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평온한 일상의 균열
- 서문 -
따뜻한 커피 향과 복잡 미묘한 감정이 얽히는 카페 안단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 등장인물
- 민준(23살) : 명문대를 휴학하고 군 전역 후, 복학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남자 주인공,
눈치는 없지만, 다정한 성격
- 서윤(23살) : 카페 안단테 사장의 딸, 털털하고 까탈스러운 성격. 민준이와 동갑
- 하윤(18살) : 비밀을 간직한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소녀
- 점장 : 카페 안단테 사장의 처남, 카페의 경영을 맡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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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평온한 일상의 균열
민준은 하윤과의 만남을 떠올라보았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밤에 한 불청객의 등장으로 깨졌었다
.
"어서 오세... 어?"
카페 주방에서 원두를 정리하던 민준은 문을 열고 들어온 형체를 보고 멍하니 멈칫했다.
젖은 생쥐 꼴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았다.
하얀 원피스는 빗물에 젖어 살에 달라붙어 있었고, 검고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어깨를 덮고 있었고,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몸짓으로 구석의 의자에 앉던 애처로운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이 민준과 하윤, 서윤과의 첫 만남이었다.
처음에는 하윤이 탐탁지 않게 보였다. 아무래도 위험한(?) 인물 같아 보였다.
하지만, 갈 곳 없어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위태로움이 마음에 걸린 서윤은 그녀를 신입 아르바이트생으로 받아달라고 사장님들께 졸랐고, 점장님한테도 졸라서 어렵게 어렵게 허락을 맡았다.
일단, 갈 곳이 없는 하윤을 서윤이 살고 있는 사장님 집에 안 쓰는 방을 내줬고,
당분간은 서윤네 집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입을 옷이 없어서 서윤이가 자신이 예전에 입었던 옷들을 내줬다.
하윤이 카페 안단테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사흘째.
민준의 주요 업무는 서툰 하윤에게 카페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선임' 역할이 되었다.
"하윤 씨, 에스프레소 머신은 우리 카페의 심장이에요.
포타필터에 원두를 담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레벨링'과 '탬핑'이에요."
민준은 직접 포타필터를 들고 원두 가루를 평평하게 고르는 법을 시범 보여주었다.
하윤은 수첩에 무언가를 빽빽하게 적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동작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자, 이제 하윤 씨가 한번 해볼래요?"
민준이 포타필터를 건네자 하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탬퍼를 잡고 힘껏 눌렀지만, 민준이 보기엔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잠시만요. 너무 힘으로만 누르려고 하지 말고, 어깨와 손목이 수직이 되게 해서 몸의 무게를 이용해야 해요."
민준은 조심스럽게 하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잡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체온에 하윤이 깜짝 놀란 듯 어깨를 움츠렸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해야 감각을 익히기가 쉬워서..."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선배님."
하윤은 고개를 푹 숙였지만, 민준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따뜻함과 단단함이 싫지 않았다.
민준은 하윤의 손을 올바른 각도로 이끌며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가장 어려운 건 우유 스팀이었다. 스팀 노즐에서 나오는 뜨거운 증기와 거품 소리에 하윤은 매번 질겁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하윤 씨가 노즐을 깊이 넣으면 거품이 안 생기고, 너무 얕게 넣으면 굵은 거품이 생겨서 라테 아트가 안 돼요."
민준은 하윤의 뒤에 서서 그녀의 양손을 잡고 스팀 피처의 기울기를 조절해 주었다.
거품이 생기는 칙칙하는 소리에 하윤이 또다시 움찔하자, 민준은 그녀의 손에 힘을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잡고 있잖아요. 소리에 집중하세요.
지금 이 부드러운 소리가 나야 좋은 거품이 생기는 거예요."
민준의 목소리가 귀에 가까이 들리자 하윤의 심장 소리가 스팀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민준의 도움을 받아 겨우 부드러운 거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니다.
"와! 하윤 씨, 처음치고는 정말 잘했어요!"
민준이 하윤의 거품을 확인하고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하윤은 자신을 쫓던 차가운 그림자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온기'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민준이 만들어낸 부드러운 우유 스팀 같은 다정함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는 서윤은 맘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카페 주방 너머, 머신 앞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서윤은 손에 든 아메리카노 잔을 꽉 쥐었다.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진 커피는 이미 입안에 쓴맛만 남기고 있었다.
"잠시만요. 너무 힘으로만 누르려고 하지 말고..."
민준의 목소리. 평소 자신에게 "야, 강민준!"이라고 불리며 툴툴대던 그 다정한 저음이 지금은 오롯이 하윤만을 향하고 있었다.
민준의 커다란 손이 하윤의 작고 하얀 손등 위로 겹쳐지는 순간, 서윤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겨우 사흘 됐잖아. 저런 손길, 나한테는 한 번도 안 해줬으면서.'
서윤은 민준과 보낸 2개월의 세월을 복기했다.
카페에서 서빙하다가 넘어진 자신에게 무심하게 부축해 주던 친구. 자신에게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그 모든 순간 속에 민준은 늘 곁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지금처럼 '남자'로서의 긴장감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민준의 등판은 하윤을 감싸듯 단단하게 펴져 있었고, 하윤의 사소한 떨림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선임'의 태도가 아니었다. 적어도 서윤의 눈에는 그랬다.
"하윤 씨, 소리에 집중하세요. 제가 잡고 있잖아요."
민준의 그 말 한마디가 서윤의 귓가에 가시처럼 박혔다.
'내가 잡고 있다'는 말. 서윤이 카페 운영 때문에 힘들 때나,
유학 고민으로 밤을 지새울 때 듣고 싶었던 그 확신에 찬 위로를 민준은 만난 지 며칠 안 된 여자애에게 너무나 쉽게 내뱉고 있었다.
"참 나, 아주 로맨스 영화 찍으시네."
서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컵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둔탁한 소리에 민준과 하윤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당황한 하은의 눈동자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 서윤아? 너 언제 왔어?"라고 묻는 민준의 무신경한 눈빛.
서윤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카운터로 걸어갔다. 하윤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에 서린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그 특유의 '위태로움'이 더욱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강민준, 너 공과 사 구별 좀 해. 손님들 들어오면 오해하겠어. 연애하러 왔니, 일 가르치러 왔니?"
서윤의 가시 돋친 말에 민준이 당황하며 손을 뗐다. 하지만 서윤은 알고 있었다.
민준이 손을 떼는 찰나의 순간, 그의 시선이 하윤의 얼굴에 아주 잠깐 더 머물렀다는 것을.
'내 2개월이라는 세월이 저 여자애의 눈물 한 방울보다 가벼웠던 건가.'
서윤은 타오르는 질투심보다 더 아픈, 차가운 소외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카페 안 가득한 달콤한 라테 향기가 오늘따라 유독 비릿하고 역겹게 느껴졌다.
서윤의 차가운 태도에 화들짝 놀란 민준이 멋쩍게 웃으며 그 자리를 피했다.
"아참... 창고에서 할 일이 있었지...."
민준이 사라지고 난 후, 서윤과 하윤의 둘은 깊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언니... 미안해요... 제가 일이 서툴러서... 오빠한테 가르쳐 달라고 한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소리를 훽 질렀다.
"너... 너.... 아휴... 아니야...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원..."
서윤은 마침, 커피를 다 마신 커플이 자리를 비우게 되어, 테이블을 정리하러 갔다.
평온했던 서윤의 일상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난 하윤이라는 소녀때문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