나는 영화나 책에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나와서나도 저런 관계를 가지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제 거기서 나온 관계들은 너무 절망적이었다고 해야 되나 그래서 조금 우울한 감정이 있었던 것 같아. 근데 생각해 보면 일상에서도 관계라는 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잖아. 특히 그 영화 <더 웨일>에서처럼 갈등의 골이 이미 서로 간에 너무 깊을 때에는 서로 간에 갖고 있던 정만으로는 다시 주어질 수 없는 관계들도 있는 것 같아. 그래서 그런 부분이 나름의 교훈이자 나의 결론이었던 것 같아.


A

나도 되게 공감됐던 게 처음 작품을 선정할 때는 좋은 관계,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관계 이런 것들에 대한 답을 좀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너무나도 많이 망가지고 서로를 너무 좋아하지만 증오하는 약간 애증에 가까운 관계들을 보면서 오히려 관계에 대해서 새롭게 보는 시선을 발견했던 것 같아. 전에는 뭔가 좋은 관계와 나쁜 관계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고 좋은 관계의 조건은 이런 거고 나쁜 관계의 조건 이런 거라고 좀 한정지어서 생각했는데, 그 관계라는 걸 흑백으로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는 유연한 태도를 배웠어.


J

영화랑 책을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이나 문장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나는 조금 발췌를 해왔어. 먼저 <자기 앞의 생>이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을 읽어볼게.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앞에서 말했던 거시적인 삶의 방향성이라는 내용과 조금 대척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 구절을 골랐어. 하밀 할아버지는 어떻게 보면 인생을 오래 사신 분이잖아. 그래서 관계를 이루는 사람 간의 정이라는 것은 삶의 특정한 시기에만 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관계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모모는 아직 어리고 경험한 관계가 많지 않기 때문에 로자 아줌마와의 관계가 너무 중요해서 마치 인생 전체를 담은 책처럼 느껴졌다는 그런 내용이잖아. 그래서 이것이 관계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나 스스로도 떠올려보게 되는 구절이었던 것 같아.


A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냥 스쳐 지나간 문장이었는데 네가 이렇게 읽어주니까 우리의 질문과 소설 전체의 본질에 맞닿아 있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책 맨 첫 장에 하밀 할아버지한테 모모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냐고 물었을 때 그럴 수 있단다라고 하자 울고 싶어 졌다는 그 문장도 네가 말한 아까 해석과 되게 비슷한 결의 얘기인 것 같아. 그만큼 관계라는 게 인생에서 얼마나 크게 와닿는지의 차이를 보여주는 문장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네가 이 문장 얘기했을 때 나는 오히려 그 앞부분이 생각났던 것 같아. 혹시 영화에서 이런 비슷한 결의 기억에 남는 문장이나 대사가 있었어?


J

나는 딱 하나의 대사가 너무 내 뇌리에 박혔다고 해야 되나 그랬는데, 그게 바로 그 주인공 찰리가 얘기했던 “내 인생에서 하나라도 잘한 게 있다는 걸 알아야겠어.” 이 대사였어. 이게 어떻게 보면 관계를 통해서 자기의 인생을 증명을 받고 싶어 하는 찰리의 속마음이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했어. 소중한 관계는 영향력이 되게 큰 만큼 망가졌을 때의 여파도 너무 큰 것 같아. 찰리가 그런 것의 여파를 굉장히 크게 받은 인물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해. 찰리를 보면서 내 모습이 조금씩 보였던 게 나도 가끔 관계가 망가지는 게 두려워서 거리를 두거나 미리 피하고 이미 틀어진 관계 같은 경우는 영영 모른 척하고 회피하고 싶은 그런 성향이 나오거든. 그래서 그런 걸 보면서 찰리의 인생에 조금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이 부분이 인상 깊었어.


A

망가진 관계를 회피하고 싶다는 그 마음은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껴봤을 것 같아. 잘 나가는 시간만 있는 게 아니잖아. 내가 너무 초라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시기들도 분명히 있는데 그런 시기들을 지나갈 때 오히려 더 가까웠던 관계가 큰 상처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 그래서 너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누가 나 같은 사람을 인생에 끼워 넣고 싶겠어”라는 대사가 떠올랐어. 찰리가 망가진 관계를 어떻게 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거든. 소중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그런 마음들이 되게 공감됐던 것 같아.


