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구원한다는 착각!

editor J

by 아트필러

관계에 의한 구원이란. 두 번째 콘텐츠를 기획할 때만 해도 난 관계와 인연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서로를 지탱해 주는 관계란 분명 아름다울 거라고 믿으며 작품을 골랐다. 어려운 삶을 풀어나갈 방법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규범으로도 도덕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의 악의를 인간성으로 이겨 내고 싶었다.


시련에도 정도가 있다는 걸 새삼 느끼기 전까지.


왜 세상에는 못생기고 가난하고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앞의 생 中)


이 두 작품은 너무나도 직설적으로 끔찍한 삶을 그려 내고 있었다. 이들의 삶을 뜯어보며 동정하거나 비난하기도 죄스럽다. 이러한 동기로, 내가 느낀 비참한 기분을 정제하지 않고 쓴다.


‘그 고래만 죽이면 삶이 나아지리라 믿지만 실상은 그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될 테니까.’ 엘리가 쓴 독후감의 이 구절은 정확히 찰리의 인생을 짚어낸다. 영화에서 가장 보기 힘들었던 부분은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넘어가는 찰리의 숨도, 자기 부정과 우울을 안고 일찌감치 죽은 찰리의 애인 이야기도 아니었다. 자해를 반복하면서도 무심코 삶을 이어 나가려는 그 관성이 무서웠다. 창가에 늘 새 먹이를 준비해 두고, 초콜릿 바를 먹으려다 멈추며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참담한 심정이다. 일주일 만에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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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에게 생을 추구하는 건 죄악이다. 애인을 위해 가정을 버렸고, 그 애인마저 지키지 못했다. 남의 도움 없이는 일어서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혐오감 어린 시선을 피해 모니터 뒤로 숨는다. 그는 자기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를 하는 찰리는 마치 ‘나는 죽어도 싸다’고 스스로 암시를 거는 것 같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속죄이자 쾌락이다.


죽음을 일주일 앞둔 그에게 달갑지만은 않은 인연들이 찾아온다. 각자 마음속에 품은 소망을 찰리가 이루어 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선교사 토마스는 찰리를 구원하고 자기의 과오를 용서받으려 한다. 엘리는 죽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글쓰기를 도와 달라는 핑계를 앞세워 찾아왔지만,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보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리즈는 마지막까지 찰리의 유일한 보호자로 남고 싶어 한다. 세상 누구도 그를 이해할 수 없고, 그런 그를 위해 희생하는 건 자신뿐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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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엘리, 토마스, 리즈


그러면 찰리는 정말 이들을 통해 구원받았는가?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삶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던 엘리의 독후감이 정말 찰리를 구원한 걸까?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결론이지만, 나는 이 영화가 찰리가 거짓된 욕망(죽음) 안에서 진실로 자기가 원하는 바를 깨닫고, 자신이 삶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스스로 해방되는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았다.


찰리 또한 주변 인물, 특히 엘리에게 품은 기대가 있다. 자기 없이도 잘 커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신이 죽으면 엘리가 모든 유산을 가질 수 있게끔 치료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정말 엘리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내게는 이런 행위 역시 자해의 수단이자 속죄 의식에 가까워 보였다. 찰리는 가족에게 상처를 준 자신을 벌주기 위해 일부러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감내했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외로운 죽음을 원했다.


자기에게 솔직해지는 일도 찰리에게는 과분한 평안이었는지, 그는 묵묵히 고립된 채 살아간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점차 닫힌다. 리즈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폭식하고 답답할 정도로 침묵한다. 그러다가 결국은 죽음을 코앞에 두고 찾아온 전처 앞에서 그의 진심을, 이기적인 동기를 털어놓는다.


내 인생에서 하나라도 잘한 게 있다는 걸 알아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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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음을 재촉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삶에 미련이 남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어서였다. 자기 삶을 어떤 방식으로든 받아들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죽음을 통해 자신을 증명(혹은 처벌)하여 모든 걸 마무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강의에서도 그는 전과 다르게, 최대한 솔직한 글을 쓰라는 말을 남기고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말 그대로 모든 걸 방출해 버린다.


결국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찰리는 그의 온 삶을 통해 그걸 보여준다. 좋은 관계는 트리거가 될 수는 있어도 누군가를 완전히 바꿔 놓지는 못한다. 왜일까?


첫째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한 의도로 접근하면서도, 한순간 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영화에 나온 선교사, 혹은 엇나가는 엘리를 회유하려던 찰리처럼. 타인을 타인으로 남겨 두는 게 쉽지 않다. 어느 순간 나의 모습을 투영해 ‘내가 이 사람이라면 이러지 않을 텐데.’ 하는 무의식적인 생각으로 타인의 판단을 재단하고 그의 결정에 영향을 주려고 한다. 그를 위해준다는 명목으로 그의 삶에 관여하려고 하는 태도는 진정한 이해라고 볼 수 없다.


둘째로 우리는 무심코 상대를 통해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관계를 형성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상대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어떤 관계 안에 속하고 싶은지를 생각하고 행동을 조정한다. 상대를 통해 나의 변화를 바란다. 이것이 배제된 인간관계는 어릴 적에나 누릴 수 있는 특혜이다. 결국 내가 맺는 모든 관계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배려는 순전히 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상대를 위한다고 해도 끝끝내 상대를 구원할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는 기꺼이 구원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요즘은 ‘우리’ 안의 너와 내가 하나씩 뜯어보면 너무도 다름을 실감한다. 같은 목표를 위해 힘을 모았다가도, 그 안에서 다른 생각을 한다. 이런 세상에서 진정으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맘 편히 기댈 수 있을까?


제한적인 인물들 간의 갈등을 다루는 <더 웨일>과 달리, <자기 앞의 생>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 같은 존재들이 있다. 나는 ‘모모’와 ‘로자 아줌마’ 사이의 굵직한 유대보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돕는지에 유독 눈길이 갔다. 계단을 못 오르는 로자 아줌마를 떠받쳐 주는 사람들,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위해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이웃들. 그들은 자기 삶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동네에서, 작고 냄새나는 방 한 칸에 로자 아줌마와 아이들이 있음을 기억해 주었다.


모모는 인생이란 소중한 것을 잠시 가졌다가 떠나보내는 일임을 배웠다. 나 역시도 두 번째 주제를 통해 관계에 거는 기대를 조금은 떠나보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남의 인생에 깊이 관여할 수 없다. 그럼에도 타인을 자주 들여다보고, 타인이 호소하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싶다. 유대와 구원은 다르다. 그래도 우리가 전자의 기쁨 정도는 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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