J

너는 작품에서 인상 깊었던 다른 장면이나 문장이 있었어?


A

나는 매일같이 반복되었을 일상들을 묘사한 장면들이 되게 인상 깊었어. 찰리가 몸이 불편하니까 다양한 보조 장치를 이용해서 씻고 잠자리에 드는 모습들, 로자 아줌마가 항상 관절염을 호소하면서 7층 계단을 올라가는 그런 장면들. 몸이 불편한 두 사람이 고통받는 장면인데 나는 고통을 겪을 때는 굉장히 혼자 있게 된다고 생각하거든. 어떤 관계도 들어오지 못하고 그 고통은 오롯이 혼자 감당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그 시간에 오히려 관계의 잔상과 상처가 많이 보여서 그런 장면들이 인상 깊었던 것 같아.


J

나도 그 장면들을 보면서 찰리가 혼자 있으면서 굉장히 우울감, 자기혐오를 많이 느꼈다는 게 보였던 것 같아. 특히 피자 배달 부가 종종 찰리의 안부를 물어주다가 어느 날 찰리의 모습을 확인하고 도망가게 되는 장면이 있잖아. 찰리가 그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절망감을 느끼고 폭식을 시작하잖아. 그런 걸 보면서 가끔 찾아오던 생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도 그 사람이 준 영향이 찰리에게 너무 컸을 만큼 찰리가 굉장히 고립되어 있었고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했던 게 느껴졌어.


A

나도 그 장면이 되게 인상적이었던 게 서로가 안쓰러운 상황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의도치 않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 상황. 그래서 내가 만약에 피자 배달부였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이런 고민도 들었던 장면이었던 것 같아. 전반적으로 나는 작품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다양한 관계들의 모습을 보면서 삶을 지탱하는 관계라는 건 어떤 좋고 나쁜 조건에 관한 게 아니라 시기에 관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그래서 지금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가 내 삶을 지탱하고 나를 살게 하는구나, 그리고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 세계가 돌아가게 하는 건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나름의 답을 얻었던 것 같아.


J

되게 흥미로운 접근이야. 나도 너랑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이걸 시기라는 언어로 이렇게 키워드 화했다는 게 굉장히 신기해. 작품에서 나오는 특정한 관계를 예로 들어서 조금 더 설명해 줄 수 있어?


A

대표적으로 작품의 중심 관계인 엘리랑 찰리,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관계가 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 애증.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지만 반대로 그래서 너무나 미워하는 그런 관계가 눈에 많이 띄었어. 그래서 그 시기라는 건 사실 찰리와 로자 아줌마의 입장에서 보면 그전에 무수한 관계들이 있었잖아. 엘리와 모모를 만나기 전의 다양한 관계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 영향을 받고 있긴 하지만 지금 살아가는 건 자기 옆에서 숨 쉬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엘리가 매주 찾아와서 매일 찾아와서 어떤 대화를 한다는 게 찰리가 계속 삶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했고 로자 아줌마의 경우도 모모가 말썽도 피우고, 정신병이 유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모모와 같이 있고 싶어 하고 모모가 해주는 말이나 행동들에 위로를 받는 모습들이 그 관계가 건강하고 긍정적이다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런 관계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삶을 지탱하고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어.


J

맞아. 모모랑 로자 아줌마의 관계는 굉장히 굵직하고 무게감이 있는 관계잖아.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픈 거야. 나는 살짝 회피 성향이 있어서 오히려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나 로자 아주머니가 맡아준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들처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돕는지에 눈길이 많이 갔던 것 같아. 그게 지금 내가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기도 해. 누군가를 연민하고 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관계는 내 손아귀에서 자꾸만 벗어나는 것 같아.


<더 웨일>에서도 선교사가 처음에는 찰리를 조금 두려워하다가 나중에 자기가 구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자발적으로 찰리의 집에 찾아오기도 하고, 찰리의 과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물으면서 찰리를 구원하고 싶어 하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관계는 엇나가잖아. 그런 것처럼 뭔가 관계라는 건 내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싶다고 생각할수록 그 반대로 가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 오히려 나는 당장 옆에 있는 사람이나 나랑 함께 일하는 사람들, 내가 지대한 관심을 쏟을 수는 없지만 항상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잔잔한 관심만 가지고 이 사람들이 잘 살고 있나 이 정도만 체크하면서 사는 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


A

나도 네가 말한 그 얕은 관계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최근에 많이 공감하게 된 것 같아. 우리는 가족, 친구, 연인 같은 굉장히 친밀한 관계에 비해서 일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나 이웃처럼 거리감이 어느 정도 있는 관계는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근데 너 말대로 사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이 사람을 아끼고 애정하니까 내가 뭔가 더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어 지잖아. 근데 그런 마음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반대로 부작용을 낳는 경험을 나도 많이 했었고. 그래서 나는 좋은 의도로 그 사람한테 다가가는데 그게 상대방 입장에서는 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중요한 관계에서도 거리감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내가 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좋지만 상대방이 원하지 않았는데 밀어붙이는 건 좋지 않다는 걸 다시 되새겨야 할 것 같아.


J

이야기가 돌고 도는 것 같긴 한데 네가 좋은 관계와 나쁜 관계 두 개로 명확히 나눌 수는 없다고 했잖아. 나도 공감하는 게 어떻게 보면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뭔가 가까운 관계면 좋은 관계일 확률이 높겠지만 일상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관계 아니면 그냥 단순히 메일만 주고받는 사이, 구내식당에서 한 번 마주치는 사이 정도인 사람들은 사실 좋은 관계일 수도 있고 별로 껄끄러운 관계일 수도 있잖아. 근데 이 관계가 나에게 주는 긍정적인 느낌이나 부정적인 느낌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모든 관계에 적당히 관심을 가지고 이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케어하는 건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 내가 어떤 관계를 선호하는지는 있을 수 있지만 나쁜 관계라고 해서 이 관계를 끊어내겠다는 생각은 조금 지양해야 될 것 같아.


A

맞아. 관계를 한 번 그런 식으로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기 시작하면 사실 거의 다 끊어내게 되는 것 같거든. 왜냐하면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게 크게 느껴지는데 모든 상황은 작용과 반작용이 같이 일어나니까. 그래서 나도 너 말대로 그걸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안부를 묻는 그런 다정함은 서로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이니까.


J

우리의 경험을 공유해 봐도 좋을 것 같아. 관계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이 기대하게 되어서 상대방한테 처음보다 많은 걸 바라게 된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어떤 사람한테 너무 내가 참견하고 싶고 이 사람을 돌봐주고 싶어서 오히려 관계를 약간 틀어지게 한 적이 있어?


A

나는 관계를 대부분 좁고 깊게 형성하는 편이라 내가 아끼는 주변 사람들한테는 대부분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 내가 이 사람들을 너무 아끼니까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 행동하고 말했는데 그러다 오히려 상대의 말을 안 듣거나 부담감을 줬던 경우가 있었어. 반대로 상대방은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나 말에 압박감이 느껴지기도 했었고. 그래서 요즘은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이 사람이 나한테 말하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앞서서 과하게 나가는 건 자제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 같아. 나는 그 사람의 구원자나 부모가 아니라는 생각을 되새기면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물론 상대가 도움을 요청하거나 대화를 요청할 때는 충분히 그 사람 말을 잘 들어줘야겠지만 내가 전전긍긍하면서 이 사람한테 도움이 되겠다고 하는 행동은 오히려 독이 되거나 역효과를 내는 경험이 있었으니까. 너는 주로 어떤 마음으로 관계를 맺고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편이야?


J

나도 너랑 비슷하게 굉장히 좁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거든. 특히 장녀라서 어쩔 수 없이 내 동생들한테 너무 신경을 쓰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에는 어릴 때 생각이 자꾸 나니까 얘가 조금만 뭔가 어려워 보여도 내가 어떻게든 해줘야 될 것 같고,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막 혼자서 생각을 했어. 근데 최근에는 얘가 어느 정도 커서 내가 어떻게 조언을 해주고 있을까라고 고민하는 사이에 혼자서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거야. 그게 좋은지 나쁜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 어쨌든 내가 조언을 굳이 안 해도 되는구나, 내가 너무 오지랖을 부렸구나, 얘는 잘 살아가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 관계에 집착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A

네가 이제 가족 얘기를 하니까 생각이 났던 게 우리가 저번에 감상한 작품은 일본 배경이라 가족 내에서 솔직하지 못한 동양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했었잖아. 솔직하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것들이 관계에 미치는 부작용을 들여다봤었으니까, 이번에는 서양의 관계 맺는 방식,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그런 솔직함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고 싶었어. 솔직함이 관계에서 중요하다고 다들 얘기하잖아. 근데 과한 솔직함은 상대에게 폭력적일 수도 있고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어느 선까지의 솔직함이 필요할까? 이런 게 좀 궁금했던 것 같아.


J

요즘 되게 화제가 되는 주제잖아. “저는 솔직한 편이에요”라고 하고 모든 사람한테 상처 주는 사람들. 이제 동양 문화권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듣기는 했어. 나는 솔직하다는 명목으로 남에 대한 평가나 혹은 단정 짓는 말을 하게 될 때 그게 과한 솔직함의 기준이라고 생각해. 사실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상대방도 알아야 되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감정에 있어서는 솔직한 게 좋다고 생각을 하긴 하는데 그게 타인에게 어떻게든 해가 되지 않으려면 그 말이 전달되는 방식에 신경 써야 될 것 같아.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아까도 말했듯이 최대한 나의 판단은 배제한 상태로 상대가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의도였는지에 대해서 열려 있는 태도로 관계에 임해야 된다고 생각해. 너는 어떻게 생각해?


A

나도 뇌를 거치지 않고,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말을 하는 솔직함은 무례함에 가깝다고 생각해. 그리고 말하는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그 솔직한 게 정말 본심일까라는 생각도 들어. 그러니까 <더 웨일>에서도, <자기 앞의 생>에서도 인물들이 솔직하게 악 쓰듯이 내지르는 말들이 본심이 아닐 때도 있잖아. 미워하고 증오한다고 말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애정과 미련이 있다든지, 다신 보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다렸다든지 이런 식으로 우리가 솔직함이라는 거에 있어서 얼마나 투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한 것 같아. 왜냐하면 그 질문이 없으면 사실 진심도 전달되지 않고, 전하는 방식이 폭력적이어서 어떻게 보면 그냥 서로 상처를 주는 거잖아. 나도 본심이 아닌 말을 하고, 그 사람도 상처를 받고. 그래서 나는 네가 말했던 대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솔직함이 정말 내 본심일까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필터를 거치는 과정을 통해서 더 성숙한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마침표 그리고 새로운 물음표


J

지금까지 우리가 대화를 하면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관계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은 것 같다고 생각해. 우리가 이 대화를 통해서 내린 결론이 있다면 뭘까?


A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을 때, 그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나름의 답이 나왔던 것 같아. 그러니까 삶을 지탱하는 관계가 어떤 것이다~라는 답은 아니지만 우리가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라는 다른 방향이지만 충분히 통찰력 있는 답을 얻은 게 아닐까?


J

맞아. 우리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래도 그 사람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그 사람들의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해 보고, 이런 식으로 누군가한테 끊임없이 다가가는 건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게 됐어.


A

네가 말한 것처럼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관계의 장벽이 되거나 시니컬하게 냉소주의를 가지게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계속해서 다른 사람한테 다가가고 더 나은 관계를 위해서 노력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된 것 같아서 이번 감상이 미친 영향이 되게 긍정적이고 컸던 것 같아.


J

결국 우리는 타인에게 끊임없이 다가가는 게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잖아. 그럼 다음번에는 어떻게 하면 상대방한테 괜찮은 방식으로, 좋은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면 어떨까?


A

이번에 우리가 다뤘던 작품들이 되게 딥하기도 했었고, 어떻게 보면 망가진 관계나 부정적인 관계의 측면들을 많이 봤던 것 같아서 다음번에는 긍정적이고 밝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을 찾아보고 감상해 봐도 좋을 것 같아.




에디터 A와 J가 실제로 나눈 대화가 궁금하다면

https://www.youtube.com/watch?v=JReKFUshI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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